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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고 Aug 20. 2020

외(外)면과 내(內)면 그 사이, 위태로운 경계(境界)

「임시교사」 P부인의 삼각형 욕망

스페인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돈키호테』는 노스럽 프라이의 장르 구분 중 ‘로맨스’에 해당하는 대표작품이다. 로맨스는 서구 문학의 역사에서 지금 여기와는 다른 아득한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하며 초자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중세 기사모험담에 원천을 두고 있다. 몰사회적인 세계 속의 무정형적, 근원적, 원시적인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러한 개인은 프라이에 따르면 ‘진공 속에 존재’하며 몽상에 의해 이상화 된다. 때문에 로맨스는 독자가 자신의 이상과 상상을 주인공에 투영하여 동일시하기에 적합하다. 작품 속 돈키호테는 ‘돈키호테형 인물’로 정형화되었고 ‘햄릿형 인물’과 비교·분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는 ‘진공 속에 존재’하는 몽상가인 돈키호테를 ‘삼각형의 구조’를 통해 설명한다. 돈키호테는 “저 유명한 아마디스 데 가올라”를 위해 “자기 개인의 근본적인 특권을 포기”한 인물이다. 그는 아마디스를 하나의 모델로 삼아 자기 욕망의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아마디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대신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 ‘모델’은 곧 ‘중개자’이다. 보통 주체와 그의 욕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간단한 직선을 하나 그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돈키호테에게는 그 직선이 본질적일 수가 없다. “돈키호테의 욕망은, 이 직선 위에 주체와 대상 쪽으로 동시에 선을 긋고 있는 중개자가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독자들은 돈키호테의 천진난만한, 꿈을 향한 열정에 빠져 자신의 이상과 상상을 그에게 투영하여 동일시했었겠지만, 돈키호테의 꿈을 향한 열정은 사실 ‘아마디스’에게 빌려온 것이었던 것이다. 이는 플로베르의 소설들에서도 발견된다. 돈키호테와 비슷하게 타인의 욕망을 따랐던 엠마 보바리는 다음과 같이 ‘보바리즘’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현재의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려는 그들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모델’을 하나 정하고, ‘그들이 그렇게 되기로 결정한 인물에게서 모방할 수 있는 모든 것, 모든 외부적인 것, 모든 외관, 즉 몸짓·억양·옷차림을 모방한다.’


삼각형의 욕망, 타인을 따르는 욕망, 간접화된 욕망, 빌려온 욕망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모방’이다. 그리고 스탕달은 “‘복사’와 ‘모방’의 모든 형식을 허영심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그는, 허영심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내지 못”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삼각형의 욕망은 2015년 제6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손보미의 「임시교사」에서도 다시 찾아볼 수 있다. 「임시교사」 속 P부인이라는 인물은 아이엄마에 간접화되어 아이, 혹은 치매 걸린 노모, 혹은 보모를 둘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 가정, 혹은 그 모든 것들을 욕망한다. 「임시교사」에 나타난 삼각형은 다음과 같다.


주체와 중개자의 사이는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것은 ‘거리’로 나눠지는데, 거리가 가까운지 먼지, 인접성을 가지는지 가지지 못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의 소설들에서 중개자는 주인공의 세계 외부에 있었지만, 스탕달의 소설에서는 중개자가 주인공과 동일한 세계의 내부에 있다.” 이 간격은 물리적인 측정값이 아니다.


 지리적인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중개자와 주체 사이의 거리는 우선 정신적인 것이다. 가령 돈키호테와 산초는 언제나 물리적으로는 서로 접근해있다. 하지만 그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사회적·지적인 거리는 극복될 수 없다. 주인의 욕망의 대상을 하인이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전혀 없다.


「임시교사」 속 아이엄마는 고등학생 때 파리로 날아가, 파리의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마친 사람으로, 잠시 한국에 들러 휴식을 취하려 했으나 “남편에게 속아서 결혼”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바쁜 남편과 치매 걸린 시어머니, 어린 아이를 두고 가을에 있을 전시회를 준비 중인 소위 ‘워킹맘’이다. 그리고 P부인은 무려 20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사회·지리를 가르쳤던 교사였으며, 현재는 보모로서 아이를 돌보고 있다. 비록 P부인은 ‘정식’교사가 되지 못한 채 20년간 ‘임시’교사로 지내왔지만 무려 20년간 아이들을 가르쳐 왔고 그 일을 무척 좋아했으며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착한 아이가 아니구나.”하는 말로 아이에게 따끔한 경고를 주는 등의 절도 있는 행동을 보이고 틈이 날 때마다는 책을 유식하게 책을 읽는 등의 분위기를 봐서는, 아이엄마와 P부인의 ‘사회적·지적’ 거리는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극복될 수 있어 ‘보인다.’ 따라서 「임시교사」에 그려진 삼각형의 욕망에서는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욕망의 경쟁이 가능하다. 즉, 아래와 같은 내면적 간접화, 내면적 간접관계로 그려질 수 있다.

외면적 간접화의 주체는 자신의 욕망의 근원인 모델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를 존경하며 스스로 그의 제자임은 자처하는 반면에 내면적 간접화의 주체는 자신의 모방 행동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감춘다. 또한 중개자의 제자임을 절대 자처하지 않으며 오히려 간접화의 관계들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이 관계는. 중개자에 대한 주체의 명백한 적대감이 그 위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때문에 더욱 확고하다고 볼 수 있다.


주체는 모델에게 갈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 때 갈등의 감정이란 가장 순종적인 존경심과 가장 강렬한 원한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의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 감정을 증오라고 부르기로 하자.


한국어에서는 ‘선망’과 ‘질투’라는 두 단어가 유사어로 묶여 설명되고 있으나 프랑스어에서는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선망은 남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시은 것이다. 그 ‘무언가’란, 그가 가진 ‘존재’도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존재’ 자체 일 수도 있다. 그로써 나를 만족시키기를 원하며, 나의 행복의 관심이 있기에 결론적으로 ‘만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질투란 남에게서 내가 가진 무언가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내 것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따라서 남의 만족을 방해하며 타인의 불행의 관심이 있기에 결론적으로 ‘불만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임시교사」에서 P부인은 아이엄마를 선망하면서 질투한다. 아이엄마의 ‘정상적인’, 어쩌면 ‘행복해 보이는’ 가정 속에 침투하는 것, 아이를 돌보고 치매 걸린 노인을 모시며 그들 가족에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P부인의 행복이다. P부인은 아이엄마를 선망하며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한다. 반면 P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오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치매 걸린 노인 때문에 그들 부부에게서 급하게 호출되려면, 그들 부부는 직장에 더 큰 문제가 생겨야 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아이와 저녁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야 하며, 치매 걸린 노인은 더 난동을 피워야 한다. 아이엄마가, 그들의 가정이 더 불행해야 한다. P부인은 아이엄마를 질투하며 그의 불행과 불만족을 추구한다. 그래야 그 틈새로 자신의 자리를 꿰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결합되어 ‘무력한 증오’라는 감정이 탄생한다. ‘무력한 증오’란, 상대에 대한 지독한 증오이지만, 이는 언제나 상상으로만, 꿈속에서만 일어난다. 그것은 경쟁자(중개자)에게 언제나 존재하는 매혹적인 요소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P부인은 이중적이다. 마치 ‘착한 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더 불행해져서 자신의 자리를 확립해가며 그들 가정에 스며들기를 바라면서도, 아이엄마가 자신의 아름다운 선망의 대상 그 자체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 치매 걸린 노인이 난동을 피워 아이 아빠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을 때, 그 집에서 본 “퉁퉁 부은 얼굴로, 여전히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헝클어진 머리에 헤어밴드를 아무렇게나 착용하고 있”는 아이엄마의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 엄마에게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 한 것이다.


그들 가정에 아무 상관도 없는 P부인은,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 어린 부부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어하며, “그래서 어느 토요일 오후에 아이 아빠가 자괴감과 고통에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을 때”, “오히려 깊은 안도감을 느”껴한다. 분수를 모르고 남을 따라 욕망하는 것, P부인은 바로 허영심 많은 사람 그 자체이다. 보모가 되기 위한 면접을 보러 그 집에 처음 갔을 때에도, “이 가족-잘생기고 예의바른 젊은 아버지와 아름답고 우아한 젊은 엄마와 귀엽고 똑똑해 보이는 아이, 어쩌면 그 순간, P부인은 자신의 집을 떠올”린다. 그리고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P부인이 가진 것 중 가장 비싸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옷인-트위드 재킷의 금속 단추를 만지작거”린다. 그들 가족을 선망하고 질투하며 증오한다.


그러다 문득 P부인은 “자신이 빈집에 침입해 있고, 뭔가 대단히 부도덕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두려워지지만, 그 두려움과 망설임도 잠시, P부인은 “결국 찬장을 열”어 “작은 새가 앙증맞게 그려진 찻잔-그것이 P부인의 마음에 가장 들었다-을 꺼냈다가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 “찻잔받침대 위에 찻잔을 받쳐서” 거실로 나와 차를 마시며 자신이 가져온 책을 읽는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그들의 서재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약간 망설이다 책을 한 권 꺼”낸다. 그리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자신의 책을 가져오지 않고 그들의 책장에 있는 책을 읽는다. P부인은 이렇게 야금야금,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의 집을 정말로 자신의 집처럼 생각하려 하며 그냥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아이 엄마가 되려 한다.


그렇다면 「임시교사」 속에서 P부인의 진정한 스스로의 욕망은 등장하지 않는가? 스탕달은 허영심의 정반대는 열정이라고 말한다. 열정(passion)에서 비롯한 욕망이야말로 바로 ‘자발적 욕망’이다. “자발적 욕망의 진짜 기준은 이 욕망의 강도에 있다. 가장 강렬한 욕망이 열정적인 욕망이다. 허영심으로 인한 욕망은 진정한 욕망의 더럽혀진 그림자이다. 허영심에서 유래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의 욕망이다.” 쉽게 말해 타인을 따르는 욕망인 허영심과 대립되는 것은 자신을 따르는 욕망이다. 「임시교사」에서도 P부인의 ‘자신을 따르는 욕망’, ‘자발적 욕망’은 등장한다. 그러나 곧, 스쳐 지나간다. P부인의 자발적 욕망은 첫째 ‘정식 교사가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부모, 그 무능했고 자신에게 기대기만 했던, 그렇지만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부모”와 “동생 부부”로 인해 이뤄질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는 과거의 욕망일 뿐이다. 텍스트 속의 현재의 시간에서 등장하는 P부인의 자발적 욕망은 바로 ‘남동생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다.


 P부인은 잠시 동안 그 가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여자애가 고개를 돌렸고 그들은 눈이 마주쳤다. P부인은 황급히 짐을 챙겨 카페에서 나왔다. 엿보고 있다는 것을 여자애에게 들켜서가 아니라, 어쩐지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와서 그녀는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야만 했다. 그녀는 다섯 블록을 넘게 걸었다. 눈 때문에 양말이 젖었고, 머리끝이 얼어서 딱딱해졌지만, 그녀는 결국 공중전화기를 찾아냈다.


P부인은 카페에서 ‘행복해 보이는’, 혹은 ‘평범해 보이는’ 가족을 바라보다 문득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결국 현재 P부인의 자발적인 욕망은 바로 ‘정상적인 가정’이다. 행복의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행복한 가정’ 또한 P부인의 욕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아이엄마의 가정은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남편과 아이엄마는 직장에서 현재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둘 다 번듯한 직장이 있으며 서로에겐 서로가 있고, 귀여운 아이도 있는 하나의 ‘정상적인’, ‘행복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홀로 살아가는, P부인에 비하면 충분히 ‘정상적’이고도 ‘행복’하다. P부인이 동생에게 전화를 거는 행위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도, 남처럼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는 분명히 자신의 열정에서 우러나온 욕망이다. 그러나 이마저 “공중전화기를 찾아냈다.”에서 종결되어, P부인이 동생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는지, 전화를 하긴 했는지, 동생이 받긴 받았는지, 사이가 어떻게 다시 좋아지긴 했는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 그 후에 P부인이 “자신의 인생이 새로운 형태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믿”는 것으로 보아, 이 전화통화를 제대로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그녀의 자발적 욕망은 그 과거에 이어 현재에도 완전하게 좌절되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도스예프스키는 중개자를 사건의 전면에 내세우고 대상을 뒷전으로 밀어내는 소설의 구성을 통해 욕망의 진정한 서열을 반영하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경우에서는, “중개자는 고정되어 있고, 마치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처럼 주인공이 중개자의 주위를 맴돈다.” 따라서 중개자를 통해 간접화된 주체의 “행동은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이지만, 삼각형의 욕망의 논리에는 완벽하게 부합한다.” 「임시교사」에서도 이러한 구성이 등장한다. P부인이 보모로서 해고되기 이전에, 집으로 들어선 아이엄마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P부인은 왜 항상 티테이블 위의 작은 전등불만 켜놓는 거지? 왜 이렇게 집안을 어둡게 해놓는 거야? 대체 왜 P부인은 책갈피를 사용하지 않는 거지? P부인이 집으로 돌아간 후 그녀는 P부인이 설거지통에 덩그러니 넣어둔 찻잔을 바라보았다. 작은 새가 앙증맞게 그려진 찻잔. 그건 영국제로 그녀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그걸 사고 싶어서 그녀는 백화점 직원에게 몇 번이나 부탁했고, 두 달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중개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P부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상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면적 간접관계에 놓여 진 중개자(경쟁자)와 주체는 서로 욕망의 경쟁을 한다는 점이다. 아이 엄마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아이와 더 오랫동안 함께 있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더욱 더 잘 다루고 보살필 수 있는 P부인에게 의지하려 하며 조언을 구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찻잔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어하며 ‘아이 앞에서는 싸우지 말라는’ P부인의 충고를 같잖아 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중개자이자 경쟁자이자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 엄마의 심기를 건드린 죄로 P부인은 해고 되었고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또 다시 갈 곳을 잃었다는 점에서, 「임시교사」 속에서의 진정한 서열을 반영하였다.


P부인은 특정한 찻잔을 사용하고, 그 집안의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상승시키려는 헛된 꿈을 꾸었다. P부인에게 의미 있는 삶이란, 어쩌면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다. 계속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으려 하고, 타인이 불행해서라도 자신이 필요해지길 바란다. 그러나 P부인은 자신에 대한 ‘필요’가 안정적이지 못한 ‘임시’교사이며, ‘보모’일 뿐이다.


P부인이 ‘식모’가 아닌 ‘보모’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모는 단지 가정을 지키고 가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 두는 사람으로 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조건인 ‘음식’을 전담한다. 그러나 보모는 조금 다르다. 아이를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학식이 있는, 좀 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전담한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P부인의 예술적 소양이나 학식, 지식, 문화 등의 문화자본은 아이 엄마에게서 꿇리지 않는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외국으로 나가 대학교와 대학원을 나와서 바로 아이 엄마가 되어버린 아이 엄마보다, 20년간 아이들을 가르친 P부인이 더 ‘교양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둘의 ‘욕망의 경쟁’은, 어쩌면 가능해 보였다. 이 둘의 사회적·지적인 거리는 가까워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아이 엄마의 일은 모두 잘 해결되었고, P부인은 해고당하여 다시금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곳이 없는,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기도의 연속”이자 “버둥거림의 연속”인 삶에 처해진다. P부인의 욕망이, 남에게 빌려온 욕망이 이토록 허무하게 좌절되고 무력감만을 남긴 것은, P부인의 기도가 정말로 ‘주제도 모르는 헛된 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둘의 사회적·지적 간격은 좁았다하더라도 경제적 간격을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 엄마는 “자신이 예술작품에 대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고등학교 때 파리로 날아가, 파리의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여전히 하고 있으며, 분명히 아이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아이를 낳고 키운 여자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단백질이 충분히 공급된 머릿결은 보기 좋게 컬이 들어간 채 어깨를 살짝 덮고 있었고, 피부는 생기가 넘쳤으며 팔다리는 길고 날씬했다.” 결론적으로 P부인이란 보모를 둘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반면 P부인은 앞서 말했다시피 “무능했고 자신에게 기대기만 했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동생이 전문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주었고, 결혼할 때와 정비소를 차릴 때에도 자신이 모든 돈의 많은 부분을 떼어주”어야만 했다. 이는 P부인의 말마따나 “그녀가 선택한 삶이 아니었다.” 부모는 P부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태생적인 결함이며, 이 둘의 경쟁은 태생부터 불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둘의 차이는 P부인이 책갈피를 사용하지 않고 책을 접어서 표시하는 습관에서 확연해진다.


따라서 필자는 지라르의 중개자-주체 사이의 두 가지 유형(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의 구분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도표로 새로운 유형을 제안하고자 한다.



분명히 P부인과 아이 엄마의 사회적·지적 거리는 가까웠다. 경쟁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P부인의 태생적인 경제적 결함은 그녀의 노력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 소위 말하는 ‘금수저’와 ‘흙수저’의 구분이 바로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외(外)와 내(內)의 중간에는 언제나 ‘경계선’이 있다고 보아 위와 같은 새로운 유형을 ‘계(界)면적 간접화’라고 지칭하고 싶다. 필자가 주장하는 ‘계(界)면적 간접화’란, 분명히 주체-중개자 간의 욕망의 경쟁이 가능해 보이고, 사회적·지적 간격은 충분히 좁으나, 결국은 태생에서부터 경제적 근원이 달라 치열했던 욕망의 경쟁조차도 헛된 경쟁이 되어버리는, 가까워 보이지만 가깝지 않은 간접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로 쉽게 예를 들자면, 평범한 10대 소녀가 같은 반에 있는 예쁘고, 이성과 선생님과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성적도 좋은 동성친구를 선망·질투하며 허영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지라르가 말한 ‘내면적 간접화’가 되겠지만, 만약 같은 또래의 소위 ‘금수저’, 혹은 ‘금수저’ 연예인을 향해 허영심을 품는다면, 그것은 필자가 말한 ‘계(界)면적 간접화’일 것이다. 이는 어쩌면 너무 지독한 발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주제’를 알아야 한다.


스탕달은 ‘선망, 질투, 무력한 증오’ 같은 보편적인 허영심을 현대적인 감정이라고 말한다.


만일 현대적인 감정이 만발한다면, 그것은 ‘시기하는 본성’과 ‘질투기질’이 유감스럽고도 불가사의하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차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세계에서 내면적 간접화가 승리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주인공 모방은 더욱 소박하고, 마치 종교적인 공포에 마비된 것처럼 압도되어 있다. 자아에 대한 타인의 힘은 예전보다 더 강하며, 우리는 그 힘이 예전 주인공들에게서처럼 단 하나의 중개자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지라르는 현대인의 특징으로, 언제나 남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그의 욕망을 욕망하려 한다는 점을 꼽는다. 현대인은 내 자리에 남아있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은 ‘이방인’이자 ‘쓰레기’라며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과 자기혐오를 지닌다. 신이 죽어버린 이 시대에 예수나 성인들을 통한 수직 상승은 불가능해져버렸으며, 인간상이 획일화되어버린 현대에서는 ‘수직적인 초월’이 아닌 내가 아닌 ‘타인’이 되고자 하는 ‘수평적인 초월’로 나아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 ‘내면적 간접화’가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다르게 말하고 싶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승리’가 진정한 승리가 아닌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면적 간접화와 필자가 주장하는 ‘계(界)면적 간접화’를 분명히 나눠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내면적 간접화에서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언정, ‘계(界)면적 간접화’에서는 P부인의 예처럼 절대 ‘승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매일을 현대적인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정말로 우리의 경쟁 상대인가. 경쟁상대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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