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민음사, 2009
미국의 경제학자 도스타인 베블런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명품이나 사치품 구매를 통해 가난한 이들과의 구별짓기를 한다는 것이죠. 실상 소비만을 통해서는 아닐겁니다. 당장 우리사회만 해도 출신지역과 대학, 성별 등 갖은 조건과 이유를 붙여 서로를 구별짓기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19세기 말 미국사회 모습을 냉소적으로 비판한 베블런의 관점에서 21세기의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지요.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내부의 소수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전략입니다. 마치 1차대전 후 독일인들이 나치의 아래 통합되는 한 편, 유대인을 사회내 악질적 소수로 구분짓고 증오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같은 사회 안에서 살아왔던 사람조차 이토록 쉽게 타자화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질적인 사회에서 온 사람들은 어떨까요? 이주노동자나 새터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시면 쉽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문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통일부에서 시내버스에 공익광고를 싣기 시작했더군요. '저는 양강도에서 온 XXX입니다'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탈북하여 대한민국에 들어온 사람은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스스로 유령이 돼버린 그들의 선택은 우리가 친 심리적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증명하는 반증이지 않을까요.
오늘 소개할 소설 『국가의 사생활』은 서로를 통일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남과 북의 화학적 결합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그린 작품입니다. 무대는 2011년 급작스런 통일로 남과 북이 물리적으로 결합된 대한민국입의 서울입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중심인물들은 2등시민 대우를 받으며 폭력조직이나 화류계에 종사합니다.
이야기의 내러티브는 단순한 편이고 반전의 묘미도 약하지만, 이북 출신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탁월한 게 이 작품의 미덕입니다. 그들의 소외감과 상실감, 분노와 좌절을 섬세하게 그린 이응준 작가의 노력이 엿보입니다. 통일이 됐지만 이방인 취급을 받는 이북 출신들은 이남 사람들을 비추는 가장 냉정한 거울과 같습니다.
장애 아동들을 위한 복지시설이 제 집 근처에 들어서는 기미만 보여도 즉각 연판장을 돌리고 데모를 해 대는 것이 남한의 민주 시민들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통일 이전에도 좀 낙후된 구역의 어린이 놀이터는 아이들이 주인이 아니라 좌절한 어른들이 대낮부터 음주를 일삼고 세상을 저주하는 공간이었다. 다만 그 어른들의 면면과 취향이 다소 바뀐 것뿐인데 이남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난 자화상에 언제나 그랬듯 오리발을 내밀고는 역겨운 엄살들을 떨었다.
-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민음사, 2009, 154p.
우리는 이 냉소적인 시선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차별과 구별짓기도 모자라 혐오범죄가 창궐하는 한국사회에서 관용은 찾아보기 어려운지 오래됐지요.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는 욕망을 타인을 혐오하고 차별함으로써 충족하려는 비열함의 민낯은 그 뻔뻔함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동포 2500만명쯤이 반半난민이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혼란과 비극이 벌어질 겁니다. 그런데 실실 웃으면서 "통일은 대박"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사실 제 주변에 새터민 출신 인물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가끔 보게되는 사람인데, 부던히 이북 출신임을 감추려 하더군요. 억센 이북 억양에 서울식 표준어 어휘와 발음을 섞어놓은 기묘한 그의 말투가 외려 그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하는 자신의 출신을 웅변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나중에는 주변에서 아주 인증을 해주더군요. 자신의 뿌리를 왜 숨기려 하는가. 굳이 숨기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단 말인가? 제 나름의 답을 유추해 보려하니 어느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자녀를 둔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같은 반에 다문화가정 아이가 있는데 외모적 특징이 분명히 구별돼서 아이들이 따돌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자녀를 엄히 꾸짖고 그런 행동을 고쳐주려 한다고 말했습니만, 제 친구같은 부모만 있었다면 따돌림은 없었어야 했겠지요. 따돌림 당한 아이는 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의 외모적 특징을 가리려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이북 출신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그것이 차별과 구별짓기의 이유임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국가의 사생활』에서는 이북 출신인 중심인물들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을 비교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이응준 작가 역시 『우리의 소원은 전쟁』의 장강명 작가와 마찬가지로 많은 자료수집과 취재를 통해 소설을 썼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기억을 그린 장면들은 꽤나 사실적입니다. 인간 본연의 욕망이나 본성에 따른 공통점을 찾아볼 수도 있었고, 반대로 체제와 권력의 영향으로 전혀 다른 쪽으로 갈린 부분도 많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로 갈려져 산지 오래돼서 꽤나 멀리 와있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과 시간이 훨씬 큰 것이지요. 독자님께서 한 50년쯤 연락도 없이 따로 살았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어떤 느낌이 드시겠습니까? 눈물이 나고 가슴이 설렐까요. 글쎄요. 낯설고 불편해서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일 겁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즉흥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겁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며 정치적 구호로만 쓸 것이 아니라면, 혹은 북한붕괴론의 환상에 빠져 대책없는 낙관주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지요. 우리가 북한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고, 영향력도 크지 않습니다. 우리 내부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이라 의지도 확고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동북아의 대북문제 외교에서 미국, 중국, 일본에 철저히 휘둘리고 우리 외교는 실종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통일대박론 같은 헛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주변국이 보기에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런지요.
나랏일 잘 해보시라고 뽑아서 좋은 집에 좋은 의사 붙여다가 살게하고 제일 큰 권한 줬더니, 내내 미용시술 받고 머리나 하면서 놀고, 권한은 천하의 잡범들이 호가호위 했다는 게 지난 4년여의 이 나라꼴이었습니다. 반성하고 그 책임을 지지는 못할망정 여적 정신을 못차리고 몽니를 부리니까 국민들이 나서서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구요. 이 대책없는 사람들을 거는 기대나 믿을 여지는 개미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통일이라던지 민족화해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구요. 이게 무슨 로또복권입니까 대박이 나게. 국민들을 믿는게 낫지요. 국민 개개인이 할 수 있는게 뭘까 생각해보게 된 이유입니다.
지원금 같이 돈 드는 거나 특혜처럼 배아픈 거는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테니 아마 하기 어려울 겁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그 '차별의 색안경'을 한 번 벗어보시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 정도일 겁니다. 수만 명의 새터민은 통일의 화학적 결합이 가능할지 여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작은 실험과도 같습니다. 이 현실 실험의 성패는 우리가 새터민을 주변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이웃으로 보고 넘길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돈드는 것도 아니고 배아플 일도 없습니다. 그저 마음만 조금 달리 먹으면 되니까요. 그래도 초기정착지원금 같은 얘기 하면서 물고 늘어진다면 할 말 없습니다만.
차별과 배척이 심해지면 불만과 증오가 쌓여가고 머지 않아 평화가 깨어지고 그 시스템이 붕괴되는 일은 역사에서 흔히 벌어졌습니다. 유라시아대륙을 휩쓸었던 몽골인들의 원元나라가 철저한 신분제(1. 몽고인 ☞ 2. 색목인 ☞ 3. 화북인 ☞ 4. 남송인 순)를 실시하고도 겨우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중원에서 쫓겨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같은 이민족 왕조인 청淸나라가 중원을 300년이나 통치한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났는지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좀 더 큰 안목에서 세계시민적 관점을 갖춘다면 막연한 피해의식에서 발생하는 색안경을 벗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시민 개인은 그런 안목과 아량을 갖췄다고 믿습니다. 주말마다 광화문과 전국 각지에 모인 그 많은 시민들의 수준과 교양을 보았으니 말입니다. 시민들이 차별의 색안경을 벗고 새터민과의 화학적 결합이라는 이 현실실험을 성공으로 이끌어 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통일과 민족화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철저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 시민들에게는 그런 역량이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