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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울 이선예 Sep 07. 2022

기억의 창고

아직은 ..

 기억의 창고


  “인간은 죽기 전에 꼭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요즘 인기 드라마 ‘빅마우스’ 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남자 주인공 이종석이 감옥 속에서 독백처럼 지나치며 한 대사다.

순간  만일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면 죽기 전에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을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차례차례 돌아보기로 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5살 무렵부터이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장면이지만 냇가에서 언니와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 엄마한테 난생처음 매 맞고 슬펐던 일,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잠 못 잤던 설렘, 처음으로 가본 넓었던 학교 운동장, 입학 선물로 받은 빨간 가죽 가방 냄새,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반장이 되었던 날 쑥스러운 마음에 차렷! 경례! 인사 구호를 하지 못해 친구들이 기다려줬던 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전 무용을 해서 상 받던 일, 아스라이 오랜 기억의 창고에서 퇴색되고 바랜 사진을 꺼내듯이 하나둘 끄집어내 보았다.

   행복했던 순간보다는 슬펐던 기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 입학을 앞두고 엄마가 신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슬펐는지 엄마가 금방 죽을 것만 같았다. 무서워서 나는 매일 울었던 것 같다. 퇴원하자마자 걷기도 힘든 엄마가 엷은 연두색 한복을 입고 입학식에 참석했을 때의 일. 손재주가 특별히 없었던 내가 어버이날 엄마 가슴에 직접 만든 카네이션을 달아주던 순간.

  소녀 시절 두근두근했던 첫사랑의 기억. 무섭고 엄격한 아버지의 자식 교육 방식으로 인한 나의 반항 시절, 대학 시절 하루가 멀다고 이유 없이 돌아다녔던 젊음의 거리 명동, 낭만의 도시 춘천과 강촌으로 MT 갔던 기억, 미팅, 그리고 친구, 연애, 결혼, 직장생활, 지나온 시간의 필름이 계속 돌아갔지만, 다시 그 자리로 가고 싶은 순간은 없었다.

  코로나 이전 몇 번의 유럽 여행과 일본, 중국 여행. 그 순간이 행복했던 순간이었을까? 결혼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미치도록 행복해서 딱히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기억에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꼭 이야기해야 한다면 5살 이전의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을 사는 내가 그런대로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지금 현실이 무지무지 행복해서도 아니다. 어쩌면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을 바꿔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생각해보니 여러 장면이 머릿속에 휘리릭 지나갔다. 첫사랑과의 이별, 친했던 친구와의 헤어짐, 늦둥이로 낳은 아기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일, 남자 동생이 40살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떠난 일, 아버지의 죽음, 엄마와의 아픈 이별, 얼마 전 여동생이 뇌출혈로 쓰러져 갑자기 우리를 떠난 일.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이라는데, 돌아가기 싫은 순간은 생각지도 못한 아픈 이별의 순간이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헤어짐은 이미 정해진 약속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보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 많음은 당연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 96세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고 남편과 나는 아직 건강하다. 자식은 아들 하나지만, 결혼해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고 있다. 손녀도 둘이다.

  남편은 오늘도 동우회 회원들과 걷기 운동을 하러 나갔고, 나는 얼마 전 넘어져서 고관절 수술을 하신 시어머니의 식사를 챙겨드려야 하는 시간이다. 내일은 남편이 어머님을 챙기고 나는 글쓰기 공부하러 외출할 것이다.


 요즘 나의 현실이 어느 땐 지루하고 답답도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평화로운 하루하루의 시간에 감사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 꼭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데, 나는 아직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억울한 일은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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