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래울 이선예 Sep 07. 2022

시어머니와 임플란트

내리사랑

시어머니와 임플란트


  아들이 결혼한 후 우리 식구는 시어머니와 남편, 나 이렇게 셋이 되었다. 나는 휴일이면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편인데, 어머님과 남편은 외출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어머님은 쇼핑을 좋아하신다. 우리 부부는 각자 개인적인 일 외에는 거의 어머님과 함께 다니는 편이다. 복중 더위에 피서 삼아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마트에 장 보러 갈 때도 종종 같이 간다. 외식할 때도 당연히 함께다. 그래서 친척들은 우리를 삼총사라고 부른다. 이 별명이 웃기고 재미있기도 하지만 며느리인 나로서는 썩 유쾌하지는 않다. 가끔은 부부만의 자유로운 시간도 갖고 싶고, 긴 유럽 여행도 가고 싶지만 홀로 계실 어머님 생각에 포기한 적도 있다.     

  나는 남편과 2년여의 연애 끝에 26살에 결혼했다. 연애 초기엔 몰랐지만, 시댁은 민씨 가문의 종갓집이었다. 손아래 시누이가 세 명에 남편은 외아들이었고 나는 종갓집 종손 며느리였다. 시집올 당시에는 시할머니도 계셔서 4대가 6년을 함께 살았다. 제사도 많고 명절 때도 분주하지만 집안에 행사가 많아 일 년이 늘 시끌벅적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살다 보니 어느덧 남편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나도 60대가 되었다. 

  내가 시집올 때 50대였던 어머님은 90이 넘으셨다. 2남 1녀의 외동딸로 어린 시절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라셨다고 한다. 외출할 때면 목걸이 귀걸이를 하고 향수까지 살짝 뿌리고 나오신다. 그 옛날에 대학까지 나온 신여성이고 한마디로 말하면 공주과 할머니다. 

  어머님의 치아가 좋지 않아 임플란트와 틀니를 하느라 2년을 넘게 치과에 모시고 다녔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치과 관리를 받으신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님의 틀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평소에 깔끔하신 어머님은 틀니를 식사할 때만 사용하고 식사 후에는 얼른 빼서 식탁 위에 얹어놓거나 사용하신 그릇에 담아 놓으셨다. 그런 일이 식사를 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위생적으로나 외관상 보기 좋지 않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매번 이야기했지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셨다. 비위가 약한 나는 같이 식사하기가 불편했다. 당신은 다음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은 하지만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나는 훗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라도 행여 그런 말을 한 것이 후회될까 싶어 슬그머니 식사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고 예민해졌다.


  그러던 중, 치아 하나는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나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피곤하면 가끔 잇몸이 붓고, 충치도 없는데 염증이 자주 생겼다. 최근엔 염증 때문에 사랑니도 하나둘 뺐는데 이제는 뼈가 상해서 어금니까지 빼야 한다는 것이다. 잠을 잘 때는 윗니가 내려앉을까 봐 내 이에 맞춘 고정 장치를 끼고 자야 했다. 임플란트 세 개를 해야 상황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조금 힘들게 일하거나 많이 걷거나 하면 허리가 아프기도 하고 무릎이 시큰거려 우울했는데 치아까지 말썽이니 기분이 울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외출을 하고 집에 오니 어머님께서 나의 임플란트 바용을 대주고 싶다고 하신다. 나는 얼떨결에 왜 그걸 어머님이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님의 여유자금으로 해주신다는 거였다.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어머님은 또다시 임플란트 이야기를 꺼냈다. 아비가 해줄 수도 있지만, 그동안 내가 어머님을 치과에 모시고 다니느라 애썼으니 고마워서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님 이를 해 드리는 것이 도리인데, 거꾸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이를 해준다니 순간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갈 일이라고 생각되어 헛웃음이 났다. 최근에 틀니로 인해 어머님께 언짢게 이야기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가득해서 마음이 더더욱 편치 않았다.

  다음날, 어제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니 어머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했다. 그동안 지낸 시간이 파노라마같이 스쳐 갔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미국에 이민 간 시누이 집에서 15년을 계시다가 한국에 나오셨다. 그 이후 2003년부터 지금까지 함께 산다. 

  살면서 집안의 대소사도 많고, 어른에게 일상생활을 맞추고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남들은 다들 편히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불평도 많았다. 유난히 아들 사랑이 지극하셔서 며느리보다 아들만 더 생각하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었다. 

 어머님은 사고방식이 현대적이다. 겨울철 김장을 하지 않고 김치를 주문해서 먹어도, 밥상에 국이 없거나 반찬이 변변치 않을 때도, 바쁠 땐 밥상을 깍듯이 차려드리지 않아도, 며느리가 거의 매일 외출해도,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으신다. 이런저런 일을 돌이켜보니 어머님이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동안 며느리도 사랑하신 것 같았다. 


  결국 어머님은 나에게 임플란트 세 개 값을 주셨다. 감사한 마음도 컸지만,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이 고마움인지, 감동인지, 미안함인지 복잡했다. 구순이 넘은 노모가 환갑을 넘긴 며느리에게 임플란트해주는 시어머니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어머님은 올해 96세가 되셨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지만 몇 년 동안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다. 체중도 많이 줄었다. 요즘은 걷기가 힘들어 좋아하는 쇼핑도, 마트 나들이도 전혀 못 하신다. 최근에는 틀니 끼우는 것조차 귀찮고 번거롭다며 식사도 그냥 하시니 음식도 많이 못 드신다.

  연로하신 어머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와 이별할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식사할 때마다 생각이 많이 날 것이다. 그런 시간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진다. 어머님이 이 세상 소풍 끝날 때까지 지금처럼만 건강하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작가의 이전글 깍두기와 자장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