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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한아름 Nov 13. 2022

당신이나 내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면

C.S 루이스 [헤아려본 슬픔]

 너무나 유명한 작가 C.S 루이스가 쓴 책이다. 그가 50이 넘은 나이에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을 한 지 1년 만에 아내 조이의 골수암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때, 그의 어머니도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혼인신고를 한 지 5년도 안되어 그녀를 잃고 말았다.

 아내를 잃고 난 후의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기록한 메모들을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처음에는 가명으로 출간했었다고 한다.

 이 책의 초반부는 다소 혼란스럽다. 고통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횡설수설하기도 한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무섭지는 않으나, 그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 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진다.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깎는 일조차 하기 싫다. 내 뺨이 텁수룩하건 매끈하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그 고통의 느낌은 이런 것이구나. 그의 사실적인 묘사 덕분에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후, 우리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억울해하고 몸부림친다. 때로는 억울함에 하나님께 삿대질을 해대기도 한다. 그 또한 약간은 흔들리기도 하고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며 토라진 것과 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만약 신의 관점에서 볼 때 잔인함이 ‘선’이라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선’ 일지 모른다. 그런 것들조차 참이라면, 그다음에는 무슨 결과가 오는가? 신의 선 개념이 이토록 우리와 다른 것이라면, 그가 말하는 천국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일 것이요 그 반대로 신의 지옥은 우리의 천국이 될 것이다.


 중심을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에서 우리는 결국 벗어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가야 하고 또 살아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는 슬픔과 고통이란 묘사가 가능한 어떤 ’ 상태‘가 아니라 ’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과정을 쓰려면 방대한 역사서가 될 것이고, ’이제 그만 써야지‘라고 굳이 결심하지 않는 한 죽는 순간까지 쓸 수 있는 과정일 거라고.

 사람들은 ‘이제 다 회복되었니?‘, ’이제 좀 괜찮니?‘라고 물어볼 것이다. 그의 기가 막힌 비유가 있다.


상처로부터 그렇게 빨리 회복하고 있느냐고? 그러나 그 질문은 애매하다. 맹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한 후 회복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다리를 절단한 후 회복하고 있느냐는 질문은 사뭇 다른 의미이다.

현재 나는 목발 짚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마도 곧 의족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두 다리로 서게 될 수는 없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상처가 아니다. 다리 한쪽을 잃은 것이다. 의족을 하고 걸어다닐 수야 있게 되겠지마는 그때까지 많은 재활이 필요할 것이고, 온전한 회복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남아있는 신경 탓에 다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긁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고통을 평생 느껴야 할 것이다. 아!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너무 와닿는 비유라서 밑줄을 쫙쫙 그었다.


나는 밧줄이 나를 지탱해 줄지 어떨지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그 밧줄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자, 믿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진짜 극한 고통 가운데 왔을 때, 우리는 진짜 내가 ‘믿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게 된다. 믿고 있지 않았었구나.


그러나 우리가 맞대면하고 있는 이가 온전히 선한 의도를 가진 외과의사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가 다정하고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썩은 살을 잘라낼 것이다. 그가 우리의 애걸복걸에 꺾이고 만다면,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둬 버린다면, 그때까지 겪은 고통은 아무 소용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고자 고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믿을수록, 자비를 구하는 일이 아무 소용없음을 더욱더 믿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과, 우리가 구하는 자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상처를 도려내는 고통을 나는 더 이상 겪을 수 없다고 울부짖으면서 ‘제발 그만하세요!’라고 하겠지. 그만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고 자비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의사는, 환자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가 아무리 엄살을 부리고 애걸복걸해도 치료해야 한다. 완전하게.

 

 우리는 살아있고, 단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저 말씀을 믿거나, 상상할 뿐이다. 말씀에도 다 나와있지 않은 상상의 영역이 있다. 그는 그 상상의 영역에서 마음껏 상상한다. 그것이 신선했다.

 신앙이 있다, 교회를 다닌다 하면 이상하게도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그 무엇. 죽음에 대한 두려움, 천국에 대한 상상,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생각. 좀 상상한다고 해서, 좀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나쁠 것 없지 않은가. 맹목적으로 믿는다고 믿음인가 어디. 진짜 내가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드러나겠지. 내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진짜 믿고 있었는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별은 모두에게 예정된 것이지만, 언제 올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두렵고, 또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두려우면 두렵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믿어지는 만큼 믿고, 모르는 것은 묻고, 기도하면서 또 상상해보기도 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를 통해 나의 ‘이상함’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알고 위로를 받았다고나 할까.

 

 아주 짧은 책이었다. 번역은 역시나... 잘 안 읽히는 문장들이 꽤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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