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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자의 배려와 품격

침묵할 때 더 명확해지는 것들


20년도 더 된, 독일 베를린에서 TFH Berlin 공대를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산업공학을 전공하면서도 3D 디자인 랩실에서 3D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참고로 독일 국립대는 학비가 없기에 생활비만 마련하면 된다. 독일은 당시에 이미 3D로 큰 공장 기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나는 운이 좋게 3D 디자이너 일을 하면서 기계 팔다리(자동차 회사 기계)를 만드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 커리어를 지속했다면 아마 내가 국내 1세대 3D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긴 하다.. 이렇게 큰 산업이 될 줄이야...


아무튼 그때 프랑크푸르트에 '세계 기계 박람회(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가 있어서 출장을 갔다가 밤늦게 다시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 올라올 때의 일이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날 밤의 경험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고속으로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마침내 멈춰 섰고, 승무원들이 급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나에게 신기했던 것은 승객들 중 누구도 동요하거나 승무원에게 무슨 일이냐 물어보지 않는다는 거다. 승객들은 바빠 보이는 승무원을 방해하지도 않고 묵묵히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나만 이렇게 궁금하고 불안한가... 하는 생각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안내 방송이 나왔다.


'누군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혹 몸이 불편하거나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등 긴급하게 움직여야 하는 승객이 있다면 승무원에게 말해달라. 그리고 지금 응급차가 오고 있는데 기관사를 이송해야 하니 모두 자리에서 기다려 달라. '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기관사를 이송한다고? 지금 승객과 기차를 두고 기관사가 가버린다고?? 승객보다 기관사가 우선이라고? 나만 이게 이렇게 이상한가..?? 이 안내 방송 후에도 승객 중 그 누구도 동요하거나 밖을 내다보거나 불평을 터트리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내 맞은편에 앉은 승객은 아무 일 없는 듯 처음 그대로 책만 읽고 있었다.



몇 해 전, 다큐멘터리인지 어떤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지하철에 뛰어드는 사고를 경험한 우리나라 기관사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사고 당시 선로에 뛰어드는 사람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순간의 트라우마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더 한 것은 사고 직후에도 상황을 수습하고 그 기차를 그대로 종점까지 다시 운행해한다며 정신적인 어려움 호소했다. 그 순간 나의 기억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독일에서의 기차 사고 날을 떠올렸다.


독일 사회 시스템은 그런 사고 상황에서 긴급 이송해서 치료하고 보호해야 할 사람을, 사고의 전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충격에 휩싸인 기관사라 판단했다. 그러기에 그를 최우선으로 병원으로 옮겼고, 다른 승무원들은 정해진 룰대로 상황에 대처했고, 승객들은 그들이 그들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나를 포함한 승객들은 어찌 되었냐고? 약 1시간 후에 뒤에 오던 다른 기차가 옆 선로에 섰고, 문과 문 사이에 발판을 연결해 옆 기차로 옮겨 탔다. 추가로 탄 우리에게 당연히 자리는 없었고, 몇 시간을 서서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참고로, 뒤에 다른 기차가 계속 왔지만, 상황 수습 때문에 우리 기차에 접근할 수가 없어 1시간 후의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우리나라도 지금의 기관사들의 상황은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기관사를 책임자가 아닌 가장 배려해야 할 대상(피해자)으로 대우하는 상황까지는 아닐 것 같다만.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준비한다 해도 가끔은 어떤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지만 인간사에 그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은 계속 있었다. 그럴 때 누구의 권리가 우선이고, 누구의 잘못이 더 크고, 누구의 피해가 더 크다고 목소리 높이는 대신,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그 침묵 속에서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의 권리가 우선이고, 누구의 잘못이 크고,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지. 어두운 곳에서는 작은 불빛도 선명하게 보이듯, 조용한 시간 속에 머무르면 무엇이 중요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명확해진다.


어두운 곳에서는
작은 불빛도 선명하게 보이듯,
조용한 시간 속에 머무르면
무엇이 중요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명확해진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이 지독한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음을 고백하며, 주위의 '힘내, 라는 말에 화가 난다. 이런 내가 이상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걸 들은 신경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가 '힘내, 라는 말에 화가 날 수 있다'며 공감해 주었다. 너무 힘든 사람에게 '이럴 땐 이렇게 해, 또는 힘내'와 같은 섣부른 해결책 제시나 응원은 더 상황을 악화시킨다며. 조용히 함께 있어 주며 바라봐 주는 것이 더 나은 위로와 응원이 될 수도 있다며.


지금,


조용한 배려와 품격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부터 오늘은 좀 더 조용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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