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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고 Aug 20. 2020

댄디의 과묵한 응시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발견한 댄디의 새로운 가능성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는 제7회 ‘젊은 작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심사 경위에 따르면, “소설집 한 권을 냈을 뿐인 김금희의 최근 단편들이 보여주고 있는 깊이와 활력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어서”, “대상을 선정하는 일만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양경언의 해설처럼 “이 소설을 필용과 양희가 십육 년에 걸쳐 만나고 헤어진 이야기라는 축약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딘가 미진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필자는 「너무 한낮의 연애」와 댄디즘을 엮어 그러한 미진한 구석을 풍성하게 채워보고자 한다.


댄디즘(댄디)은 시대와 여러 국가를 거치며 조금씩 변화해왔다. 결론적으로 댄디즘은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만나 ‘일상생활의 심미화’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사회 문화적 조류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필자는 「너무 한낮의 연애」 속 주요 인물인 ‘필용’과 ‘양희’ 양쪽에서 댄디, 댄디적 삶의 방식을 발견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둘은 조금은 달라서, ‘필용’이 1990년대에 출발한 댄디의 2010년대 결과물이라면 ‘양희’는 21세기 댄디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남진우는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댄디즘과 1990년대 소설」에서 1990년대 댄디 문학의 특징으로 ‘쾌락적인 예술가형 주인공’, ‘여유와 자유, 방임에 대해 초연’, ‘물질적 성공에 대해 냉담’, ‘값비싼 현대적 기기’, ‘서양식 상표 선호’ 등을 언급한다. 그리고 필용과 양희가 하필이면 미국 유학을 준비하기 위한 종로 ‘어학원’에서 만났다는 점, 언제나 서양식 ‘맥도널드’를 다녔고 ‘피시버거’를 먹었다는 점 등은 일반적인 댄디 문학의 특징에 부합한다. 그리고 필용이 언제나 서양식, 퀸의 노래로 마음을 달래는 것과 1955년대를 떠올리며 “그 1950년대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메릴린 먼로와 청바지의 시대였다. 스푸트니크 1호와 반핵과 누벨바그의 시대였다.”라고, 서양식으로 표현하는 것 또한 남진우가 파악한 1990년대 댄디 문학의 특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필용은 앞서 말했다시피 1990년대에 출발한 댄디의 2010년대 결과물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댄디는 보들레르의 댄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필용의 댄디는 “자본주의 체제가 선전하는 ‘멋있고 자유로운 삶’에 이르는 하나의 통로”로서의 댄디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필용은 ‘소비자본주의사회의 넘치는 상품과 현란한 이미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익명의 단자에 불과’한 댄디이다. 이는 마치 과거에 있었던, 환상을 심어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 기회의 장소인 미국 땅을 밟았지만 결국 ‘드림’은 이뤄지지 못한 채 기계의 한 부품이 되어버린 다양한 인종·민족·국가의 수많은 사람들과도 같다. 자본주의의 넘쳐나는 상품광고를 통해 남들과 다르게 개성화와 차별화를 이루려 자신을 꾸미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 우리는 ‘익명의 단자’가 되어버렸다.


댄디의 아이러니에 대한 조은라의 한 논문에 따르면, 댄디는 ‘가면’을 특징으로 한다.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온갖 감정을 드러내는 인간적인 모습을 가려줄 가면이 필요했던 이유이다.
댄디에게 있어 외모는 그 사람 전체를 상징한다. 거의 의식과도 같은 치장, 예술이나 철학에 이르는 자기 숭배야 말로 댄디가 되기 위한 첫 번째 ‘필수조건’이다. 반면 댄디의 가시적 특징을 풍성히 하는 정신의 배양, 즉 또 다른 형태의 우월감은 댄디를 완성시키는 ‘충분조건’이다.
 자기를 통제하기 위해 애쓰고, 모든 것에 ‘지겨운’ 태도를 취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타인이 예측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댄디를 댄디로 꾸며주는 장치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댄디의 말과 행동, 표현은 댄디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된 해석, 즉 ‘가면’이다.


그리고 댄디의 치장이란 필수조건과 가면이란 충분조건은 오늘날의 현대인의 특징으로 직결된다. 필용은 식사 시간을 줄여서라도 “이사를 하느라 엉망이 된 손을 닦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시설관리팀으로 인사이동이 되기 전까지 필용은 “하루가 멀다 하고 회식과 숱한 만남들을 계획”했으며, 언제나 ‘양 입가를 팽팽하게 견인하고 있는 긴장’이란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그 ‘가면’은 “언제라도 무슨 존칭, 무슨 웃음, 무슨 헛기침, 무슨 지시, 무슨 권유, 무슨 답변 등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보들레르는 크게 노하여 댄디와 일종의 ‘예의’는 다른 것이라고 성을 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댄디의 자기 통제를 위한 정신의 배양, 가면은 오늘날에 와서는 현대인의 ‘가식’이 되어버렸다. 댄디의 필수조건인 치장 또한, 과거에는 남들과 다르게 개성화와 차별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치장이었다면, 이는 오늘날에 와서는 ‘보편화’를 보여주기 위한 치장이 되어버렸다. 현대인들은 스스로가 자신이 개성적이며 차별화됐다고 생각할지언정 사실은 남에게 무시 받지 않을 만큼, 내가 적당히 평범하게 살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즉 개성과 차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유행을 따르며 나도 이렇게 일반인들과 같이 보편적이고, 평범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여준다’. 앞서 말한, 필용이 옷매무세를 가다듬는 것도, 자신의 초라함을 지우고 범상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절대 자신의 개성을 돋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명함’도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다. 필용은 인사이동을 통보 받자마자 ‘명함’부터 생각이 난다. 명함은 그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범상한 물건이지만, 나만의 무언가를 알릴 수 있는 특별한 물건이기도 하다. 범상하지만 범상치 않은 물건. 필용은 이를 ‘특별한 물건’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명함 걱정부터 하지만 남들에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명함으로 기억될 뿐이다. 나만의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대인의 모습은 모두 하나의 ‘익명의 단자’에 불과하다.


이렇게 진행된 현대인의 ‘겉멋만 든’ 댄디는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상실했다. 그것은 바로 ‘초연함’이다. 그리고 이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댄디가 바로 ‘양희’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양희는 21세기 댄디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비록 양희는 “언제나 펑퍼짐한 건빵 바지 차림이었고 남자들도 잘 입지 않을 것 같은 국방색 야상을 걸치고 다녔다. 신발도 언제나 운동화, 가끔만 갈색 로퍼로 바꿔 신었다. 머리는 언제나 숏커트였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외모에 대한 치장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댄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양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난’ 때문이었다.


양희의 집은, “그런 걸 집이라고 할 수 있다면-집이라기보다는 굴에 가까”운, 합판으로 지어 놓은, 부엌은 타일 한 장 없이 흙투성이인, 초라하고 가난한 집이었다. 오리 농장을 한다고 했으나 오리도 몇 마리뿐이었으며, “죄 새끼들만 있는지 소리가 작고 힘이 없었다.” 가난이란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이상에 반하는 것이다. 기존 댄디의 ‘치장’은 소비자본주의사회에 반대하면서도 결국 그 전략이 애초에 자본주의 상품광고를 모토로 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희의 가난은, 아이러니가 없이 단지 그 자체로 소비자본주의사회에 반한다. 기존 댄디가 초연함을 가지면서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꾸몄다면, 양희는 치장에 대해서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양희는 가난에 대해서도 자신의 전 재산인 삼십팔만 원을 모두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할 만큼 초연하다. 그리고 필용이 자신에게 심한 말을 한 잘못에 대해서도 초연하다.


“부끄러워서?”
양희가 필용에게 물었다. 여태껏 한 적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 여기 있었다. 필용과 양희는 마주보았다. 밤이라 얼굴은 거의 지워졌어도 거기에는 양희의 눈이 있었다.
“미안하다. 심한 말 해서.”
필용이 사과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이에 대하여 양경언은 해설에서 ‘십육 년 전, 양희는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라고 말하면서 누군가를 비웃지도, 누군가 앞에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게 했었다’라고 설명한다. 양희는 초연함을 바탕으로, 마치 느티나무처럼 누군가를 비웃지도, 누군가 앞에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라는 연극 제목처럼, 양희는 비웃지 않는다. 양희의 초연함은 바로 그런 나무다.


또한 양희는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에 대해 비웃지 않는다. 갑자기 생겨난 자신의 ‘사랑’이란 감정도, 그것에 대해 목을 매게되는 필용의 어떤 기쁨과 황당함, 일종의 수치스러움도, 사랑이란 감정이 없어졌다고 하자 표출한 필용의 분노도, 나중에 고향까지 내려와 조심스레 전하는 사과의 감정도 비웃지 않는다. ‘ㅋㅋㅋ’대지 않으므로 어떤 말도 필요없다. 단지 그곳에 네가 있고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각인시켜주는, 우리가 서로 견디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응시’만 있으면 된다.


남진우는 1990년대 댄디 문학 속 댄디적 주인공을 ‘잉여인간’, ‘삶에 적응하지 못한 자의 고통스러움보다는 삶과의 거리 유지를 통한 자아의 가공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잉여인간은 참여보다는 관조를, ‘지겨운 현실을 척결하고 인위적으로 개조하기보다는 잠시 동안의 유희를 통해 망각’하는 편을 택한다. 따라서 잉여인간, 댄디는 시지각이 더 발달한 ‘조망적 인간’이며, 삶을 투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구경거리로 다루려고 한다고 말한다. 즉, 댄디는 초연한 자세로 삶을 감상하려 한다. 남진우가 말한 1990년대 댄디적 인물의 특징인 ‘감상’, ‘관조’는 이러한 양희의 ‘응시’로 이어진다. 그리고 90년대 댄디의 ‘유희’는 양희의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라는 연극과 이어진다.


사실 남진우가 설명한 90년대 댄디의 ‘관조’, ‘거리두기’, ‘감상’과 양희의 ‘응시’는 조금은 차이를 보인다. 90년대 댄디는 관음증적 태도를 내재화하여, ‘직접적인 몰입을 배제하고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벤야민의 ‘산책자’의 현대적 후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양희의 ‘응시’는 그런 스쳐지나가는 듯 한, 남 일이라는 듯 한 ‘관조’라기보다는 ‘응시’에 가깝다. 양희의 응시는 타인의 허풍이나 사랑,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비웃지 않는 선에서 때로는 타인의 시선을 빗겨가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지긋이 바라보기도 한다. 양희의 그러한 응시에 연극 게스트들은 “처음에는 견디다가 나중에는 받아들이다가 응시하게” 된다.


또한 양희의 ‘응시’는 과거 댄디들이 ‘자신이 주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견지디 못하고 차라리 주시하는 편을 택’하는, ‘보이는 대신 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90년대 댄디들의 관조가 일방통행이었다면 양희의 ‘응시’는 쌍방향적이다. 양희는 게스트를 응시하고, 게스트는 양희를 응시하고, 관객들은 이 둘을 응시한다. 자신이 응시하는 동시에 타인으로 하여금 같이 응시할 수 있도록 한다. 양희의 바라보기는 이처럼 일방동행이 아니고 상호 연결되어 있기에 관조가 아닌 응시(gazing)인 것이다.


그러한 응시의 연극은 ‘유희’로 작용하여 ‘잠시 동안의 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망각하는 대상은, 현대인들이 익명의 단자로서 살아가며 겪어야 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기계 속 하나의 나사와도 같은 반복적이고 강압적인 삶이다. 그리고 망각하고 그 시간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바로 오늘 그리고 지금 그들의 감정이다. 90년대 댄디가 일반인과의 다른 자신의 개성 있고 차별화 된 모습을 꾸미기 위해 시지각이 발달됐었다면, 양희의 시지각은 척박하고 힘든 현실을 잊고 타인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비웃음 없이 나누기 위해 발달된다. 그리고 양희의 말없이 과묵한 시선은 곧 위로가 된다.


남진우는 댄디의 윤리를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는 그 중 두 번째, ‘평균적이고 반복적인 도시적 일상을 전복하는 사건이나 인물의 조우를 통한 신비 경험에 대한 천착’과 세 번째, ‘댄디적 삶의 기만성과 기생성을 폭로하는 작업’의 윤리가 등장한다.


두 번째 특징과 같은 유의 소설은, 남진우에 따르면 이는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파니 기법의 우리나라에의 전수라고 볼 수 있다. 내용은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 무자각적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우연히 시적 불꽃의 순간과 만나게 될 때의 경이로움을 담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새로운 자아의 탄생을 위해 편력의 길에 오르게 된다. 필용은 익명의 단자로서 평균적이고 반복적인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종로의 맥도널드에 도착하게 되고, ‘갑자기’ 양희의 연극을 마주치게 된다. 마치 윤대녕의 주된 소설 유형같이 ‘변함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불현 듯, 문득, 불쑥 저 세계에 대한 신호’가 나타난 것이다. 그 후 양희를 생각하고, 양희를 만나기 위해 현실을 잊고 몇 번이고 연극을 보러 가는 그의 행동은 말 그대로 ‘신비 경험에 대한 천착’이다. 그러나 조금 특이한 점은, 1990년대의 결과물로서의 댄디가 댄디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는 신비를 담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을 거론하며 남진우는, “특히 댄디의 경제사회적 기생성은 비판받아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양희는, 언제나 맥도널드에서 2000원만을 건넸고, 그에 대해 필용은 일종의 선의를 베풀어 자신의 돈을 더해 세트 메뉴를 주문해주었다. 초연함으로부터 비롯된 양희의 경제적 무심함 혹은 이기주의는 필용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비난받아 마땅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않고 조촐한 연극-그것도 곧 끝나는-이나 하고 있는 양희의 모습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심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양희의 삶의 태도와 그녀가 야심차게 준비한 과묵한 응시의 연극은 분명히, “사회개조에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댄디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매력 또한 보유하고 있듯이, 양희의 행동도 적잖은 매력을 보유하고 있다. 비록 사회개조에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않을지언정, 현대인으로서 가면을 쓰고 반복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필용에게 새로운 삶의 태도를 제안해 주었고, 연극에서 눈물을 보였던 덩치 큰 남자에게 ‘너의 울음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상연을 하는 약 일 년의 시간동안 다수에게 상호적인 ‘응시’의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이는 다수에게 망각할 시간을 제공해 주었고, 울 시간을 제공해주었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시간을 제공해 주었고, 결론적으로 그들을 위로해주었다. 필자가 말하는 21세기 댄디의 새로운 가능성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필용은 1990년대에 출발한 댄디의 2010년대 결과물이고, 양희는 21세기 댄디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댄디의 특징은 ‘외적인 치장’과 ‘주위 현실에 대한 초연함’이다. 90년대에 유행했던 댄디는 소비자본주의사회를 만나 ‘외적인 치장’에 치우쳐져 유행을 따르며 개성이 아닌 ‘평범함’을 위해 자신을 치장하고, 겉으로는 가식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익명의 단자로서의 현대인을 대량생산했다. 댄디가 근원적으로 모순덩어리였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잘못 해석된 것이다.


그러나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김금희가 보여준 양희의 댄디에는 아이러니가 없다. 그녀의 삶의 태도는, 과거 자본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오히려 근원적으로 자본주의를 모토로 하고 있었던 댄디의 모순을 벗어나 치장을 버리고 ‘초연함’이 삶과 예술 전반에 내재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관조를 응시로 탈바꿈시켜 90년대의 밀실을 벗어나 관객이 함께하는 연극장으로 나섰다. 삶을 투쟁으로 보지 않고 초연함을 통해 하나의 구경거리로 다루고 있지만, 과묵한 응시를 통해 구경거리를 넘어서 타인에게 잠깐의 시간을 제공하여 일종의 말 없는 위로를 건네고 있다. 우리는 이를 ‘초연함이 강화된’ 21세기 댄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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