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가는 날
가끔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생활의 대부분이 북적거려서인지 언제부터인지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 나 아닌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방해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어서 좋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 조건을 어둡고 캄캄한 동굴에 비유했다. 삶의 형태를 동굴 내부의 삶과 동굴 외부의 삶으로 나눈다. 동굴 안의 삶은 현상세계의 삶이며, 동굴 밖의 삶은 철학적 삶이라는 것이다.
감정적 소비가 많아 마음이 허허로울 때 집 앞에서 무작정 버스를 탄다.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나만의 셀프 사랑법이다. 혹,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철저히 혼자가 되기 위한 마음의 무장을 한다. 플라톤이 얘기한 동굴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나만의 동굴 밖의 놀이는 허기진 감정을 다시 일으켜주는 전환점이 된다. 나에게는 주기적으로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경로 이탈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시간은 늘 가볍고 자유롭다. 목적지가 없다는 것이 더 그러하다. 간혹,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를 가기도 하고, 가끔 기차를 타고 외면상 낭만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한 화려한 외출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집 앞에서 빨강 좌석 버스를 탄다.
이 목적지 없는 가출은 집 앞에서 버스를 타는 순간 자유인이 된 듯하다. 일로써 외출을 하거나, 어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설 때와는 천지 차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가출이라는 단어를 쓴다. 승용차로 나가서 교통체증에 걸리거나 내비게이션을 목적지에 맞추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버스의 창밖 풍경을 보다 보면 어느새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진다. 빠르게 지나치는 높은 빌딩, 거리에 키 높은 가로수,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이런 것들을 즐기는 소극적인 나의 멍 때리는 시간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화려한 가출의 공식은 우리 집인 경기도에서 고속도로를 경유한다. 서울 시내에 진입하게 되면 인사동을 거쳐 광화문을 통과해 서울역에서 회전해서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나는 가끔 인사동 근처인 조계사 정류장 앞에서 내린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는 조계사 마당에서 탑돌이를 하기도 하고, 법당 안에 들어가 삼배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나만의 치유 방법은 인사동 나들이다. 혼자 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좋다. 혼자 말없이 다니면 가끔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에 의해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내가 인사동을 좋아하는 이유는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있고, 작은 전시장에서부터 큰 갤러리가 있어서 언제든 선택적인 문화적 욕구를 채울 수 있어서다. 또 한 가지는 소소한 쇼핑을 할 수 있고, 한국적인 편안함을 주는 거리의 분위기가 친근감을 주어서 좋다.
나의 쇼핑은 고작해야 인사동에서 파는 저렴한 옷가지들이나 모자, 몇천 원짜리 덧버선들이 전부이다. 하지만 작은 쇼핑은 기분을 전환 시켜준다. 인사동 나들이를 하다 보면, 메마르고 푸석푸석했던 나의 정서가 다시 윤기가 도는 것 같다. 옹졸했던 마음이나 거칠어졌던 마음, 지친 마음들이 어느새 새순 돋듯 파릇파릇 내 안에서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언제나 잔잔하다. 내가 어떤 일로 마음이 허했는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내 마음의 무장은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어떠한 일로 인한 타인과의 관계는 대화가 필요하지만, 나 자신과의 대화는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병률 시인의 <혼자가 혼자에게>라는 산문집에서,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괜한 것의 무게로 욱신거려서 마음조차 허기질 때는, 아무 목적 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을 갔다가 얼마간을 거기에서 있다가 다시 같은 방법으로 되돌아왔다는 글을 읽었다. 나와 너무 똑같아서 동지 의식까지 느꼈다. 인간은 혼자 사색하게 되어 있는 동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혼자가 혼자에게 시간을 내주는 일은 어쩌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순간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각자가 외로운 동물이기에….
며칠 전에 인사동에 다녀왔다. 혼자서 밥을 먹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할 인사동표 면 실내화를 한 보따리 사서 왔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알록달록 예쁜 덧버선을 꺼내 보며 선물할 지인들의 얼굴을 하나둘 떠올리니 마음이 즐거워졌다. 마음이 퍽퍽할 때 누군가에게 작은 선물을 하는 것, 나만의 힐링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