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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고 Nov 16. 2019

순이 : 첫번째 이야기

세상 가장 애증 하는 그녀를 기억하며


사주에 불이 많아 주변 모든 것이 활활-타버리고 재만 남는다는 순이는 정말 그 말처럼 눈 뜨고 보니 남의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낳은 사람이 있으니 태어났겠지만서도 아무리 기억해도 그 사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고, 대신 기억해줄 이도 없었던 것이다.


외로움이 외로움 인지도, 슬픔이 슬픔 인지도 못 배우고 자랐던 순이는 그렇게 한 장님 시인의 병수발을 들며, 교도소의 몇백 끼를 책임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학교란 것이 무언지도 모른 채 헤진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물을 길어오고, 시인의 똥기저귀를 빨고, 앞마당을 쓸면서 자신이 몇 살 인지도 뉘우치지 못한 채 그저 일만 했다고 한다.


아니, 그저 일만 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랑도 교육도 못 받고 자랐던 순이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도 몰랐지만 본인에게 좋고 나쁨의 의사표현은 분명했던지라 매일매일 매타작이나 받았다고 한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밖에 내쫓기고, 뺨을 맞아가면서도 절대 순종이란 것은 없어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느는 것은 깡다구와 잔병이었다.


도대체가 수 세는 법을 몰라 장님 시인의 자식과 자신 중 누가 언니 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또래에 예쁜 옷을 입고 네모진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것이 그리도 탐이나 몰래 옷을 입어보기도 책을 훔쳐보기도 했더랬다. 당연히 글을 몰라 그저 까만 것이 글자요 하얀 것이 종이구나였지만 그렇게라도 훔쳐서 글자 그림이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순이였다. 그래도 주인집 딸년이라고 훔친 사실들은 금방 탄로가 나서 또다시 맞고, 옷이 벗겨진 채로 집에서 쫓겨나고, 그렇게 밤새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오로지, 계절이 바뀌면서 늘지 않는 것은 눈물이었다. 온몸에 더해지는 멍만큼 잔병치레가 심해져도, 아파서 삼십 분이라도 늦게 일어날라치면 주인 것들이 당장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더 때려도, 설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순이는 눈물보다는 그저 화가 날 뿐이었다.


악과 화만 늘어가던 짧디 짧은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찾아왔으니, 그건 바로 월경이었다. 그렇게 맞고 피도 자주 흘렸던 순이였지만 거기서 피가 철철 난 적은 처음인지라 그때 처음으로 아- 나 죽는구나-하고 눈물이 핑 돌았더랬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아침밥을 지어야 하는 년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집안에서 순이를 찾는 고성이 들렸지만, 그날만큼은 바락바락 대꾸할 힘도 없어 누가 볼까 그저 자리에 쭈그려 누워있었다. 그때 순이를 찾아온 장님 시인은 대체 어떤 눈으로 봤던 것인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순이의 '죽을병'을 알아차리곤 그저 미소를 지으며 너도 이제 어른이 됐구나 했다고 한다. 천기저귀 차는 법을 배우고, 옷가지에 묻은 피를 찬물에 벅벅 빨아내고 나서야, 순이는 나 안 죽는구나, 하고 기분이 나아질 수 있었다.


어른이 된 순이는 흘리는 피만큼 예민함도 늘어 교도소 아저씨들의 눈빛과 손길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순이는 그곳에서 교도소 밥 해주는 일손을 돕고 있었다) 원래 그랬던 것인데 이제야 기분이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들 순이가 어른이 된 줄 알고 그래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의지할 곳은 장님 시인 한 분이라 한 번은 아저씨들이 나 자꾸 만져서 싫어요 말했지만, 시인은 다 순이 네가 예뻐서 그러지 라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내가 예뻐서 그런가 하고 넘기려 해도 그 손은 더럽게만 느껴져서 순이는 탁-탁- 쳐내며 특유의 악바리로 쏘아버리곤 했다.


말은 안 들어도 귀여웠던 년이 점점 날카로워지니 그게 거슬렸던 걸까, 순이는 결국 어느 날 밤 한 아저씨에게 더럽혀지고 말았다. 그보다 더 어렸던 시절부터 맞고만 살아와 남은 건 반항심과 깡다구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것의 힘은 이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순이는 그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난생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평생을 일하고 맞고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눈뜨고 어른이 되기까지 먹고 자란 곳이라 순이는 발을 떼기가 어려웠지만,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이는 그곳에서 도망쳤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순이의 붉은 피를 알아차렸던 시인은 아마 도망치는 그날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순이는 더욱더 그 시인이 아직까지도, 너무나도 밉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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