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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May 01. 2023

우리 엄마 김용주

누군가가 불러줘야 할 우리 엄마의 이름, 김용주 님 

돌이켜보면 한 순간도 기적이 아닌 순간들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와 함께 지낸 순간들은.


기억도 나지 않은 내가 태어난 날이 이미 기적이었을 것이고, 내가 걷거나 뛰었던 날도 엄마에겐 기적이었을 것이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는 것, 그렇게 생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이미 기적인 것이다.


엄마는 아침마다 청소기를 돌린 후 커피물을 올리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탄 후 LP판을 틀었다. 거의 매일 아침은 배인숙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로 시작되었다. 커피향이 가득한 거실에서 전축으로 듣는 배인숙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절하고, 어딘가 조금 쓸쓸했다. 엄마의 인생처럼 또는 우리들의 인생처럼 말이다.


나는 가끔 노래방에 가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부른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마주보며 속삭이던 지난날의 얼굴들이 꽃잎처럼 펼쳐져간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사가 또 있을까. 지난날의 얼굴들이 꽃잎처럼 펼쳐져간다라니! 그 감성적인 가사에 놀라며, 우리 곁에서 사라져간 사람들, 특히나 엄마의 얼굴을 떠올린다.


엄마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우리집에는 LP판들이 가득했으며, 청바지를 즐겨입었다. 엄마는 7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그 시절 청춘의 상징은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였다. 엄마의 깊은 청바지 사랑은 무려 40년에 가까웠고, 나팔바지가 디스코바지가 되고 일자 바지가 되고 스키니진이 되는 그 모든 유행을 엄마는 보고 경험했다. 청바지를 마주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그 시절 패션리더였던 엄마는 명동에서 모델로 스카웃되기도 헀고, 아빠와 아빠 친구와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며 맥주로 머리를 탈색하는 기행으로 금발 머리를 자랑하기도 했다. 통굽 신발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서울을 활보했을, 아직 엄마가 아닌, 20대의 그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가진 사람이었을까? 


나는 엄마에게 고마우면서도 그녀가 엄마란 사실에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그 밝은 미래에 나는 과연 보탬이 되었을까, 발목을 잡았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나 선택은 무를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우리는 엄마와 딸로, 최선을 다하면 사는 것을 택했고, 나는 딸로 엄마는 엄마로 열심히 살았을 게 분명하다.


청바지를 입고 마트에 가면 가족을 위해 무거운 짐도 마다하고 장을 보던 엄마를 고교생인 나는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그걸 누가 다 먹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정작 그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어치우는 사람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이제 엄마가 된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양손 가득 식재료를 사온다. 그런 내 자신을 미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마는 나에게 어디에 있든 어떤 순간이든 당당하라고 했다. 당당한 자세로 말하고 주눅들지 말라고 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선 제대로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정정당당하게 걷는 자만이 타인 앞에서 실로 당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에 비추어 봤을 때 정의로운 자가 되라고 엄마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가 암을 선고 받은 것은 2010년이었다. 그리고 2011년 9월 어느 새벽 의사는 덥수룩한 머리로 엄마 병실을 찾아와 초점도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임종하셨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졌다. 엄마가 그토록 기다리던 가을은 아직 문턱에도 닿지 못한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예순 둘의 생일도 코 앞이었다. 가을과 생일, 그 둘 중 하나라도 찾아오길 기대했지만 순식간에 죽음이 먼저 당도해 버렸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나의 소중한 우리 엄마는 이제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또다른 형태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아스트리트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꺼내본다. 이미 죽은 두 형제는 또다른 세상인 낭기열라와 낭길리마에서 피터지는 모험에 빠져든다. 죽은 후의 세계에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있으며 두 형제는 용감하게 싸운다. 초등학교 시절, 이 책을 읽은 나는 죽음 후에 있는 것이 천국이나 지옥이 아니라 다른 세상, 그것도 모험이 가능한 세상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고, 죽음에 대한 린드그렌의 해석에 경이를 표했다. 엄마가 낭기열라나 낭길리마처럼 생생한 또다른 세상에서 엄마만의 청바지를 입고,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는 그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엄마를 만나 나도 청바지를 입고 커피를 마시며,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꼭 같이 듣고 싶다. 이승에서 다 하지 못한 것을 다른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가 남기고 간 것, 그것은 후회없이 살라는 조언이다. 

민정아, 너의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라. 부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행하거라. 

우리가 언젠가 만났을 때 네가 행복하길 바라고, 우리가 만나지 못하더라도 행복하길 바란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늘 엄마가 보고 싶다. 나의 엄마는 참으로 멋진 사람이었고 나는 아무래도 엄마같은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다.

인생은 참 빠르게 흘러가고,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그 중 최상의 난이도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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