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상호 Nov 12. 2019

구글은 미끼를 던졌고 누군가 덥석 물었다

알파인카운티 칼슨리버 온천

레이크타호 베이뷰캠핑장 뒷편 하이킹 루트.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푸름을 유리구슬 한 알에 가둬놓은 듯했다. 안 왔으면 안 왔지 한 번만 올 곳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크타 호는 세상 모든 푸름을 가둬놓은 듯했다. 안 왔으면 안 왔지 한 번 올 곳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아침 일찍 호수를 떠나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호수에서 남쪽으로 84km 떨어진 칼슨리버 온천(Carson River Hot Springs)이다. 행정구역상 캘리포니아주 마크리빌(Markleeville)에 있지만, 구글 지도는 우리를 시계 방향으로 빙 돌아 네바다주로 간 뒤 395번 하이웨이를 타고 내려가라고 안내했다. 


네바다주로 접어들자 우리를 처음 반긴 건 캘리포니아주보다 10~20%가량 저렴한 개스 값이었다. 미국에서는 휘발유를 ‘개스(Gas)’라고 말한다. 미국에 처음 와 주유소에 갔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 주유소 직원이 “개스 얼마나 넣을 거야”라고 묻자, “내 차는 가스차가 아니라 휘발유차야”라는 말이 목젖 끝까지 올라왔다.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19세기 말 영국 정유업체 페트롤리엄(Petroleum)이 석유를 대량 채굴하면서 석유 이름이 자연스럽게 기업명인 페트롤(Petrol)이 됐다. 반창고 계의 대일밴드 격이다. 그 뒤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연료에 관한 요구가 늘어나면서 낮은 온도에서도 폭발적으로 불이 붙는 '가솔린(Gasoline/Gas+ol(ol, 화합물)+ine(접미사))'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때 미국에서는 가솔린을 줄여 ‘개스’(Gas)라고 불렀다. 캘리포니아가 타주보다 개스값이 비싼 이유는 개스 업체간 가격 담합과 고가 송유관 관리 문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개스와 관련해 흥미로운 풍경이 또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전역에서는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폭발물인 휘발유를 다루지 못하도록 했다. 주유소 펌프 기술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이 일어나면서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업자들이 판매가를 낮추기 위해 직원을 해고하고 셀프 주유를 선언했다. 


하지만 오리건주와 뉴저지주에서는 주유원들이 일자리가 사라진다며 강력히 저항했다. 이 때문에 이들 주에서는 오랫동안 운전자가 셀프 주유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오리건주에서는 법령을 완화해 농촌 중심으로 셀프 주유가 서서히 실시되고 있지만, 주 내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주유원이 직접 주유한다.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은 주권자의 의지다.


네바다주를 관통하는 칼슨리버 


다시 온천 이야기. 우리는 향긋한 민트 향이 나는 세이지 브러쉬 덤불 지역과 키 큰 소나무 군락지, 황금빛 들판을 보며 395번 하이웨이를 달렸다. 한 시간쯤 지나자 길은 곧 비포장도로인 리바이어던 마인로드(Liviathan Mine Road)로 이어졌다. 리바이어던! 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이자, 토머스 홉스의 정치철학서 제목으로 막대한 권력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던가? 그것이 이번 여행의 위험을 알리는 첫 시그널이었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다.


리바이어던 마인로드를 따라 3km쯤 들어가자 갈림길이 나왔다. 좁고 거친 돌길이었다. 차로 들어가기 위험해 보였다. 우리는 온천까지 3시간가량 걷기로 했다. 배낭에 비상식량을 채워 걸어 들어갔다. 길을 잃을 것 같아 분홍색 노끈을 나무에 묶으며 걸었다. 20분쯤 걸었을까, 멀리서 내다본 길은 제법 고른 것 같았다. 일부 돌투성이 구간만 통과하면 차로 지나갈 만한 길이 이어질 것 같았다. 더욱이 신이라 불리는 구글이 안내한 도로 아닌가? 


칼슨리버 온천 가는 길. 땅이 마구 파헤쳐 있다.


부서진 돌을 피해 운전을 했다. 깡! 깡! 차량 하부가 돌에 부딪히는 파열음이 났지만, 왕년에 아버지를 따라 시골 뒷산 성묘길을 승용차로 올랐던 경험을 살려 요리조리 운전했다. 완만한 내리막길이었지만 길 상태는 점점 엉망이었다. 뾰족한 돌과 바위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더 들어가다간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결국 길섶에 차를 바짝 붙여 세웠다. 아내와 나는 다시 걷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온천까지는 걸어서 왕복 4시간. 온천을 하고 돌아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음주 운전하는 사륜구동 히피들


언덕을 타고, 냇물을 건너, 한 시간쯤 걸었을까. 뒤에서 사륜구동 지프차가 우리 가까이 달려왔다. 주저 없이 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다. 레이크타 호 인근 칼슨시티 출신 조와 세라 커플이었다. 그들도 칼슨리버 온천 쪽으로 간다고 했다.


“저기 길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 너희 거니? 와, 대단하다. 거기까지 운전을 했어?”
“응, 하지만 더는 운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차를 세우고 걷고 있어. 혹시 온천 가는 거면 태워줄 수 있어?”
“온천에서 너희 차까지 8마일(13km)은 넘을 건데 괜찮겠어? 걸어서 돌아갈 수 있어? 진짜?”
“그럼, 괜찮아.”


히치하이크해 준 조와 세라 커플. 사륜구동 차량이 강물을 건너고 있다.


조는 뒷좌석에 있던 짐 일부를 트렁크로 옮긴 뒤 우리를 차에 태웠다. 조와 세라는 칼슨리버 온천에 10번쯤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길을 몰라 3시간쯤 헤매기도 했단다. 조는 힙합 음악을 들으며 가수의 랩을 따라 덩실거렸다.


커플은 뒷좌석 우리 부부 사이에 있던 아이스박스에서 캔 맥주를 꺼내 달라고 한 뒤 술을 마시며 운전을 했다. 다 마신 캔은 구겨 조수석 바닥에다 투척했다.


“술 마셔도 운전은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 봬도 경험 많은 드라이버니까.”


금발 여성 세라는 음악에 맞춰 허스키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남자의 농담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조수석 대시보드에는 여자 젖꼭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조는 동생이 한국에서 8년 동안 영어 강사로 일했고 지금은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고 했다.


지프는 돌길, 모랫길, 가파른 언덕을 마구 달렸다. 70도가 넘어 보이는 급경사도 거미처럼 땅에 찰싹 붙어 넘어 버렸다. 바퀴가 낄 것 같은 대형 바위도 ‘여엉차’ 하고 타고 넘었다. 이곳을 내 승용차로 오려고 했다니 아찔했다. 온천 앞은 칼슨리버가 가로막고 있었다. 수위는 어른 허벅지 높이였다. 조는 잠시 멈춰 생각하더니 곧바로 강물을 거칠게 갈랐다.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끼야아!” 조 커플은 우리를 온천에서 내려준 뒤 가까이 있는 바니 캠핑장(Barney Campground)으로 이동했다.


칼슨리버를 내려다 보며 온천을 할 수 있다.
온천수가 칼슨리버로 바로 떨어진다. 아래에는 온천 폭포수가 있다.


카약커가 숨겨 둔 칼슨리버 온천


칼슨리버는 네바다주를 따라 세로로 330km 뻗어있다. 낙동강(510km)의 3분의 2 길이다. 캘리포니아주 알파인(Alphine)과 네바다주 더글라스(Douglas), 스토레이(Storey), 리온(lyon), 처칠(Churchill) 카운티 등 5개 카운티를 지난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마티스(Martis) 부족이 1만 2000년 전부터 강가에 살았다고 추정한다. 그 뒤 아메리카 원주민 와슈(Washoe) 부족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온천 가는 길 일부 구간이 와슈족 보호구역이다.


강 이름 칼슨은 탐험가 크리스토퍼 키트 칼슨(Christopher Kit Carson)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1844년 존 프레몬트(John C. Fremont) 탐험대를 도와 캘리포니아 황금 광산지대인 칼슨 패스(Carson Pass)를 개척했다. 그를 기려 칼슨 리버라고 부른다. 강 상류에서는 금과 은 등 광산 채굴이 활발했다. 그러다 수은 1400만 파운드가 자연에 그대로 드러나고 비소와 납이 동식물에 노출돼 환경 문제가 일어났다. 연방정부는 상류 일부 지역을 장기 독성 제거작업을 위한 국가 주요 목록(National Priorities List)에 올렸다.


온천수는 땅에서 솟아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뻗어 있다. 뜨거운 김이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칼슨 온천은 탕이 두 개다. 수온은 39.4도로 뜨끈뜨끈하다. 방문객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강가에 붙은 온천이다. 탕에 들어가면 5m 아래로 흐르는 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 온천수가 폭포처럼 강에 떨어지는데 강물에 몸을 담그고 온천 폭포 샤워를 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호텔 욕조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여기 왔더라면 대작 한 편을 더 남겼으리라.


이곳은 카약커들의 비밀 장소였다. 마크리빌(Markleeville) 행맨의 다리(Hanhman’s Bridge)에서 출발한 카약커들은 목적지 중간지점인 이곳에 멈춰 몸을 녹였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날렸다. 이제는 캠핑족에게 알려져 적지 않은 사람이 탐험을 즐기러 온다. 온천 주변에는 텐트를 칠 수 있는 캠핑장과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로도 있다.


거친 도로. 4륜구동 차량 마니아들이 집결하는 곳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악몽의 서사가 시작되다


갈 길이 먼 우리는 목욕을 빨리 마치고 발길을 돌렸다. 차로 왔던 굽은 길을 걸어서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뙤약볕에 얼굴과 목덜미가 붉게 타올랐다. 수건을 물에 적셔 목에 걸쳤다. 고요한 초원에 버려진 나무 창고만이 이정표 역할을 했다.


서너 번 쉬고 2시간 만에 차에 도착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날 로스앤젤레스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조바심이 나던 터였다. 먼저 차에 실어 놓은 아이스박스에서 콜라를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듯했다. 이제 집으로 가면 100점짜리 여행이다.


차를 돌려 가속 페달을 밟았다. 2km만 가면 평지가 나온다. 돌 튀는 소리가 여지없다. 몇 미터 가지 않아 엔진 오일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주황색 표시등이 계기판에 떴다. 엔진 오일이 부족한가 생각했다. ‘서둘러 나가 오일을 보충하자.’ 내려올 때 조금 애먹었던 경사길이 나왔다. 바퀴가 닿을 만한 돌을 골라 운전대를 돌린 뒤 가속 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그런데 바퀴가 헛돌고 먼지만 자욱이 날렸다.


길에 돌을 채워 단단하게 만들고 다시 전진했다. 또 바퀴가 헛돌았다. 이번엔 배터리에도 경고 표시가 떴다. '잠시 쉬었다 가자.' 시동을 끄고 핸드브레이크를 잠갔다. 다시 차량에 탑승. 그런데, 핸드브레이크가 풀리지 않았다. 이것을 풀기 위해 더 잡아당겼다. 더 꽉 잠겼다. 힘껏 더 ‘땅겼다’. 핸드브레이크 각도가 거의 80도 가까이 올라왔다. 차에 내려 차량 하부를 살폈다. 엔진오일 탱크가 터져 바닥에 오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꿈이기를.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자칫 야산에서 차가운 밤을 맞이할 수도 있다. 아내가 카메라와 노트북 등 귀중품을 챙겼다. 나는 아이스박스에 남아 있던 물과 간식을 모조리 가방에 옮겨 넣었다. 20분쯤 걸어 나가니 산악도로에서 일반 시골길로 나왔다. 겨우 걸어서 20분이다. 그 시간을 아끼려고 차를 끌고 들어갔다 이 사달을 낸 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아내가 지쳐 쓰러졌다. 버려진 트레일러가 그늘을 만들어줬다.


오후 4시 40분


자책할 여유가 없다.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차를 견인해야 한다. 내 차가 길을 막고 있어 캠핑족들이 산에 갇힐 수도 있다. 하지만 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인터넷이 될 리 만무했다. 911로 전화해 구조 요청을 했다. 전화를 받은 여성 대원은 조난 장소가 네바다와 캘리포니아 경계 지역이라 어디 부서를 출동시킬지 알아봐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도 관할구역을 따지는구나. 대원은 견인차도 수소문해서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때가 오후 4시 40분쯤이었다. 이때부터 시계가 여행을 통제했다.


오후 5시 20분 


우리는 버려진 트레일러가 만든 그늘에 누웠다. 파리가 윙윙거리며 귀찮게 했다. 물은 200mL 생수 2개가 전부였다. 로스앤젤레스 한인마트에서 사 온 커피 우유를 먼저 나눠 마셨다. 30분이 지나도 구조대에서 연락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911 대원은 주변에 견인차가 없어 대도시인 리노(Reno)에서 견인차 한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도시였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더 기다렸다.


오후 5시 40분


트레일러 그늘은 점점 길어졌다. 우리가 911에 전화 거는 빈도는 더 빨라졌다. 다시 전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아내가 시킨 대로 말했다. “우리 너무 지쳤어. 이제 마실 물도 거의 다 떨어졌어. 아내는 탈진상태야.” 그제야 구조대는 경찰을 우리가 있는 곳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오후 6시 20분

하늘색은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공기는 차가워졌다. 40분이나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땅에 귀를 대고 차 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마저 차 오는 소리로 들렸다. 전화를 걸어 우리 상태를 또 강조했다. 영어 실력이 팍팍 느는 듯한 신묘함을 느꼈다.


오후 6시 40분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도로로 나가 차가 오나 살폈다. 그때 더글라스 카운티 셰리프국 문양이 박힌 에스유브이 차량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서전트 론 밀러는 친절히 물부터 건네주었다. 밀러는 “나도 부산에 여행 간 적 있어, 한국 사람들 참 친절하고 좋았어”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뻔한 대사지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를 가까운 호텔로 안내했다. 이동중에도 견인차 업체를 수소문해 줬다. 알고 보니 리노에서 출발했다는 견인차는 비용이 많이 든다며 출발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론에게 캠핑장에 서너 명이 있는데 내 차가 길을 막고 있어 못 나올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일 오전 8시부터 견인차 업체가 영업을 시작해 그때 업체로 전화하라고 했다. 그전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나 때문에 야산에서 인생의 가장 끔찍한 시간을 보낼지 모른다. ‘세계 일류 국가’의 긴급 상황 대처 시스템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론에게 렌트카 업체 전화번호를 받아 다시 걸었지만 그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더글라스카운티 셰리프가 출동해 우리를 구조했다.



이튿날 새벽 2시

차 때문에 걱정이 돼 한 시간에 한 번 잠에서 깼다. 아내는 곤히 잔다. 혼자서 온갖 상상을 했다. 곰이 나타나 내 차를 마구 부수는 건 아닐까? 어느 여행자가 고립돼 차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건 아닐까? 나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나에게 고소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경찰서로 연행된 뒤 교도소로 가는가? 그 뒤 한국으로 추방. 오전 8시가 참 더디게 찾아왔다.


견인차도 못 꺼낸 조난 차량


오전 8시

시계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전 8시가 되자마자 견인차 업체에 전화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차를 보내겠다고 한다. 혹시 몰라 견인 차량 운전자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오전 8시 30분

기다리다 못해 견인차 운전자에게 전화했다. 그는 사고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며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차가 거기 있는데 어떻게 가냐고 했다. 시골이라 전화도 잘 안 터지고 택시나 우버도 흔하지 않았다. 운전사는 나는 모르겠으니 업체로 연락하라고 했다. 어휴, 이것이 미국 서비스 수준이다. 다시 업체에 전화했다.


오전 8시 50분

호텔 조식을 먹고 있는데 견인차 운전사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고 전화했다. 아내가 허겁지겁 호텔 방에 올라가 짐을 챙겨 내려왔다. 30분 달려 현장에 도착했다. 운전사 알렉산더는 길을 보더니, 너무 좁아 자기 차로는 접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근 업체에 전화를 돌려 소형 지프를 찾기 시작했다. 대여섯 군데 전화했지만 소형 지프가 고장이거나 아예 없다고 했다. 한 업체에서만 수소문하겠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참 길을 바라보던 알렉산더는 한번 시도해 보자고 했다. 그는 차량을 끌고 길에 진입했다. 100m쯤 갔을까? 그는 다시 길을 빤히 보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며 차를 뺐다. 알렉산더는 우리를 마을 렌터카 업체로 안내했다. 난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심정으로 애원했다. “그냥 가지 마라. 견인차 업체를 확실히 연결해주든지, 끝까지 도와주고 가라.” 안구가 반짝거릴 정도로 감정을 실어 말했다.


오전 10시
 
렌터카 업체에서 차를 빌리고 있는데 알렉산더가 한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근처 차량 정비소인데 기술자 한 명이 소형 지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지프가 차를 큰길로 꺼내면 자기 회사에서 다시 나와 차를 실어가겠다고 말했다. 정말 고마웠다. 때땡큐!


오전 11시
 
알렉산더가 알려준 차량 정비소로 가 40분 정도 기다렸더니 차체를 한껏 높인 누런 2인승 지프가 도착했다. 오른쪽 팔뚝에 마을 이름인 ‘민든(Minden)’을 문신한 토박이 청년 로버트였다. 로버트는 나를 태워 사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지프 속도는 경운기와 경차 중간 수준이었다. 로버트는 나를 별종처럼 바라봤다. 


“여기 온천을 어떻게 알았어? 나는 4살 때 가보고 안 가봤어.” 


로버트가 수동으로 차량 기어를 파킹에서 중립으로 바꾸고 있다.


오전 11시 30분

현장 도착. 로버트는 차를 세운 뒤, 지프의 바퀴 바람을 뺐다. 딱딱했던 바퀴가 물놀이용 튜브처럼 물컹물컹해졌다. 차는 오프로드 길을 ‘투당’거리며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가 보였다. 외로이 산길에 방치돼 있었다.

그런데 내 차량의 배터리가 방전돼 트렁크가 열리지 않았다. 트렁크에는 심지어 열쇠 구멍도 없었다. 차 트렁크에서 지프와 연결할 수 있는 견인용 훅을 꺼내야 했다. 로버트는 이리저리 헤매다 뒷좌석을 어렵게 열어 트렁크로 긴 막대를 집어넣은 뒤 수동으로 트렁크를 열었다.

낮 12시

이만하면 됐다. 이제 차만 꺼내면 끝이다. 로버트가 보닛을 열어 맨손으로 기어를 중립으로 바꿨다. 그런데, 핸드브레이크가 풀리지 않았다. 로버트는 핸드브레이크를 잡아당기고 드라이버를 쑤셔 봤지만 풀리지 않았다. 핸드브레이크가 잡혀 있으면 차를 견인해도 바퀴가 굴러가지 않는다. 로버트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 망할 놈의 폭스바겐! 안전모드가 걸린 건가? 아주 긴 여행이 되겠는데.”


소형 지프가 내 차 멱살을 붙잡듯, 끌고 무작정 달렸다. 나는 내 차에 타 운전대를 돌리며 방향을 잡았다. 바퀴가 굴러가지 않아 먼지가 휘날렸다. 큰 돌을 피하려고 운전대를 조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 하부가 깨지는 진동이 내 뼈까지 울렸다.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피식하는 소리가 났다. 백미러로 보니 왼쪽 뒷바퀴가 터졌다. ‘이제 좀 멈춰’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일단 빠져나와야 했다.


낮 1시 20분


로버트는 600m쯤 달린 뒤 잠시 쉬자고 했다. 그는 군대 전투식량처럼 생긴 일회용 음식을 꺼내 수저로 퍼먹었다. 나에게도 권했지만 식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얼음물만 얻어 마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은 일반 차량이 오지 못하는 길이었다. 사륜구동, 그것도 차체가 높은 차량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마저도 비가 오거나 눈이 녹을 때는 사륜구동도 오지 못하는 길이었다. 이곳을 건너다 사고가 난 영상을 유튜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구글 지도는 거기까지 상세히 안내하지 않았다. 우리는 구글이 만능이라 믿었고, 그것이 발목을 찍은 것이었다.


오후 2시


차량을 드디어 시골 흙길로 끌어냈다. 뒷바퀴 두 개는 갈가리 찢어져 걸레가 돼 있었다. 차량 하부는 내려앉았고 차체도 돌에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이만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폭스바겐에서 리스한 차여서 어찌 됐건 1년 반 뒤에 반납해야 할 차였다. 차에도 감정이 있을까? 처참해진 차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차를 도로에 끌어 놓은 뒤 나는 다시 소형 지프차를 타고 차량 정비소로 돌아갔다. 로버트에게 300달러를 냈다.


오후 4시


아내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욕이 없어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를 시켰다. 시간이 좀 지나자 정비소에서 대형 트레일러가 준비됐다며 차량이 있는 장소로 가라고 했다. 알렉산더가 일하던 업체에서 대형 트레일러를 현장에 보낸 것이다. 현장에 다시 도착. 트레일러 운전사도 내 차의 핸드브레이크를 풀려고 날카로운 것으로 쑤셨지만 실패했다. 또 억지로 차량을 잡아 트레일러로 끌어 올렸다. 이 업체에도 300달러를 지불했다.


타이어 휠까지 구겨졌다. 차는 일주일 뒤 엔진까지 망가졌다는 진단 받고 폐차됐다.


작가의 이전글 마크 트웨인의 치유 온천서 곰에게 당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