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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울 이선예 Mar 24. 2024

존중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따듯한 기억

   

  사람의 뇌는 참 신비하다. 기억의 창고 속에 단단히 저장된 일은 시간이 많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매일매일의 단기기억은 금방 잊히지만, 장기기억은 오래도록 생생하다. 그런 기억은 무심히 TV를 보다가, 혹은 길을 걷다가, 버스 유리창에 지나치는 창밖의 풍경을 보다가, 어느 순간에 불현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살아오면서 스친 여러 인연 중에서 존중받았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기억 ‘하나’

내가 40대의 나이에 회사에서 극기 훈련 갔을 때의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사람의 웰빙 운동인 등산은 인기가 많은 대중적 운동이다. 하지만 신체 구조가 산을 거부는 나에게는 썩 반가운 운동이 아니다. 요즘도 나는 요가나 걷기 운동을 하고 스포츠센터에도 가지만 등산은 잘하지 않는다

  2002년도의 일이다. 회사에서 춘천에 있는 ‘삼악산’으로 단합대회를 갔다. 전국에 있는 교육팀 워크숍이라 인원이 꽤 되었다. 나는 산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삼악산은 말 그대로 세 번 ‘악!’ 한다는 산이었다. 나는 딱히 등산 취미도 없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산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팠다. 우리가 올라간 코스는 역방향이었기 때문에 등산길이 험했다. 그야말로 바위산을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오르는 형상이었다. 뒤를 돌아다보면 악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찔…, 발만 헛디디면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나는 겁이 나고 무서워서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중도 포기하고 내려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아뿔싸…, 하산 집합 장소가 우리가 올라올 때 시작 지점이 아니고 산의 반대쪽이라 중도 포기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조금 가고 쉬고, 또 조금 가고 쉬다 보니 일행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에스코트해 준 과장님이 있다. 지금도 그 과장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또 감사하다. 내가 다리 아프면 같이 쉬어주고 뒤에 처지면 기다려주고, 먼저 내려가라 해도 내가 쳐지면 혼자 힘들까 봐 끝까지 같이해 준 과장님. 내 기억으로 나이도 나보다 훨씬 어렸는데 아줌마 동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반해 줬다.

  과장님의 동행으로 모든 사람의 박수를 받으면서 꼴찌로 하산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과장님은 나 때문에 늦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교육팀 직원들에게, 미안하다면서 막걸리 한 잔씩을 사주었다.

그다음 날 과장님 왈~. 그날 나 때문에 하도 고생해서 온몸이 쑤시고 그 튼튼한 등산화가 밑창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은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맘이 많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는 존중받은 사람으로 기억되어 지금 생각해도 잊을 수 없다.     

 


 기억 ‘둘’

1994년도의 일이다. 지금은 40살이 넘어 두 딸의 아빠가 된 아들이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을 하니 그때 나는 열성 엄마였다. 학교의 지역사회교육 운동에 매우 정열적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만들고 학교의 어머니회 회장으로 일을 하다 보니 교장 선생님 뵐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아들이 6학년 졸업할 무렵에 늦둥이를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교장 선생님과는 별로 왕래할 일이 없었다. 그 후 나는 아들이 중학교 1학년, 8월에 아기를 출산했다. 나의 나이 40살이 넘어 노산의 출산이라 아기를 8개월 반 만에 조산했고, 그 아이는 건강하지 못해 6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내가 살던 동네는 신혼 시절부터 15년 동안 터를 잡고 살던 동네라 지인들이 많았다. 아이를 잃고 난 후, 아기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의 탄생 축하와 아기가 잘 크냐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점점 사람 만나는 일이 싫어졌다. 그 후 살던 강동구 둔촌동에서 신도시인 분당으로 이사를 했다. 아기가 있다가 없으니까 자연히 온 가족의 마음은 항상 우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분당 집으로 교장 선생님이 친필 붓으로 쓴 편지가 왔다. “행기 어머니, 아기는 잘 크고 있소? 행기는 중학교 가서도 공부 잘하오?.”하면서…. 

분당 주소를 어찌 아셨는지…, 나는 차마 아기가 하늘나라 간 걸 말씀드리지 못했었다. 교장 선생님은 경남 진주분이라 평상시에 현기를 행기라고 불렀다. 한 참 지난 시간인데 기억해 주고 편지까지 보내신 교장 선생님의 마음이 참 고마웠다. 아들이 졸업한 학교에 연락해 보니 교장 선생님은 중랑구에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단 얘기를 들었다. 얼마가 지난 뒤 한참 후에 전화 통화로 인사를 드리고, 근황을 말씀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다. 

  교장 선생님은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어머니회 임원들 집으로 배를 한 상자씩 보냈다.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오히려 베풀었던 교장 선생님. 그때의 그 일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따듯한 기억은 마음 한편에 저장되어 있는 듯하다. 존중이라는 낱말을 생각해 보니 소중한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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