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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B Sep 17. 2021

셀카에는 배경이 없다

카공족 단상

오랜만에 카페에 왔다. 카페 풍속도가 많이 바뀐 듯하다. 둘러보니 나처럼 혼자서 노트북이나 책, 교재 등을 펼쳐놓고 열심히 뭔가를 하는 카공족이 눈에 띈다. 오늘 유독 눈에 띄는 한 가족이 있다. 엄마는 책을 펴서 읽고 있고, 아빠는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다. 7살 전후로 보이는 딸과 아들 귀에는 각각 헤드셋이 장착되어 있고, 눈으로는 태블릿 PC 영상을 쫓으며 키득대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혼족들이 늘고, 가족들마저도 각자만의 놀이에 빠져 열심히 병행 놀이를 하고 있는 듯한 풍경이 흔한 풍경이 된 듯하다.  글쓰기 친구 이레네가 카톡을 보내왔다. 과학자 정재승 ‘셀카에는 배경이 없다’는 발췌문이다. 묘한 타이밍이다.      



셀카에는 배경이 없다     
‘기술이 인간을 바꾼다’는 테제의 유용한 예, 그러나 셀카가 ‘정직한 삶의 기록’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21세기 대한민국은 ‘외로움’이 일상화된 시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의 35%는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며,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의 41%는 친구 없이 홀로 길을 나선 이들이다. 이 같은 추세라면 2030년에는 도시에 사는 젊은이의 60%가 형제 없이 자라고, 20대의 55%는 부모와 떨어져 혼자 생활을 하게 될 전망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혼자서도 재미있게 노는 법’이 인기다. 인터넷에 올라온 온갖 종류의 ‘혼자 노는 법’에 놀라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셀카는 ‘혼자 놀기의 진수’! 인터넷 서핑과 컴퓨터 게임, 웹툰과 더불어, 아인슈타인의 ‘일상적 상대성이론’(시간의 속도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을 체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시간 죽이기’ 문화다.      


이 글을 보니, 초등학교 5학년이던 큰 딸과 유럽여행을 갔을 때 셀카를 가지고 한참 싸웠던 기억이 난다. 한창 스마트폰에 빠져있던 큰 딸은 지금 자신이 여행 중인 곳이 유럽이라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럽 여행 중이라는 사실보다는 자기 얼굴을 예쁘게 찍어주는 왜곡된 신기술에 빠져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상태였다.      


딸은 자기 얼굴을 찍어대기 바빴다. 셀카로 자기 자신만을 담기에 바빴다. 역사적인 배경도 엄마 모습을 찍어달라는 요청도 그저 귀찮은 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달랐다. 여기는 유럽이고, 역사적인 장소이며 방문지 하나 풍경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었다. 셀카 대 배경 사진의 한판 승부. 결국 두 욕망이 부딪쳐 파리 한 복판에서 목소리 높여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불만을 터뜨렸었다. 딸은 엄마 때문에 여행 일정의 대부분을 사진 찍느라 늦춰지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여기가 어디든 상관없이 찍어대는 딸의 셀카 질이 못내 못마땅했다.     


좋은 것도 알고 생각할 줄 알아야 볼 줄 아는 눈이 생기는 법. 그런 느낌이 올 때 함께 여행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딸이 너무 어릴 때 유럽에 가서 뭣도 모르고 일생에 한번뿐일지도 모를 여행을 흘려보낸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사춘기 땐 자기 자신에 빠지는 게 당연한 것. 자기 자신이 그 누구보다 중요했던 시기였기에, 외부세계로 눈 돌릴 여유가 없었던 거라는 이해도 된다.      


이제 큰 딸은 어엿한 고등학생이다. 여행 당시 봤던 미술관과 박물관의 흔적들을 역사책에서 확인할 때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요즘에 와서야 다시 유럽에 간다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눈에 담아 올 거라고 한다. 이제는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유행으로 배낭 메고 외국 여행 다니는 게 쉽지 않아 졌지만, 그래도 그런 자유로운 시선으로 여행할 딸아이의 모습도 기대가 된다.      


셀카에는 배경이 없다. 그건 욕망의 기록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나도 종종 미친 듯이 셀카를 찍어댈 때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나를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다. 현실은 초라할 뿐이니 그런 판타지 속에서 시간 죽이기를 한다. 요즘은 더 예쁘게 실물과 다르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는 앱도 많고 카메라 기술도 더 많은 발전이 있어서 그런지 모두들 자기만의 세상, 자기만의 손바닥 스마트폰 세상 속에 갇혀 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진 빨, 조명 빨, 화장 빨, 스마트폰 빨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빠져 있다. 초라한 현실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며 사는 삶이 정직한 삶이고 허황됨에 빠지지 않는 길이 아닐까? 보이는 모습보다는 내 안에 채워지는 단단한 것들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기를 바라본다.      


각자의 병행 놀이에 빠져 사는 세상, 외로움이 일상이 된 세상의 풍경. 이 글을 쓰는 카페에서도 여전히 외로운 혼자들이 와서 혼자만의 성을 짓고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래도 씩씩한 혼자들이 또 다른 혼자를 만나면 마음의 문을 열 때 조금은 그 외로움을 읽어내는데 선수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자신이 혼자였기에 혼자서 놀아봤기에, 그 편리한 공허함 속에 있어봤기에, 관계에 대한 성찰과 공감이 빠르게 일어날 수 있다고 뒤집어서도 생각해본다. 나는 갈수록 세상의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엔트로피 이론보다는 언제나 자정작용이 일어나 지구는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가이아 이론을 더 좋아한다. 아니 가이아 이론을 더 믿고 싶은 것이다. 홀로 선 고독(solitary)이 여럿이 함께 하는 연대(solidarity)를 만들어 낼 거라고 믿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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