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이대로 좋아해 줘.
꼬일 대로 꼬인 하루다. 오늘 하루 기분 좋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내디딘 가벼운 발걸음이 무색할 만큼 안 풀리는 하루다. 안 풀리는 걸 떠나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원망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다가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벽일을 출발할 때 마음먹었던 기분을 어찌 그리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나 싶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지'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의지로써 차분해지려는 것뿐 분함과 짜증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첫 번째 꼬임
새벽배송의 장점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굳이 만난다면 아파트 경비 아저씨 정도겠지만 그저 배달 왔으니 문 좀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걸로 대화는 마무리된다. 새벽에 아파트 단지를 출입하며 입구 차단기 앞 경비실로 연결된 인터폰 버튼을 누르는 것이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고객이 요청한 물건을 '문 앞'에 예쁘게 가져다 놓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버튼을 눌러야 한다. 이때 스피커로 들려오는 경비원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는 찾아가는 동 호수를 묻고, 배달이 몇 건이나 되는지 파악하고 문을 열어주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비원들은 택배라고 하면 그냥 문을 열어준다. 어떤 곳은 대꾸도 안 하고 화상에 잡힌 내 모습만 보고도 문을 열어주는 곳도 있다. 배달할 물건을 들고 있지 않아도 입주민인줄 알고 열어주는 듯 하다. 누가봐도 배달할것처럼 생긴 것인가? 아님 으레 배달 오는 시간이니 열어준 것인가? 어쨌든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오늘도 고객이 애타게 기다리는 물건을 일어나자마자 받아볼 수 있도록 '문 앞'에 예쁘게 놓아드리기 위해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경비실 호출 버튼을 당당히 누르지만 언제나 로또뽑는 기분으로 조마조마하다. 짜증 섞인 경비원의 반응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잘 자고 있는 경비원의 코털을 건드린 죄로 그 정도는 가벼이 감수한다.
오늘은 특별한 경비원이다. 전에 본 적 없는 캐릭터다. 벨을 누르면 열어준다거나 못 열어준다거나 가타부타 액션이 있어야 하지만 화상 카메라로 잡힌 내 모습을 5초에서 10초가량을 쳐다보고 있음이 느껴진다. 스피커를 통해 살짝 경비원의 인기척이 들려오나 말은 없다. 이는 분명 잠을 깨워 화가 난 것이다.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빨리 문을 열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결국 문이 열렸다. 그리고 스피커로 경비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배달 마치고 경비실에 들리세요!" 목소리에 짜증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사롭지 않다. 몇 집을 방문하며 벨을 누르지만 앞선 반응과 똑같이 5-10초 정도 나를 응시하다 문을 열어준다. 열어준 건 고맙지만 왠지 기분이 살짝 더러운건 기분탓일까? 자 이제 배달마치고 경비실로 갈 시간이다.
그는 이미 화가 나있다. 왜 아파트 입구에서 자신에게 들르지 않고 그냥 들어갔냐는 질문으로 선공이 들어왔다. 차단기가 열려 있어 깨우지 말고 들어가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 말이 괴변으로 들렸는지 배달 지침을 물어봤다.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았는가 하는 것부터 새벽배송 매뉴얼이 없냐고 묻기도 했다. 아는 대로 답했다. 앞서 열린 차단기로 그냥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제가 열어놓은 의도를 오해한 것 같다고 말하며 사과했다. 지하 공동현관 벨을 누른 것에 대해서는 고객이 요청한 것이 '문 앞'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도 비밀번호를 기재하지 않은 고객이 있으면 벨을 눌러 경비원에게 문개방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경비원들이 자는 시간인 거 몰라?"
처음엔 몰랐다. 아파트 경비원이 새벽에 잠을 잔다는 건 배송하면서 처음 알았다. 모든 경비원이 새벽시간 잠을 자는 건 아니지만 그간 반년 넘게 일한 경험으로 봐선 경비원의 반은 자고 반은 깨어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자는 시간이 맞지만 경비원이 경비일을 하며 잔다니 이게 경비를 서는 건가? 아닌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밤시간 자는 경비원에게 뭐라하고 싶진 않지만 '경비원'란 이름을 생각해보면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참동안 취조에 이은 일장 훈계를 듣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 "아니 경비 서시면서 왜 주무세요?" "여기 사는 주민이 자기 집 문 앞까지 배달해달라는데 주무시는 것 때문에 문열어주는 걸 귀찮아하는 게 말이 되나요?"란 말이 목구멍 끝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20분 동안 붙잡고 있는 경비원이 점점 괘씸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의 폭주의 말을 끊고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라며 결론을 요구했다. "그래서 대체 하고 싶은 말씀이 어떤 거냐"고 재차 물었다. 자신의 말을 끊었다는 걸로 '이 양반 저 양반' 하며 싸가지가 없다는 둥 기본이 안 돼있다는 둥의 비난의 말이 계속되자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
"앞으로는 이곳에 다시 들를땐 꼭 아저씨를 만난 후에 들어가겠다." 그리고
"정 문을 못 열어 주시겠다면 고객 메모란에 경비실 취침시간으로 인해 진입을 거부하여 '배송불가'라고 적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한다고 격려해주는 경비원도 많이 만나봤지만 이곳은 정말 최악이다. 잠을 깨웠다는 이유로 배달원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후에 안 것이지만 배달원들에게 그 경비원은 유명했다.
두 번째 꼬임
고용센터 약속이 오후 2시다. 충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잔 후 오후 1시쯤 일어나 준비해서 고용센터를 찾았다. 갈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들어갈 때 직원 모두가 한목소리로 합창하듯 인사한다. 아마도 구직자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한명도 빼지 않고 '안녕하세요'를 외치는 걸로봐서 의무적 지침이라 생각된다. 담당 직업상담사와 면담이 시작되고, 오늘까지 제출하기로 한 것은 '국비지원'으로 배우고 싶은 교육 정보를 적어오는 것이다. 이미 두 차례 진행되어 대충 가닥은 잡혔다. 전산회계관련 자격증과 상담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수강정보를 찾은 서류를 들이밀었다. 직업상담사는 열심히 기록한 수강내용보다 직접 학원에 찾아갔느냐 안 갔느냐가 중요한 듯 보였다. 전화로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정보를 굳이 찾아가서 알아보라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상담사를 자극한 듯했다. 상담사는 내가 서류에 기재한 학원으로 전화하여 수강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황당하게도 수강인원이 다 찾다는 답변이었다. 나를 보고 얘기한다.
"가등록 안 했어요?"
"가등록이요?"
"네 가등록"
그런 말은 전혀 없었다. 가등록하라고 말했으면 안 했을 리 없다. 갑자가 가등록의 책임을 나에게 돌리자 화가 났다. 이전에 만났을때 '가등록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어요" 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실수가 아님을 호소하듯 혼잣말을 되뇐다. "제가 안 말했을 리가 없는데.." 동료들이 명확히 듣도록 한 번 더 집어주었다. "전혀 말씀 안 하셨어요." 상담사는 서류를 꺼내 같은 강좌의 다른 일정을 알아보고 이후 만남 을 갖자고 했다.
왠지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역시나 들어올 때처럼 친절해 보이는 인사를 건네지만 잘가란 인사로 느껴지지 않는다. 찝찝하고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때 서류 하나를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다시 뒤돌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때 갑자기 조용해지며 담당 상담사와 팀장쯤 되는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하던 대화를 멈춘다. 상담사가 나에게 미소를 띠며 건내준 서류를 받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지만 내가 왠지 악성 민원이 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얘기를 아내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보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지만 이역시 유쾌한 결론을 맺지 못했다. 괜히 게임을 해서리..
오늘 새벽, 그러니깐 경비원과 다툰 오늘 일을 마치고 돌아와 마음도 식힐 겸 좋아하는 축구게임을 했던 것이 화근이 됐다. 게임패드 소리를 듣고 일어난 아내가 거실로 나오려 하자 급히 컴퓨터를 끄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꾸며봤지만 이미 방 안에서도 소리가 들렸던 탓에 게임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내는 자기가 게임을 못하게 하는것도 아닌데 하던 게임을 급하게 끄고 아닌척 숨겼던 걸 재밌어하며 "우리 남편은 언제쯤 철들까?" 라며 농담조로 말했다. 누가 들어도 웃자고 한 얘기였다. 하지만 오늘 오만데서 치인 나 혼자 심각해졌다.
"남자들은 죽기 전에 철든데"
"그럼 주위에 철든 사람들은 뭐야?"
"있기야 있지. 희박하다는 거지."
"그래서 죽기 전에 철들 거야?"
"내가 철들길 원해?"
"응"
.
.
"알았어. 주변에 철든 사람이 있나 좀 알아볼게"
"아니, 당신이 철들었으면 좋겠어"
"아니야. 나 철들길 기대하지 마"
이쯤 되면 웃자고 한 얘기가 아닌 게 돼버렸다. 난 철들라는 말에, 아내는 철든 사람 찾아본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우리 부부의 특성상 이런일이 있어도 금방 풀어지지만 오늘은 해결되지 않는채로 찝찝하게 잠이들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일에 목숨 걸고 달려들었다. 인생은 꼬여가는 것 같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만 이상해지는 것 같은 마음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추가로 보탰다.
"난 요즘 억울하거나 분해서 온몸에 휘발유 붓고 분신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
"사람일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내가 째려보며 말없이 싱크대로 간다. 그리고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나조차도 정확히 무언지 모를 마음의 분노가 표출되는 순간 그 분노의 파편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화살촉처럼 꽂힌다. 애 먼 곳에 감정을 쏟은 듯하여 금방 또 미안해진다.
아내의 철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게임이나 하지 말고, 빨리 취업이나 하라'는 말로 들었음이 분명하다. 아내의 의도는 그런게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일 겪은 일들이 평정심마저 잃게 했다.
분신하여 온몸으로 말하려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겠다는 말 또한 나도 나름 해보려고 하지만 안 되는 상황는 상황과 더불어 이상하리만큼 꼬이는 일들이 겹치니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남자는 죽기 전에 철든다"란 말로 성숙하기를 포기하려는 게 아니다.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지만 지금 사면초가의 위태한 모습도 사랑해 달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