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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고 Aug 30. 2019

이 시대의 파르마코스 (김애란 [칼자국] 읽기)

김애란의 「칼자국」에 그려진 어머니에 초점을 맞춰

소설가 김애란은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였고 2003년 같은 작품으로 『착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2005년, 단편 「달려라, 아비」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을 포함한 아홉 작품이 같은 해 소설집 『달려라, 아비』로 출간되었다. 2007년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를 출간하였으며,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 단편 「칼자국」으로 2008년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애란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많은 작품들에서 다루고 있는 ‘아버지’의 형상이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대부분 무능한 존재들인데, 이들의 무능은 기존의 소설들처럼 산업화의 거친 물살에 휩쓸림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능하기보다 차라리 성격적으로 싱거운 존재들이다. 작중의 ‘다음 세대’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부채의식을 가지기보다는 자신들이 아버지를 버렸다고 자부한다. 이렇듯 김애란은 새롭지 않은 사소한 소재들에서 사소하지 않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감수성과 함께, 화려한 수식어나 관념적 묘사를 배제하고 짧은 호흡을 구사하는 문장으로 인해 평자와 독자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김애란의 많은 작품 중에서 ‘아버지의 형상’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어머니’를 발견해보고자 한다. 특히 2008년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한,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억척스럽게 살아온 어머니를 그린 단편 「칼자국」을 텍스트로 선정하여, 그 안에 나타난 어머니의 파르마코스적인 모습과 그것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지는 아이러니, 비애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칼자국」을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화자의 어머니는 화자가 6살 때 ‘맛나당’이라는 가게를 차려 20여 년간 국수를 팔았다.

어머니가 25년 째 꾸준히 사용하고 있는 칼은 신접살림을 준비할 때 마련한 ‘특수 스댕’ 재질의 1,500원짜리 칼이다.

어머니는 처녀 때 인기가 좋았으나 순하고 내성적인 아버지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외도를 할 때에도 아버지를 위해 밥을 했다.

어머니는 ‘맛나당’ 부엌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화자는 장례식에서 며칠간 입맛이 없었다가 ‘맛나당’에서 어머니의 칼을 보자 참을 수 없는 식욕이 밀려왔다.


보다시피, 내용은 매우 뻔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권영민의 해석처럼 ‘김애란은 새롭지 않은 사소한 소재들에서 사소하지 않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칼자국」 속 어머니는 완전히 파르마코스적인 인물이다. 파르마코스란, 고대 그리스어로 속죄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염병이나 기근, 외세 침입, 내부 불안 등과 같은 재앙이 덮쳤을 때, 재앙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 자체의 경비로 인간 제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파르마코스라고 칭했다. 집단의 질서와 일체감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고안된 문학적 장치인 파르마코스, 속죄양은 집단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러나 속죄양에게 ‘성스러운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순간 그를 향한 폭력은 ‘이로운’ 폭력으로 둔갑하여 ‘해로운’ 폭력과는 또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속죄양의 성스러움은 바로 ‘이로운’ 폭력의 폭력성을 감추는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칼자국」에 나타난 ‘성스러움’, ‘성스러운 순교자’라는 이미지는 바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부여된다. 작품 속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란 집단 내의 구성원들의 폭력을 한 몸에 받으며 희생하며, 희생당한다. 그리고 그들의 폭력은 또 다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폭력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엄연히 한 개인에 대한 폭력, 한 여성에 대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라는 단어 하나를 통해 별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린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그들의 폭력과 그로인한 어머니의 희생은 소설 맨 첫 구절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울지도, 화장하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단지 칼을 든 여자가 되었다. ‘칼을 쥔 여자’라고 적혀있지만 사실 ‘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여자’의 ‘여성성’은 박탈당한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 단지 ‘칼’을 든 ‘어머니’가 된 것이다.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는데, 작품 내에서 ‘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머니의 칼은 그녀의 희생 그 자체를 의미하며, 칼을 이용해 25년간 그녀가 희생해온 것은 바로 ‘밥’이다. 그녀는 ‘밥’이라는 질서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파르마코스이다. 여기서 말하는 ‘밥’은 단지 쌀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밥은 생명의 근원이며 자식이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가정을 유지하는 하나의 질서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바로 그러한 ‘밥’을 책임지도록 요구받는다. 실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외도를 하고 있을 때에도 밥을 짓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람난 아버지를 위해 갈치를 굽고 가지를 무치고, 붕어를 무치며 그것도 모두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식사를 준비했다. 어머니는 눈물과 화장과 순종과 ‘여성성’을 모두 버린 채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수십 년간 감당해”왔다.


또한 칼은 자식을 지켜내는 어머니만의 도구이며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다. 화자는 칼에 대한 두 가지 인상 깊은 기억이 있는데, 하나는 여덟 살 때 어머니에게 모진 말을 뱉은 후 죽으려는 심산으로 집 밖에 나가 무시무시한 개를 만나 소리를 질렀을 때, 어머니가 허겁지겁 들고 나왔었던 바로 그 ‘칼’이다. 어머니의 칼은 그녀의 희생이자 자식을 위해 밥을 짓는 도구, 혹은 그 자체로써 자식을 지켜내는 어머니만의 도구인 것이다. 둘째는 화자가 자취를 시작 할 때 대형마트에서 기가 죽어 있다가 “내가 칼 볼 줄 안다.”며 골라준 ‘독일제 칼’이다. 자신은 25년간 1,500원짜리 ‘특수 스댕’재질의 칼을 사용했지만 딸에게는 ‘독일제 칼’을 골라준다는 점에서, 딸이 자신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식을 위한 어미의 마음이 선하게 그려지는 듯하다.


우리는 이 전형적인 희생물을 파르마코스, 즉 산 제물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파르마코스는 죄가 있는 것도, 죄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고함소리로 산사태를 가져온 등산가처럼,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비해서 그에게 닥친 불행이 그 결과로서는 훨씬 심각하다는 의미에서 그는 죄가 없다. 그러나 그가 죄에 물들어 있는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죄를 짓는 행위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에서 그도 죄가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 양식에 알맞게 이 두 사실은 부합하지 않고, 서로 분리된 채 있다.


어머니가 파르마코스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저지른 행위는 단지 “순하고 내성적인 남자”에 약해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것, 아버지의 “인생 원래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다.”라는 말이 멋있어서 미더워했던 것, 자식을 낳아 어머니가 된 것일 뿐이다. 그녀의 행위는 죄가 아니다. 마치 신접살림을 위한 칼을 고를 때 “무쇠 칼은 무거운 데다 녹이 잘 슬고 스테인리스 칼은 너무 무른데, 이 칼은 적당하니 딱 좋다”며 둥글고 두툼한 소나무로 자루가 만들어진 칼을 고른 것처럼, 나름대로 자기방식대로의 고민을 거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닥치는 예외적인 사건은 그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어떠한 인과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비극적 형식의 아이러니의 중심원리’인 것처럼, 어머니의 외모, 성격, 능력 그 어떤 것에도 이유를 두지 않고 순하고 내성적인 남자였던 아버지는 외도를 일삼는 남자로 변했고, 아버지가 말한 “밑바닥”은 어머니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것에 자신의 여성적인 면모를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혹은 주인공이 “어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어미’를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됐다.”고 말한 것처럼, 어머니는 여성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어떤 욕망이나 감정을 버린 채 본능만 남은 동물처럼 살아가야했는지도 모른다.


프라이의 말마따나 고함소리로 산사태를 가져온 등산가처럼, 그녀는 죄가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래야 한다’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여자의 일생에서 불가피한 일이라는 점에서 어머니는 여자, 어머니인 것만으로 죄가 된다. 프라이가 파르마코스는 욥이 처한 상황과 똑같은 상황 하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가정을 위한 희생에 대해 개인으로서의 여성인 어머니는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으며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된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자기변호에 성공하게 되면, 그 파국은 도덕적으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어머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어머니는 꼭 그래야 하는 것인가 어머니도 여성으로서의 개인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프라이에 따르면 아이러니는 인생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포착하며 작자는 도덕을 입에 담지 않고 이야기를 꾸며대며, 자기가 설정한 주제를 말하는 것 이외의 어떤 목적도 갖고 있지 않는다. 「칼자국」의 화자 또한 이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해답을 내리려하지 않는 듯하다. 이를 보면 「칼자국」은 세련된 아이러니이다. 세련된 아이러니 작가는 자신은 단순히 서술만 할 뿐,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아이러니를 첨가시킬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데 있는데, 작품 속 화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어머니를 서술하고 있을 뿐 어떠한 특정한 감정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이렇듯 독자들에게 스스로 개입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비애(pathos) 또한 발생한다.


비애는 선정적인 눈물의 반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애는 주인공이 어떤 약점으로 인해 고립된 존재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이 약점은 우리 자신도 주인공과 똑같은 약점을 갖고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칼자국」은 딸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술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그 내용은 매우 흔하기 때문에 작품을 읽는 누구라도 딸로서의 자기 자신, 혹은 어머니로서의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 세상에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작품 속 인물과 똑같은 약점을 갖고 있음 깨닫기 때문에 호소력 짙은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작품 속 그들의 약점은 여러 가지가 등장하는데, ‘가난’, ‘어머니’, ‘딸’, ‘여자’가 바로 그것이다. 어머니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가족이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칼을 갈며 일을 했고, ‘여자’이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단 하루라도 남편과 자식의 배 곯리는 일이 없었다. 또한 화자는 ‘딸’이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였으며 작품 내 등장하는 어머니 또한 어렸을 때 자신의 어머니께 비슷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희생하며, 희생당한다. 그리고 그녀의 말 없는 혹은 말할 수조차 없는 희생은 어머니를 둔 독자에게 혹은 이미 어머니인 독자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프라이에 따르면, 비애는 희생자의 표현력 부족으로 인해서 더 커진다. 또한 비애는 이상야릇한 참혹한 감정으로서, 무언가의 표현의 실패(그 표현이 진실한 것이든, 가식적인 것이든 간에)가 특징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칼자국」에서도 어머니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딸의 눈과 입을 빌어 그녀를 기술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희생자인 어머니의 표현력 부족, 어머니의 진솔한 표현의 실패를 달성하게 된다. 따라서 텍스트 속 주인공 아닌 주인공인 어머니의 비애는 2인칭 시점 서술 방식으로 인해 더욱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아이고, 야, 그 여자 완전 할매더라, 할매.”
그러더니 이내 시무룩해졌다. 만나도 왜 그런 여자를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그사이, 어머니는 반죽을 개고, 배추를 절이고, 바지락을 까고, 썩은 콩을 골라냈다.


남편이 외도하는 사실을 알고, 그 상대 여자를 확인하고 왔을 때의 어머니의 감정 묘사는 화자의 눈을 빌어 본 ‘시무룩’밖에 없다. 그러나 화자의 눈에 포착되지 못한 어머니의 가슴 깊은 곳의 진심이 담긴 문장은, 그녀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기에 더 슬프게 다가오게 된다.


그렇다면 결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화자는 결말에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식 내내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가 “어둠 속에서 조용하게 번뜩이는, 닳고 닳아 종이처럼 얇아졌지만, 여전히 신랄하고 우아한 빛을 품은” 어머니의 칼을 보자마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식욕”이 밀려온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필자는 감히 화자가 곧 파르마코스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짐작해본다. 앞서 어머니가 화자에게 ‘독일제 칼’을 골라줄 때, 딸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어머니로서의 따뜻한 마음이 선하게 그려진다고 말한 바 있지만, 굳이 ‘칼’을 물려준다는, 골라준다는 점에서 여자인 화자가 다시 결혼을 하고 어머니가 되면 또 다른 파르마코스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임신 중이라는 점과 다시 칼을 보고 식욕이 돋아 칼을 잡게 된다는 점에서, 화자는 곧 다시 가정 내에서 ‘밥’을 책임질 사람, 자식의 성장을 책임지고 남편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식사를 내 줄 사람이 될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칼자국이 난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자라 내장 곳곳에 새겨진 화자의 몸속 칼자국은 평생이 지나도 아물지 않을 것이다. 대신 또 다시 자신의 자식의 내장에 칼자국을 새기며 어머니가 아닌 어미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이다.


화자의 이 말은 마치 역설적이게 들린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이자 여자이자 칼이자 좋은 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지막의 “어머니는 좋은 말이다” 에서 ‘어머니’는 등장인물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라는 단어 자체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좋은” 말이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머니’는 좋은 말이 아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말로 인해 좋은 어미로, 좋은 칼로밖에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마지막까지도 아이러니를 남겨두고 있다. 어머니, 그것은 참으로 좋은 말이다. 화자의 말마따나 “아픈”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나쁜 말이다. 어머니란 단어는 우리네들의 어머니를 구속하고 규정해버리며 희생하게끔 요구한다. 차라리 필자는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를 “어머니도 좋은 여자다.”라고 수정하고 싶다.



* 본 글은 약 2015년도 대학생 시절 작성한 글로, 지금은 '여성성'에 대한 섣부른 정의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에 공감하며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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