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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울 이선예 Mar 24. 2024

소심한 복수

결혼기념일 카레라이스 

     소심한 복수     

  우리 부부는 1980년 11월 22일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했다. 2년 6개월을 하루가 멀다고 만나며 연애 기간을 가졌음에도, 결혼해서 살다 보니 서로 다른 점이 참 많았다. 식성도, 취미도, 감성도 달랐다. 나는 감성 우뇌가, 남편은 지성 좌뇌가 더 우세한 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부부는 티격태격하는 일도 많다. 

  어느덧 결혼한 지 42년이 지났다. 서로 다른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산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긴 역사인 것 같다. 남편은 지금까지 해마다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잊고 지나간 적이 없다. 남편의 성향상 꽃다발을 사 온다던가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하지 않았지만, 결혼한 이후 신혼 초부터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결혼 날짜를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간혹 옷이나 선물을 사주기도 했지만, 주로 기념을 할 수 있는 물건을 하나씩 사곤 했다. 가전제품을 새로 바꾸기도 하고 집안에 필요한 장식품을 사기도 했다. 결혼 25주년이었던 은혼식의 해에는 가까운 해외로 여행을 다녀왔다. 

  며칠 전 “ 내일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남편이 아침에 외출준비를 서두르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요즘 상황이 결혼 기념을 위한 식사나 외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7월, 함께 사는 96세 시어머님이 거실에서 넘어지셔서 고관절 수술을 했다. 워낙 고령이라 수술이 힘들었다. 행여나 깨어나지 않으실까 봐 온 가족이 노심초사하고 마음의 준비까지 했다. 다행히 평상시에 워낙 건강하셨기 때문인지 회복이 빨랐다. 수술하고 20일 만에 집으로 퇴원을 했다. 하지만 퇴원한 지 5개월이 다 되어가도 걸음을 걷지 못하고 화장실을 혼자 갈 수가 없으니 옆에서 도와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4시간 모든 일상을 침대에서 하게 되니 일거수일투족을 수발해야 한다. 어머님을 집에 혼자 있게 할 수가 없으니 나와 남편이 둘 다 외출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시누이들이 와서 교대로 어머님을 돌봐야 한다. 

  이런 상황인지라 결혼기념일이 특별한 날이라고 해도 마음 편하게 외식을 할 수도, 외출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없었던 최근 몇 년 동안은 남편과 어머니 나. 셋이 함께 결혼기념일 외식을 하기도 했다. 연로하신 어머님만 집에 남겨두고 나가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님 수술 후 몇 달간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다 보니 결혼한 날을 기념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결혼기념일 아침, 괜스레 심술이 나서 남편에게 “오늘 결혼 기념, 하고 싶지도 않아.”라고 볼멘소리를 하고 집을 일찍 나섰다. 양재동에서 아침 일찍부터 강사회 워크숍이 있었다. 온종일 공부하고 지하철을 타고 저녁에 집에 오니 온몸이 피곤해서 쉬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저녁은 간단히 카레라이스를 먹자고 했다. 외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배달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순간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남편은 40년을 넘게 함께 살아오는 동안 밥 한번 해본 적이 없고 청소도 설거지도 빨래도 거의 잘하지 못한다. 어쩌다 내가 없을 때 라면 끓여 먹는 것이 고작이다. 외아들이라 어려서부터 시할머니와 시어머님이 그런 일을 시켜본 적도 없고 여동생이 세 명이나 있었으니 할 기회도 없었을뿐더러 손재주는 완전 빵점이다. 

  오늘 같은 날 카레라이스라니..., 와인 한잔하자고는 못 할망정 카레를 만들라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잠시 후에 옷을 갈아입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편에게도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을 고쳐 마음을 가라앉히며 선심 쓰듯 카레를 만들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고기, 양파, 당근, 감자, 호박을 꺼냈다. 고기를 썰고 양파를 까다가 남편에게 작은 복수심이 발동했다. 남편은 평상시에 감자를 무척 좋아한다. 밥 대신 감자를 먹기도 한다. 특히 감자를 쪄서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감자 없는 카레라이스를 만들기로 했다. 감자 맛이 빠진 카레라이스를 생각하니 내심 혼자 통쾌하기까지 했다. 감자를 까려다 말고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카레라이스와 먹다 남은 미역국, 굴 깍두기와 동치미로 간단히 저녁 밥상을 차렸다. 남편은 카레라이스를 먹으며 카레 속에 감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감자를 넣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감자 까기 귀찮아서 안 넣었다고 이야기했다. 나의 그 말에 남편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밥을 먹던 남편은 “감자 안 넣어도 담백하고 맛있네.”라고 하며 카레 한 그릇을 더 달라고 했다.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기가 막혔다. 내가 원하던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남편은 정말 감자 빠진 카레가 맛있었을까? 밥 먹는 남편의 표정을 보니 복수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양파도 넣는 게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했다.


  몸이 불편하신 어머님 덕분에 카레 파티로 끝난 나의 42주년 결혼기념일은 카레 색깔처럼 노랗게 끝이 났다. 내가 성의 없게 만든 카레를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을 보며 우리 부부의 결혼 50주년 기념 금혼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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