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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성호 Oct 24. 2022

수험생을 위한 3주의 기적

하루 하루 일상의 반복이 만드는 변화와 습관의 형성

주: 이 글은 3주 동안 하루 하루에 충실함으로써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입니다. 삶에서 작은 변화라도 이루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의미


모든 사람은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원하지만, 매우 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다시 말해서, 긍정적인 변화의 결실을 삶에서 맺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의미 있는 결과는 언제나 먼 미래에 일어날 일처럼 여기고, 우리의 현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들의 연속이 됩니다. 무엇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단시간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노력을 지속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어떻게 견뎌내고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오늘 아침은 어제 아침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고 내일도 오늘과 별 차이가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진 사람이 된다면 우리의 삶에서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답을 가진 사람은 일상의 지루함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The Groundhog Day, 1993)은 일상의 지루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영화 속 이야기: 사랑의 블랙홀(1993)


    북미와 유럽에서 2월 2일은 그라운드호그 데이 (Groundhog day)입니다. 우리나라 입춘과 같은 의미를 지닌 날로서 그라운드호그(마멋이라는 다람쥐 비슷하게 생긴 동물의 또 다른 명칭)의 행동에 따라 봄이 언제 시작하는지 겨울이 언제 끝나는지 예측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또 성촉절(CandleMas)로 지키기도 합니다. 성촉절은 예수님께서 탄생 이후 40일 만에 정결 예식과 봉헌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날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로부터 정확히 40일째인 2월 2일은 그라운드호그 데이이면서 동시에 성촉절(CandleMas)인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성촉절이 먼저 있었고, 성촉절을 통해서 겨울이 언제 끝날지 또 봄은 언제 시작되는지 예측해보는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 그라운드호그 데이입니다.

    이 날을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알린 것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1993)입니다. 영화 속 기상 캐스터인 필 카너즈는 성촉절 날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가 열리는 펜실베니아주 펑추토니(Punxsutawney)로 취재를 떠나는데 그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그라운드호그 데이, 즉 성촉절인 2월 2일이 무한 반복된다는 것이 영화의 기본 설정입니다. 기상캐스터인 필은 매년 2월 2일만 되면 펑추토니로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를 취재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 2월 2일은 전혀 설레지 않는 귀찮은 업무를 하러 가는 날이었을 뿐입니다. 일 년 중 가장 무의미하고 귀찮은 날이 필에게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간만 동일하게 반복될 뿐만 아니라 어제 겪었던 일들이 정확하게 똑같이 오늘도 반복되는 경험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필만이 이 똑같이 반복되는 시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야 할 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설정 자체가 코믹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로 알고 있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아침 그리고 동일한 하루, 이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인공 필처럼 완벽하게 똑같이 무한 반복되는 일들을 매일 겪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도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이라는 하루를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의 지배 아래 놓인 것처럼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반복하고 후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하루를, 어제의 잘못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하루를 시작하고 또 반복합니다. 이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인공 필은 그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반복되는 하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수차례 몸부림쳤지만, 여전히 매일 아침은 2월 2일 아침 6시 똑같은 라디오 노랫소리로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에서 도망치려던 필은 어느 순간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의 시간이라 할 지라도, 사랑으로 선행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동일한 하루가 전혀 다른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다음 날(2월 3일)이 결코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일한 시간이 무한 반복된다 할지라도, 오늘이 새로워질 수 있으며 오늘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필은 사랑과 선행을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하루가 주는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 선한 의지를 담아서 그 하루를 살아가는 기쁨을 처음으로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오늘과 동일한 날들이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결단하여 살아간 하루는 풍성한 기쁨이 충만한 날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선한 일을 행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린 하루를 경험하자, 필은 그다음 날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개의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반복의 기쁨을 알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제 자신이 누렸던 삶의 기쁨을 오늘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하루가 이제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기쁨이 주어지는 기회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반복은 기쁨의 반복이었고, 가슴 설레는 감동이 축적되어 쌓이는 날들이었습니다. 반복되지만 전혀 다른 날들이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이 영화는 반복되는 하루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필은 매일 반복되는 시간을 통하여 피아노를 배우고 외국어를 배웁니다. 악기를 능숙하게 다를 수 있기 위해서는 악기 연습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악기 연습을 반복하면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의 실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연습에 지치거나 중간에 포기한다면 우리가 결코 원하는 수준의 실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매일의 반복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습관을 형성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습관을 통해서 우리는 덕이라 부를 수 있는 탁월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품적) 탁월성들은 본성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본성에 반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습관을 통해서 완성시킨다. [1]

습관이 될 정도로 어떤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은 일정 시간 이상을 그 일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그 행동이 나의 일상이 될 만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실 때에도 이와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를 기존 질서와 흐름으로부터 해방시키는지 알려주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2]

여기서 “자유”는 나를 지배하는 세력, 나를 종처럼 대하는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기존 삶의 흐름과 유형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해방과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안다는 의미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 앞에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 기록된 “너희가 네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자유를 경험할 때, 말씀을 따라 사는 기쁨을 누리는 제자가 될 때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네 말에 거하면”의 뜻은 단순히 한 번 말씀을 지켜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거한다”라고 말할 만큼 반복되는 행동의 형태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의 말씀대로 하루를 살아가고 그 하루를 반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어제의 습관에 지배당하지 않고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삶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살아서 사랑과 선행으로 하루를 새롭게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자유자의 삶, 복된 삶입니다.


하루의 가치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필은 반복하는 하루의 가치를 찾았습니다. 같은 날이 끊임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도 반복되는 날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돈을 훔치기도 하고, 특별한 관계인 것처럼 여성을 속여서 약혼자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필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낭비하든, 제대로 활용하든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무의미하게 보이는 그 하루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반복된 일상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의미 있는 변화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복되는 시간을 통해서 그는 외국어를 배우고 피아노 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정도로 그 분야에서 능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시간들은 수많은 “하루”의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하루의 반복된 시간이 시간이 없다면, 변화를 위한 “많은 시간들”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변화의 다이나믹: 우리는 어떻게 변화를 이룰 수 있는가?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3] 

시편 73의 말씀이 오늘날 사람들의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끄러운 비탈길에 놓인 인생이라는 표현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정확합니다. 비탈길을 위를 걸어가는 것은 성적을 올리려는 노력과 비슷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성적을 올리기 위해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의 성적은 쉽게 좋아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큰 변화 없이 평소와 비슷하게 성적이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적을 올리기는 어렵고 떨어지는 건 매우 쉽습니다. 비탈길 위에 있는 사람이 서 있으면 아래로 당기는 힘이 훨씬 더 강한 것과 같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성적 향상은 현재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서기 위해서 단계별로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을 넘어서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습니다. 넘어설 수 있을 만큼 노력을 집중해서 기울이지 않으면 현재의 단계에 머물든지 아니면 아래에서 당기는 힘에 의해서 더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에 집중하여 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면 그 단계에 해당하는 학습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내면에 형성되는 공부 능력이 될 것입니다. 각각의 단계에 들어가면 우리를 가로막았던 걸림돌이 우리가 그 단계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학습 능력의 향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하루가 최소 3주 이상 진행될 때 공부습관이 형성되고 이 습관이 다음 단계의 학습 능력의 향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집중적인 노력으로 몇 주간의 시간을 갖는 것이 1년 동안의 산만하게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중적인 노력을 반복해서 기울인 몇 주의 시간은 공부 습관을 형성하고 우리가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해주지만 산만하게 보낸 1년은 어떤 유의미한 결과물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반복해서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반복할 최소 시간 단위가 필요했습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매일 하루가 반복되는 것처럼, 저에게도 반복할 “하루”를 먼저 형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중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공부시간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 계산해야 했습니다. 중 2 때 했던 것처럼, 저는 일주일 총 시간 중에서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들을 계산했습니다. 사용 가능한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 하루 24시간에서 필수적인 시간들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사용 가능한 공부 시간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때의 계산을 다시 해 보면, 하루 24시간 중 공부를 할 수 없는 시간은 수면시간 4시간과 나머지 2시간으로 총 6시간이었습니다. 수면시간을 제외한 2시간 동안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가고 운동을 했습니다. 나머지 18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에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계획을 최대한 단순하게 바꾸고 매일 하루의 일정을 동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제일 중요한 과목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 7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시간 동안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고1 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의 수학 실력은 동기들에 비해서 많이 뒤처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학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뒤쳐진 수학 실력을 한꺼번에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3월 말에 있을 시험 범위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공부한다고 성적이 오른다거나 실력이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 목표는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다른 것들이 끼어들지 않게 계획에 따라서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밤 12시부터 2시까지 영어를 공부했고, 10분씩 9번 있는 쉬는 시간에 영어 단어를 외웠습니다. 아침 7시 50분부터 8시 30분까지 국어를 공부하고 주말에는 과학과 사회 과목들을 공부했습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공부를 했습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오직 제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한 하루의 시간을 매일 반복함으로써 습관을 형성한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제가 구한 기도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갈 있도록 힘과 용기를 더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주 후에 시험을 보는 날 아침에 저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결과가 좋을 것 같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하루를 3주 동안 21번 반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시험의 결과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여전히 평균보다 조금 잘한 정도의 성적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성적이 오른 것이 아니라 공부 습관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형성된 공부 습관 덕분에 첫 시험 이후 한 달 뒤 두 번째 시험을 볼 때는 큰 어려움 없이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적도 그보다 더 향상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번 형성된 습관은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 경험은 제게 습관은 이야기로 형성되며 형성된 습관은 지속적 변화를 만든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확인시켜준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시절,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해도 기회가 제게 주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낙담하고 포기하기 좋은 삶의 조건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하루하루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침 그즈음에 거제 삼성조선소는 중학생인 직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교실”을 설립했고, 저도 그곳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삼성조선소 직원 자녀는 아니었지만, 장학교실 선생님들께 제 사정을 설명하고 지원서를 제출했고 며칠 뒤 장학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 동안 장학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다른 학생들과 같이 국어, 영어, 수학에 대한 강의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의 시간을 뺀 대부분의 시간들은 학생들이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반에서 4등을 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13명 중에서 2,3등 했던 저에게는 기적 같은 성적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시간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제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의 총량을 계산한 후 과목별로 시간을 나눠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매일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미리 결정한 후 매일 반복되는 시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몇 달도 안 돼 전교 230여 명 중에서 1등을 했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기뻐하고 감사했던 이유는 성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적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좋은 성적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기쁨은 저에게 주어진 반복된 하루의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기쁨이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기쁨을 알게 되니 하루하루를 더 기쁘고 감사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그날에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게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결과를 얻었을 때 느꼈던 기쁨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기쁨이었고, 성적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제가 제게 주어진 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하루”를 “최선을 다한 날”로 만든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언제나 저는 내일이나 미래의 어떤 날도 아닌 오직 “오늘”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 기쁨은 더욱 특별했습니다. 매일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이라는 하루”의 시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다음 날이 “오늘이라는 하루”가 되면 또다시 그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제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제가 해야 할 일은 오늘 같은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저의 하루를 최선을 다한 기쁨으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쁨으로 가득 찬 날들이 매일 반복되면 습관이 형성되고 형성된 습관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절실한 기도

 in “Cheonggyecheons Benefactor in 1973”


절실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것을 성취하고 싶은 소망이 없다면, 그것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습관을 형성하고 성품을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믿고 그 이야기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믿으며 간절히 소망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공부 습관을 형성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제게 주어진 하루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이 오직 단 하루였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잘 때까지, 단 하루만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서 공부할 수 있다면, 저는 집중해서 최선을 다한 하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하루의 시간이 제가 반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 시간이었습니다. 반복할 수 있는 최소 시간 단위인, 단 하루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간이 온전히 제가 마음에 품은 이야기가 구현된 시간이 될 때, 그 시간은 제게 습관을 형성할 최소 시간 단위가 될 것입니다. 3달 뒤 성적이나 당장 한 달 뒤의 성적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단 하루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단 하루만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뜰 때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저는 그다음 날 아침에 어제와 동일한 하루의 시간을 반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루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저에게는 반복할 시간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제 목표는 오직 제게 주어진 단 하루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6시에 학교 기숙사 기상 음악 소리에 잠에서 깨자마자 저는 바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 이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제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이 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전날 2시에 잤기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학교 친구들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했고, 아침에 기상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많이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게 운명처럼 찾아온 놀라운 깨달음을 낭비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제게 주신 이 하루를 불평으로 시작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첫날을 잊지 못합니다. 새롭게 결심을 하고 잠든 그 다음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오늘 하루도 제가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 당시 제 삶의 목표는 성적을 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목표는 오직 제게 주어진 그 하루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한 하루가 반복되어 좋은 공부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매일 9과목의 수업을 들을 때 수업 시작 전 눈을 감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집중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50분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 기도를 드리면 50분 수업 내내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시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최선을 다해서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의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에게 이 기도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는 기도였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아래에 있음을 믿기 때문에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는 방법이었습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51.

[2] 개역개정, 요한복음, 8:32.

[3] 개역개정, 시편 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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