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우리는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by 미셸 오

내게 배정된 여고는 시내 중심가를 지나 산중턱의 빽빽한 건물 사이에 비좁게 들어차 있었다.


갑갑한 것을 싫어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던 나는 집 마당 같은 운동장에 비좁은 교실은 첫인상부터 숨이 턱 막혔고 그 갑갑한 환경은 내가 앞으로 공부할 공간으로서 아주 적합하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불길한 징조였다.


입학식날부터 우린 중학교 운동장에서 "이 학교가 싫은 학생은 오지 않아도 된다' 라는 강력한 한 방을 먹었다. 소위 명문여고라고 하는 자부심을 열어 보여주는 것 같은 교장의 말투였다.

그러나 자칭 명문여고 답지 않게 학교의 기본적인 서비스는 엉망이었다. 넓은 운동장이 없는 학교. 화장실이 없는 학교. 신발을 벗고 다녀야 했던 타일바닥의 교실과 복도. 진짜 성의없이 팔던 매점의 라면등등...

중학교 운동장을 빌려쓰는 것은 그렇다 쳐도 중학교 화장실을 같이 써야 하는 것은 사실 내게 참혹하고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ㄱ자로 이어진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 중간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50분 수업을 마치고 급해서 뛰어간 화장실 입구에는 45분 수업을 마친 여중생들의 줄이 이어져 있어 발을 동동거릴 때가 많았고 볼 일을 보기도 전에 종이 울리기가 다반사. 특히 생리 중 일 때는 최악이었다. 게다가 수세식 구식 변기였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배설물이 가득하고 화장실은 발을 디디지 못할만큼 끔찍하게 더러웠다. 아무도 화장실을 청소하지도 않았고 관리를 안 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사립이었던 여고가 왜 그렇게 위생불량으로 여학생들의 편의를 무시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통제와 압박.

우린 학교에서 군대식 훈련(교련)을 종종 받았으며 한달에 한 번 전교생 전체가 군대식으로 점검을 받았다. 무척 긴장되던 시간들이었다. 반의 반장은 소대장이 되었고 복도에서는 반장들의 반 인원점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른바 군대였다. 선생님들은 무서운 눈길과 엄격한 말투로 경직되어 앉아 있는 아이들의 책상옆을 오가며 예리하게 아이들의 필수품을 검사했다. 교사와 학생은 그처럼 상하관계로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학생들의 의견보다는 규칙과 통제가 우위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일부로 취급받았다.


한편으로는 우리 여학교는 복장이며 태도 말투가 여성적이어야 했다. 여학생이라면 당연히 속치마를 입어야 하고 거울과 빗. 반짇고리. 손수건은 필수였기에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집단으로 검사를 받았다. 하나라도 빠지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예쁘고 단정해 뵈던 교복이 실제로는 너무 불편했다. 그 교복은 단체로 있을 때는 검정색과 흰색의 카라가 깨끗하고도 정렬된 느낌을 주긴 했다.

그러나 동복의 검고 두꺼운 플레어 치마는 질질 끄는 것처럼 무거웠고 허리가 잘록한 상의는 늘 숨을 참아야만 예쁜 곡선이 드러났다. 하얗고 빳빳한 교복 깃은 때를 잘 타서 매일 갈아주고 또 실로 고정시켜야 했는데 그것이 목선을 긁어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이는 모두 학생들의 감정과 편의보다 이미지 관리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것의 불편함에 대해 학교에 건의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우린 학교에서 교과서보다 더 강하게 침묵과 순응을 암묵적으로 배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통학하던 시간들..

도시락 두 개가 든 보조가방에 영어사전과 책들이 가득한 남청색 가방을 들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등교한다. 교실의 책상은 오는 순서대로 앉기로 되어 있다. 뒷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으면 손해다. 그래서 해뜨기 전에 집을 나선다. 학교에 도착해 앞자리를 확보한 후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고 자습을 하고, 수업을 다 마치면 오후 다섯 시가 되고, 또 매점에서 맛없는 저녁을 먹고, 밤 열 시까지 자습을 하였다.

내게 이런 학교의 수업방식은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 종일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불평없이 수업하고 먹고 자고 놀았다.

매일 자습에 장거리 통학에 지친 아이들 대부분은 수업들은 것을 다시 복습할 시간도 없이 주초 고사라는 틀에 갇혀 일요일에도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매일 쏟아놓는 지식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새로운 학습내용들이 켜켜이 쌓여갔다. 정리 정돈할 시간이 없어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반복되자 몸의 피로까지 겹쳐 몽롱했다.


아이들은 매일 성적으로, 참고서값으로 고민하고 좌절했다. 왜 그때 선생님들은 교과서는 두고 참고서로 수업을 했는지.... 그 참고서도 진도의 절반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선생님들로 말하자면 대부분 나이가 많아 능글맞게 보였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올백을 한 선생님의 몸에서는 독한 향수 냄새가 났는데 수업 방식은 정치인의 연설문을 듣는 것 같았다. 첫 수업 때 자신의 명문 대학원의 학벌을 칠판 구석에 필기체로 갈겨쓰며 목에 힘을 주던 선생님의 수업시간에는 학생들 대부분이 책상에 엎드려 잤다. 그런 학생들을 그는 "여기도 무덤~ 저기도 무덤이네~"라고 비웃었다.

매번 수학 점수를 크게 불러주어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킥킥대며 즐기고.. 거침없는 농담으로 수업보다는 아이들을 웃기는 데 맛을 들인 사람들.

오로지 성적 그것만이 학생들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었던 선생님들도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이도 많고 학생들에게도 엄격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소수의 우수한 성적을 가진 아이들만이 인격적인 존재였다

'아.. 저런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절대 선생 같은 건 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게 된 것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다행히도 단 몇 분의 괜찮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과학 성적을 올려준 선생님.

과학이 이렇게 쉽고 재미있는 거였나 하는 충격을 안겨준 그 선생님은 지금 잘 살고 계실까.

그런 환경에서도

아이들이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수다와 군것질 덕분이었다. 한 달 용돈이 모자랄 정도로 칼국수집, 군 만둣집, 제과점, 순대와 떡볶이 등등 음식점을 들락거렸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 감옥 같던 고등학교 시절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싶다.


어쩌면 나의 여고시절은 그래서...반짝거리는 추억보다는 버티는 시간들로 꽉 채워져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각자의 모양대도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