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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고 Sep 01. 2019

벌레를 잉태한 여자

김애란의 「벌레들」속 미친 여자와 괴물

“대부분의 서구의 문학 장르는 결국, 본질적으로 남성적(세계를 향해 남성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서 남성 작가에 의해서 고안된)이다.” 그리고 바로, 남성이 만든 플롯과 장르, 문법, 관습을 가리켜 ‘가부장적 시학’이라고 부른다. 불가피하게 가부장적 시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 작가들은 일종의 불편함(dis-ease)과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라고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부장적 시학 내에서의 여성작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린이용 책이나 편지, 일기와 같은 상대적으로 ‘하찮은’ 장르를 집필하거나 독사를 여자들로만 한정하곤 했다. 또 다른 전략으로는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가장하여 남성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이를 넘어선 또 다른 전략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바로 여성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특이한 여성의 관점에서 핵심적인 여성의 경험” 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특이한 관점과 특이한 경험은,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가부장적 시학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들이었다. 여성 작가의 작품 속 “기이함”이 가부장적 시학에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성 작가들이 남성 중심적 문학사를 개정하고 재정의함으로써 그에 동의하면서도 거부했고, 그를 통해 자신의 특이한 경험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들은 “가부장적 시학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여성 문학의 권위를 달성하는 어려운 임무를 잘 해냈다.” 그러나 동의와 거부, 순응과 전복이라는 이중성을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성작가는 자기혐오와 정체성의 분열을 겪곤 하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미친여자나 괴물로서 나타난다.


가부장적 문장이 비추는 거울 속 여성은 말 잘 듣는, 순응적인 여성이었다. 남성과 문화, 사회는 여성에게 그러한 ‘예쁜’, ‘아름다운’ 여성을 여성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여성 작가들은 유리표면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모든 여성에게 강요해왔던 사회적 규범을 반영하고 있는 온 거울을 박살냈고, 거울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울의 다른 면”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은, 여성 작가의 자기혐오와 자기분열의 결과인, 순응적이고 말 잘듣는 여성 혹은 천사가 아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절망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게 된 ‘미친 여자’나 그녀가 스스로 두려워하는 ‘괴물’이다.


소음과 벌레들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여성의 경험을 일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는 김애란의 「벌레들」에는 앞서 말한 ‘미친 여자’와 ‘괴물’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19세기 여성 문학 전반에 퍼져 있던, 그 시대 고유한 여성의 전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갇힘과 탈출의 상징적인 드라마도 나타난다. 여성 작가가 남성의 문법에 갇혀 있었듯이,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남자의 집에 갇혀 있었다.” 벌레들의 화자 또한, 사전적 의미로 집에 ‘감금’되어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화자가 별다른 경제활동이나 외출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집에만 틀어박혀 집안일만 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집에 ‘갇혀 있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온통 가시투성이인 장미의 이름을 딴 ‘장미빌라’는, 가부장적 시학, 가부장적 사회, 남성의 집 그 자체를 의미한다. 화자가 마주친 이웃은 “아래층에서 두 번이나 찾아온 총각”뿐이며 그 빌라에서 사람에 대한 정확한 소리를 들은 것이 “한밤중 경상도 사내가 뭐라 중얼대는 소리”뿐이라는 점에서도, ‘장미빌라’가 ‘남자의 집’이라는 것은 뚜렷하다.


‘장미빌라’에 갇힌 화자는 소음과 벌레들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정신적으로 고통 받게 된다. 지하에서는 “누군가 갑자기 악-하고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고, 화자와 남편이 맘에 들어 했던 커다란 창문에서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소문처럼,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딱 서너 발자국을 남기고 물러서는 파도처럼, 어디선가 떠나오고 또 떠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울려대며, 빌라 뒤편에 있는 10미터 가량의 절벽 아래 A구역에서는 “파랗고 통통하고 꾸물거리는, 혐오감을 주는 어떤” 벌레들이 자꾸 기어온다. 화자는 싫은 차 소리를 매일매일 빨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화자의 “표정과 말투, 내장의 질서를 바꾸어” 놓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화자는 “그냥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상태”, ‘고요’를 바라며, 벌레들을 퇴치하기 위해 청소에 집착하게 된다. 본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청소는 “허물어져 가는 바깥 세계로부터, 쉬지 않고 날아 들어오는 오염 물질로부터 우리 집을 지키는 의식”이었다.


여성이 ‘남자의 집’에 갇혀있는 반면, 그 ‘집’이라는 공간은 여성의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여성의 장소로 그리기 위해 다른 많은 장치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성의 베일, 옷, 거울, 그림, 자물쇠가 채워진 캐비닛 등의 가정용 가구들이 19세기를 지나 20세기까지에도 지속적으로 여성의 작품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것처럼, 화자가 자신의 가난한 장소를 “초록으로 점점 푸르게 물들여주길” 바라며 사 모은 ‘화분’과 결혼반지를 넣어둔 ‘파란색 벨벳 상자’, ‘수납장’ 등이 작품 속의 집을 여성의 장소로 그려낸다. 여성인 화자는 바로 그러한 집안에 갇혀 다섯 가지가 넘는 세제를 사와 “고무장갑을 낀 채 고농축 세재로 만들어진 스펀지를 이용해 바닥을 닦”고, “무릎을 꿇고 앉아 스펀지로 한 번 닦고, 구정물을 휴지로 제거한 뒤, 다시 물에 빤 스펀지로 문지르고, 물걸레질을 하고, 마지막으로 마른걸레질을 하는 식”의 집안일들만 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표현대로 “여성의 삶이 면도되어 하나의 틀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남성의 집 안에서 화자는 마치 가부장적 문법에서 그려내는 여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집안에 갇혀, 집안일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여성스러워” 보이지만, 그 안에서 화자는 점점 미쳐간다. 남성이 집안 곳곳에 끈끈이와 살충제가 든 캡슐을 붙여 놓고, 은행잎을 넣어 스타킹 속에 넣어 화장실과 가구 틈새에 놓고, 삶은 감자에 붕산을 섞어 싱크대와 냉장고 근처에 뿌려두는 등 강박적으로 벌레를 퇴치하고, 소음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둠 속, 팔뚝 위로 느껴지는 미세한 꿈틀거림, 불을 켜고 봤을 땐 아무것도 없는, 느낌은 있지만 잡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느끼고, “장판 위를 기어가는 쥐며느리 한 마리 때문에 죽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며, 애호박만한 애벌레까지 보게 되는 화자는 마치 미친 여자처럼 그려진다.


호르몬 탓에 우울증이 극심했던 어느 날은 장판 위를 기어가는 쥐며느리 한 마리 때문에 죽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날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엉엉 통곡했다. 남편은 한동한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남편의 피로, 남편의 한숨, 남편의 짜증 같은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에 대해 남편은, 화자로 하여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만 안겨줄 뿐이었다. 소음에 대한 스트레스를 말하면 남편은 “왜 난 괜찮은데.”하는 시큰둥한 답변만을 할 뿐이고 “죽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때에도 “그런 건, 사람 사는 집에 늘 있기 마련이라고. 우리 몸 안에도 사실 수많은 벌레들이 산다고.” 짜증과 한숨 섞인 대답을 할 뿐이었다. 이는 여성으로서의 ‘특이한’ 경험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남성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가부장적 시학에서는 ‘들어맞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임신 우울증에 남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더해져 화자의 벌레들에 대한 거부감과, 그에 따른 ‘미친 여자’로서의 이미지가 고조된다.


나는 곧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엄청난 양의 곤충들이, 벌레들이, 유충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길게 줄 이은 벌레들의 행렬은 갈래를 뻗어 재앙처럼, 혹은 난민처럼 도시로- 도시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손전등을 들어 벌레들의 행렬을 쫓았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태를 정확히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빛은 다급하고 산만하게 A구역 곳곳을 더듬었다. 눈에 들어오는 건 늘 보아오던 쓰레기 더미가 전부였다. 불빛은 주위를 한참 떠돌다 이윽고 한 곳에서 멈췄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그 근처에서였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 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조"-인용자)


‘괴물’의 이미지는, 결말 부근에서 화자가 결혼반지 상자를 떨어뜨린 계기로 벌레들이 오는 곳인 A구역에 혼자 들어감으로써, 집에서 탈출함으로써, 벌레들의 근원지를 목격하면서 드러난다. 화자는 애호박만한, 징그러운 털이 나 있는, 난간에 붙어 꿈틀대는 애벌레를 모든 벌레의 근원이라 여기고 세제로 죽이지만 A구역에 내려가 직접 목격한 벌레들의 근원지, 괴물은 바로 A구역에 있는 “마당을 다 차지하고 이웃집 지붕까지 덮”은 집보다 큰 나무이다. 마치 가부장적 시학, 가부장적 사회, ‘남성의 집’으로 그려진 ‘장미빌라’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가시투성이인 ‘장미’로 이름 붙여졌듯이 A구역의 그 나무도 멀리서 봤을 때에는 “신성하고 아름답게 흔들”리는 아주 오래된 큰 나무였다. 그러나 직접 내려가서 손전등으로 비춰본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는,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있어, “여러 종류의, 수천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을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나무의 ‘괴물’적 이미지는, 결국 바로 화자를 의미한다.


독한 세제 때문에 온몸이 얼얼하던, 장미빌라에 들어온 첫날 화자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고,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는 순간 천장에 ‘돈벌레’, 그리마가 지나간다. 또한 남편이 “얜 잘 크고 있나?”라며 화자의 둥근 배를 쓰다듬을 때도, 창틀에 깨알만한 벌레가 지나간다. A구역의 커다란 나무가 잘린 날, 화자는 첫 진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 날, 남편의 회사 제품인 초코조코칩에서 구더기가 나와 집에 오지 못했다. 화자는 임신사실을 알게 된 후 벌레들에 더 극심한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화자의 뱃속의 아이와 벌레의 연관성은 분명하다. 모든 벌레의 근원, 모든 해충의 우두머리라 여겨 애호박만한 애벌레를 증오하며 퇴치했지만, 그 근원은 A구역의 나무였으며 그것은 곧 화자 자신이었다. 화자는 벌레를 극도로 혐오하며 매일매일 강박적으로 청소를 하고, “어떻게 우리가 저 사람들하고 같아?”라며 벌레를 생성하는 A구역에 대한 반감을 강력하게 표시하지만, 결국 지금까지 벌레들에 느낀 거부감은 자기혐오, 자기분열과 같은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벌레들〉이 가부장적 시학을 거부하며 개정·재정의했음이 드러난다. 가부장적 시학에서 “여성의 자궁은 확실하게, 늘 어디에서건 아이 최초의, 그리고 가장 만족스러운 집이자 음식의 원천이며 어두운 보호소였다. 따라서 신성한 동굴, 비밀스러운 성소, 성스러운 오두막 등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화적 낙원이었다.” 그러나 여성 작가는, 여성의 자아를 아이의 ‘집’으로 연관시키는 것이 마치 남성의 집에 ‘갇히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았고, 그를 통해 “본질적으로 자신이 순전히 인간 종의 생물학적인 유용성에 의해서만 규정되어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여성이 문자 그대로 집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정신적인 초월성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출산에 ‘갇혀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집이나 감옥에 있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다.


〈벌레들〉은, 여성의 출산을 수많은, 징그러운 ‘벌레들’로 그려내고 임신을 한 화자가 나무의 출산의 증거인 ‘벌레들’을 혐오하는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여성으로서의 특이한 경험인, 가부장적 시학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출산에 대한 혐오, 출산이란 생물학적 기능에만 갇힌 여성의 몸뚱아리 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출산을 마친 여성을 나무에 빗대어 “전쟁 중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시신”,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로 표현하며, 가부장적 문법에서 그려내는 여성의 이미지, 어머니의 이미지, 출산의 아름다움 등에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잉태와 출산의 이미지는 예술의 창작과도 이어진다. 임신과 출산에 혐오감을 가지는 화자는, 작가가 되는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가부장적 문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불가피하게 자아분열과 자기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여성 작가 그 자신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여성으로서의 ‘특이한’ 여성만의 관점이자 여성만의 경험이다. 따라서 이는 가부장적 문법에서는 “들어맞지” 않게 보일 것이다. 남편이 벌레들에 강박적으로 혐오감을 느끼는 화자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남성은 여성 작가의 가부장적 문법을 전복시킨 여성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가 ‘미친 여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부장적 문법에서 여자의 모습을 어떠한 한가지의 이미지로 규정해놨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순종적인, 대를 이을 아이를 낳는 여자로 여자의 이미지를 꾸며놓지 않았다면 벌레와 출산 등에 강박적인 혐오를 보이고 정신 이상 상태를 보이는 여성이 ‘미친 여자’로 규정되지 않았을지도 모를일이다. 남성에 의해 미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을 ‘미쳤다’ 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문학텍스트들은 강제한다”, “여성들은 남성 작가가 반복적으로 여성을 규정해왔던 남성의 은유를 자신의 텍스트에서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성의 문장을 개정하고 재정의하여 여성만의 관점과 경험을 그려냈다. 그것은 비록 자기혐오와 자아분열을 동반하는 힘겨운 싸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치있으며, 성별을 불문하고 이해받아 마땅하다. 물론 김애란의 「벌레들」은 출산과 생명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가난의 문제와 도시의 문제 또한 다뤄내고 있다. 그리고 여성을 이해하지 못한 남성도 남성 나름의 문제가 있다. 여성이 출산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다면 남성은 책임과 양육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자신의 남성에 대한 혐오. 가부장적 문법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강제한다. 사회가 정한 젠더적 이데올로기가 남성에게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여성작가들이 아버지의, 남성의 집에서 뛰쳐나와 여성 선배를 찾아 헤매이며 가부장적 문장에 재정의를 내렸고 내리고 있는 것처럼, 남성 또한 아버지의 문법과 문장 그의 판결에 거부하고, 개정하고, 재정의를 하는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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