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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고 Aug 20. 2020

우리는 빙 둘러 앉아서, 윤곽만 남길 것이다

김승일, 『에듀케이션』

시인은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회상에서 객관적이고 공유된 세계를 발견하고, 공유된 생을 시의 본질이 되도록 한다. 이처럼 개인적인 요소를 공공의 리얼리티와 조화시키고 통일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시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가 한때는 개인적 회상이지만, 훗날에는 공공의 유산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현대사회는 파편화되었다. 시에서 개인이 등장해도 결국에는 항상 거대주체의 퍼소나로 환원되던 시대는 과거가 된 지 오래이다. 거대했던 우리네 ‘공동체’는 ‘민족’에서 ‘민중’으로, 그리고 ‘연대’로 계속해서 축소를 반복하다가 결국 조각조각 분열되어 개인과 타자만이 남았다. 과거에는 보통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을 등장시켜 그들의 관계와 수난사를 거론하면서 사회의 수난사로 확장시켰으나 이제는 가족이란 공동체마저 분열되어버렸다.


2012년에 발표된 김승일의 『에듀케이션』 또한 그러하다.


내가 배달된 해에, 할아버지가 둘 다 죽었다.

할아버지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혹독한 현실. 하지만 사명감은 갖지 않을래.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에듀케이션』의 시적 화자는 태어나던 해에 “할아버지가 둘 다 죽었”으며,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른 현재를 살아가고있다. 『에듀케이션』은 부모와 할아버지 둘 다의 죽음을 직선적으로 꾸밈없이 말하는 것을 통해 ‘세대 단절’이라는 상황을 전적으로 내보이고 있다. 할아버지, 부모, 형제 등의 가족화자들이 등장하는, 마치 연작시처럼 이어져 있는 몇 개의 시들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배후」에서도 “주인은 셔터만 올려놓고 나가서 올라오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부재’의 이미지를 명시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 “사명감은 갖지 않”으며, 오히려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화장실 청소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슬픔 없는 무심함을 그려낸다. 심지어 “강냉이에 혼이 팔린 부모들”, “밤섬에 새끼들을 팽개치고 온 자격 없는 부모들”이라 꼬집기까지 한다.


아래세대인 시적 화자뿐만 아니라 위 세대라고 볼 수 있는 시적 화자의 부모조차 “우리는 작은애를 잘 몰랐지”, “작은애가 우는 것을 지켜보았어”라고 말하며 가족 공동체에 무심한, 그저 방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듣는 것은 아까 시작되었지. 듣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시작이 없어. 잘되게, 잘되게……나는 듣는다.
꿇어앉은 고손자 애는 잔 돌릴 차례의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세 번씩 꺾어 따르고.
나는 그걸 하염없이 보고 있었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서도 아래 세대의 “잘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단지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고, 고손자의 행동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위 세대의 무심함이 그려져 있다. 이미 죽어버린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어떤 가르침, 혹은 관심의 목소리를 일절 내지 않는다.


위 시의 다음으로 이어지는 「다음」과 「펜은 심장의 지진계」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들을 자꾸만 말을 걸며 꾸짖는 것은 위 세대도 타인도 아닌 ‘선생님’이라는 분열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헬렌? 모른다고 하지 말랬지.
알고 싶다고 말하랬잖아.
지진계를 좋아해서 펜을 잡았다. 펜은 지진계의 바늘이니까. 펜은 자꾸 떨고 있다. 심장을 통해. 지진계는 여진도 적어두니까. 심장아, 이제 무엇을 쓸까.
학생의 시점으로 마무리할까? 선생의 시점으로 마무리할까?


시집 맨 처음, 시인의 말에 “내 심장 속엔 선생님이 있다”라고 적혀있듯이, 화자의 선생님은 전통이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위 세대가 아닌 바로 자기 심장이다. 그리고 펜은 그러한 심장의, 선생님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지진계의 역할을 한다. 이처럼 시집에서는 공동체나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나만 그렇게 태어났지?”, “나밖에 없을 거야”, “나는 이목을 끄는 사람”, “나밖에 없을 테니까”라며 ‘나’라는 것에, 자기 자신에만 초점을 맞춘다. 화자들은 분열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갈 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모습은 거의 드물다.


그 집은 우리 집이 아니라 너희 집이잖아.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다고.
당신 집이 좆같으면 당신을 저주할 거야.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던 거예요.
얼씨구, 그래 울어라. 뭘 잘했다고 울어?


「호객꾼들이 있던 거리」를 보면 자꾸만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호객꾼들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는 화자를 발견할 수 있다. 화자는 타인들을 “억만 가지 불길하고 불쌍”하다 생각하여 문단도 나누지 않은 채 숨 돌릴 틈 없는 어조로 그들에게서 도망친다. 그러나 이 시가 “그 애는 거기 서 있었어요. 다시 만날 것처럼”이라 하며 끝나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한줄기의 가능성이다. 비록 현대에 와서 공동체는 깨어져 분열된 개인들만이 남았고, 공동체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공의 기억마저도 흐릿해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인 것이다.


나는 겁이 나지만 마스크는 쓰지 않을 것이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늘 혼자 있었다.


혼자 있기 싫어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화자의 말을 미루어보아 부모의 죽음도 덤덤하게 말하고, “나밖에”, “나만”을 외치며 ‘독고다이’의 모습을 보여줬던 화자에게도 여전히 타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에서 제시된 ‘타인과 관계 맺기’의 방식이 공공의 경험으로 인한 동일한 기억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던 그 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생생한」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추를 단 소녀들이 체조를 하고 있네, 사각팬티를 입고 고추를 들썩거린다.
남자친구야, 나한테 고추가 생겼어. 우리 이제 불알친구지? 니네 집에 가고 있어.
너희 엄마한테 혼날 거라고? 왜 혼나? 불알친군데.


「생생한」에는 고추를 단 소녀들이 등장한다. 고추를 단 소녀는 남자친구에게 “우리 이제 불알친구”라며 그에게 “발기하는 법”과 “발기 푸는 법”을 배우고 싶어 그의 집에 가겠다고 말하지만, 남자친구와 그의 엄마는 소녀를 허락해주지 않는다. 소녀는 결국 “어떻게 죽이는지 (아직) 몰라서. 무작정 이렇게 꽉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소녀가 거부당한 이유는, 소위 자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소녀와 남자친구와의 공공의 경험, 동일한 기억은 불가능하다. 소녀가 아무리 고추를 달아도 소녀는 남자친구의 불알친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맞지 않는 것을 끼워 맞춰 타인과 동일해지려고 한들 거부당할 뿐이며 결국엔 ‘어찌할지 몰라’할 뿐이다.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간 날
아야야 나는 우는데
의사는 웃으면서 이를 뺀다


이제 우리는 공공의 기억을 가질 수 없다. 위의 시처럼, 심지어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환자는 울고, 의사는 웃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다. 개인들은 그들에게 맞는 각기 다른 경험들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에듀케이션』은 공동체의 중요한 필요조건인 공공의 기억이 흐릿해진 현대에, 개인이 자신의 서로 각기 다른 경험들을 공유함으로써 타인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두 가지의 방법을 제시한다.

 

타일 사이사이로 누런 십자가, 형이 변기에 앉아 똥을 누면서 양치질을 할 때 새파랗게 질린 구름, 나는 샤워를 하면서 오줌을 눈다.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형제는 왜 또 치고받을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수치를 나눠 갖기 위해 싸운다는 것. 이것이 그들의 종교.


첫째는 특히 ‘서로 각기 다른 경험들’ 중에서도 기쁘고 행복한, 자랑할 만한 경험들이 아닌 고통스럽고도 수치스러운 경험들을 공유함으로써 가능하다. 형은 똥을 누면서 양치질을 하고 동생은 샤워를 하며 오줌을 누며 화장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함께하는, 서로 "수치를 나눠 갖기 위해"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치고받는 형제가 그려진 「방관」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타일 사이를 흘러가는 "오줌"은 "십자가"이며, 그들의 방식은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읽은 책. 우리가 들었던 노래. 우리가 했던 사랑. 이 모든 것이 마치 한 사람의 일처럼 비슷했는데……

바닷가 마을의 민박집에서. 그런 것은 더 이상 우리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주지 않고.

나는 부모한테 많이 맞았어. 거의 학대 수준이었지.

우리도, 우리도 맞았어. 우리도 학대를 당했다니까?

이것 참 굉장한 공감대로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어떻게 4층에서 던져졌는데도 그렇게 멀쩡하게 살아남았어? 게다가 어떻게 그런 부모랑 아직도 한집에서 살 수가 있니? 너한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너를 이해한단다. 내가 더 학대받았으니까.


「같은 과 친구들」들에서도, 제목은 그들을 '친구'라고 한 데 묶고 있지만 그들이 여러 취향들이이 매우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들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유년시절의 학대 받은 경험만은 그들에게 “참 굉장한 공감대”가 되어 주었고, 결국 친구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비록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 개인의 세밀한 경험까지 모두 다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대'로 한 데 묶인 "친구들"이 "사실 너를 이해한단다"라는 따스한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건, 각 개인의 서로 다른 세밀한 경험을 ‘대명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듀케이션』이 말하는 두 번째 방식이다.


당신은 어디서 살다 왔나요? 저기서요. 이럴 수가. 나도 당신처럼 저기서 왔어요. 당신의 저기와 나의 저기가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위로가 되죠. 우리는 빙 둘러앉아서. 캠프파이어의 대명사가 되려고 한다.

대명사 캠프는 캠프의 대명사. 우리는 빙 둘러앉아서. 캠프의 윤곽만 남길 것이다. 캠프를 그것이라고 하고. 윤곽도 그것이라고 하고. 그것의 그것만 남을 때까지.


「대명사 캠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타인의 저기와 나의 저기가 같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친구들이 서로 각기 다른 학대 경험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 받을 수 있었던 건, 바로 ‘타인의 저기와 나의 저기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세한 경험들은 서로 달랐지만 ‘학대’라는 점에서 서로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경험들을 “윤곽만 남”겨 “그것의 그것만 남을 때까지” 그것을 “그것이라고”한다면, 우리는 개개인의 경험을 공유하며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이해하고 위로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듀케이션』이 그려내는, 고립된 개인을 탈피하여 타인과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 받으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두 가지 방식이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가르쳐줄까
지금 막 우리들이
알게 된 것을


그리고 시집은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인 「홀에 모인 여러분」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후 ‘지금 막 우리들이 알게 된 것을 서로에게 가르쳐주자’고 제안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여기서 ‘지금 막 우리들이 알게 된 것’은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로는 시인의 말처럼 “내 심장 속엔 선생님이 있”고 “펜은 심장의 지진계”이므로 지금 나의 심장이,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펜으로 기록하여 서로에게 가르쳐주자(education)는 의미일 수 있다. 둘째로는 이 시집이 교육(education)하고 있는 내용들을 서로에게 가르쳐주자(education)는 의미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로는, 단어 에듀케이션을 ‘교육’이 아닌 ‘경험’으로 해석하여, 지금 막 우리들이 배운 경험(education)들을 서로에게 가르쳐주며 서로 이해하고 위로 받자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필자는 다양한 추측 중 세 번째, ‘우리가 지금 막 알게 되어 서로에게 가르쳐줄 것’은 이 시집의 교훈도 자기 내면의 선생님의 가르침도 아닌 남들과 서로 다른 자신만의 경험이라고 주장해본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서로에게 가르쳐주는 곳은 바로 "대명사 캠프"가 될 것이다. “대명사 캠프”에서, '우리는 빙 둘러 앉아서, 그것의 윤곽만 남길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공동체가 모두 분열되어 고립된 개인만이 남은 현대에,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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