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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Apr 23. 2017

에피쿠로스 스쿨

Epicuros School

1.


서른 다섯 살 에피쿠로스가 아테네에 연 학교는 하나의 숲이었다. 에피쿠로스 정원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여성과 노예도 학생이 될 수 있었다. 에피쿠로스 정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마음의 흔들림, 죽음, 신의 처벌 등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요일, 경기도 일동의 온천 가는 길에 들른 서점에서 고른 책 '쾌락 / 에피쿠로스'의 첫 장은 '키리아이 독사이'(중요한 가르침)이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조목조목 정리해놓은 것이다. 나는 자스민향이 나는 인조동굴의 온천에 앉아 그 1절을 읽는다.

"축복 받았으며 불멸하는 본성은 그 스스로 어떤 고통도 모르며, 다른 것들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 본성은 분노나 호의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나 호의는 단지 약한 것들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매력적인 귀절은 신의 분노를 부정하는 말이다. 축복 받았으며 불멸하는 것이란 바로 신이다. 신은 그 자신 고통이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타자를 고통스럽게 할 까닭이 없다. 그런 신이 과연 인간을 향해 분노하고 그에게 괴로움을 줄까? 그건 지나치게 인간적인 상상력이다. 만약 신이 누군가를 더 좋아하고 누군가를 더 미워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그런 호오(好惡)는 인간처럼 약한 존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신이 자신을 미워하여 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넌센스다. 누가 이런 넌센스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이런 논리로 인간을 억압할 필요가 있는 어떤 지식 집단이다. 에피쿠로스 스쿨은 바로 이런 종교적 억압의 장치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2절을 읽는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이번엔 죽음에 관해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에피쿠로스는 당시 유행하던 변론의 기법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죽음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은 인간은 죽어버렸기 때문이며 산 인간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는 행위는 살아있는 자의 인식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살아있는 존재에게 다가올 수 없는 것이며, 죽어있는 존재는 그 죽음을 느낄 수 없으니, 죽음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죽음을 느낄 수 없으므로, 죽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혹은 죽음에 관한 상상과 개념들을 대하면서 우린 필요 이상으로 죽음에 대해 큰 공포를 느낀다. 에피쿠로스는 이 문제를 저 유명한 논증으로 해결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죽음을 겁내지 말라. 죽음을 겁내는 것은 산 사람의 이성이다. 산 사람은 죽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은 이성이 없으므로, 다만 두려움은 죽음을 연역하고 상상하고 과장하여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나를 설득시키는 것 같진 않지만 논리는 명쾌하다. 죽는다고 쫄지마라. 죽으면 죽은 것도 모른다. 재미있지 않는가?

그 3절을 읽는다.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육체나 마음의 고통이 없으며 양자 모두의 고통도 없다."

쾌락과 고통을 기발하게, 그리고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을 하고 있다. 쾌락이란 뭔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통이 제거되어가면서 서서히 쾌락이 커지기 시작한다. 고통이 완전히 제거되어 전혀 무통의 상황이 되는 그때가 쾌락의 절정이다. 새로운 쾌락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제로인 상태일 뿐이다. 이 생각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이 된다. 인간의 쾌락의 허상을 가지고 있다. 뭔가 새로운 쾌락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과도한 욕망과 격정에서 해방되는 것, 그것을 그는 아타락시아라 부른다. 아타락시아, 마음의 평안이다. 쾌락이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 관점으로 보면, 쾌락을 느끼는 일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쾌락이 느껴진다면 이미 그 쾌락 속에선 고통이 사라진 것이다. 쾌락을 적극적으로 느끼면 느낄 수록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딱 석 줄 읽었지만, 뭔가 묵직한 것이 지나간다. 온탕에 멍하니 앉아 뺨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느낀다. 일요일 대중목욕탕의 소음이 잠시 사라지고 고요와 텅빈 생각이 들어와 앉는다. 에피쿠로스 스쿨은 그후 약 6백년을 더 지속하였다. 장자와 따져보니 에피쿠로스는 그보다 스물 여덟살이 아래다. 하지만 거의 동시대 사람이며 생애 기간을 따지면 겹친다. 장자가 은일의 삶을 주장했을 때 에피쿠로스는 빵과 물만으로 살아가는 생활에 만족하고 공공생활을 피해 숨어사는 철학을 강론하고 있었다. 명예, 돈, 섹스에 미쳐 사는 생활의 헛됨을 직시하고, 그런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며 안빈하는 삶을 제안하고 있었다. 흥미롭다. 이거 갑자기 웬 떡인가. 


2.


에피쿠로스, 이 친구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거창한 상상력과 이론들, 인간이 잘 모르기 때문에 믿어 의심치 않아 왔던 것들을 치밀하게 반성하고 회의하는 태도가 딱 내 타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고한 이데올로기가 되어있는 것들을 의심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주 반사회적인 인간으로 찍히기 쉬운데, 그 까닭은 믿을 만한 가치의 중심을 자기로 삼기 때문에 에고가 강해보이고 비타협적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에피쿠로스 스쿨이 망한 이유도, 로마 제정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려할 때 이 집단의 자족주의(自足主義)가 못마땅했던 데 있다. 종교도 이 스쿨의 몰락에 한몫 한다. 기독교는 비슷한 생활 양상을 추구하고 있으나, 근본이 어쩐지 천박해보이는 이 집단을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분노와, 그것을 특별한 사람에 한해 사면해주는 제한된 사랑을 선교의 무기로 삼아온 종교가, 신의 분노와 사랑 따위는 가짜라고 말하는 저 에피쿠로스를 어찌 받아들여주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이 자의 무해한(그는 전쟁과 과욕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고요히 은둔하여 몇몇이 서로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을 권한다.) 공동체 이상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에피쿠로스 헌장이란 게 없었겠지만, 내가 한번 만들어 볼까?

제 1조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이다. 쾌락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지, 그것을 넘어선 과욕이 아니다. 명예욕, 금전욕, 음욕(淫慾)은 쾌락이긴 하지만 이 쾌락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이미 쾌락의 자격을 잃은 것들이다. 쾌락은 마음 속의 고통을 깨끗이 비워내는 평온과 안락의 상태여야 한다.

제 2조 공공생활의 잡답(雜踏)은 순수하고 담백한 쾌락을 즐기는데 큰 방해가 된다. 우선 인간을 억압하는 많은 사회적 시스템이 있고 이념적 장치들이 있다. 게다가 별로 필요도 없는 허접한 일들을 처리하는데 애를 쓰고 공을 들이다가 정작 필요한 쾌락을 즐길 여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니 열심히 노가다해온 그대여, 떠나라. 그리고 숨어서 고요히 생활하라. 사람들은 부와 명예가 그를 모든 불쾌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헛꿈이다. 불쾌로부터 가장 안전한 것은 고요히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는 일이다.

제 3조 단순한 생활을 하라. 가짜 식욕을 경계하라.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식사 외에는 하지 말라. 빵 몇 조각, 물 몇 모금이면 충분하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욕망은 가짜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일단 없어지면 육체적 쾌락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먹나? 그 때의 욕망은 쾌락의 형태를 바꿔서 지속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본능적인 욕망이 아니고, 정신이 만들어낸 것이며 사실상 생활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사회적 가치와 과시를 위해 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제 4조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지레 겁먹고 그것에 고개 숙이지 말라. 특히 운명이라든가 저주라든가 신의 분노 따위는 헛된 것이다. 그것에 마음 흔들려 정작 일상의 작은 기쁨들을 놓치거나 포기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자신의 기쁨을 미신에 헌납하지 말아라.

제 5조 거대한 사랑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아라. 구체적인 연대가 중요하다. 그걸 우린 우정이라 부른다. 작은 공동체 속에서 믿음과 배려로 이뤄진 존재들이 서로 힘을 협력하여 서로의 쾌락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중요하다. 일생 동안의 축복을 만들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을 지니는 것이다. 돈과 명예가 불쾌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지속적으로 우정이 기쁨을 지켜준다. 우정은 가장 확실한 쾌락의 보험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빈섬이란 자가 추후에 다시 열심히 썰을 풀 것으로 알고 있다.

제 6조  네게서 일어나는 욕망을 살펴라. 그것들 중에는 가짜가 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바로 고통으로 변하지 않는 욕망은 필연적인 게 아니란 뜻이다. 이런 욕망들은 쉽게 포기할 수 있다. 그 욕망의 대상을 얻기 어렵거나 그런 욕망이 고통을 야기할 때 곧 그만 두게 된다. 이런 욕망에 집착하는 것은 그 욕망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 

제 7조 모든 감각은 옳다. 그 감각의 일부가 틀렸거나 전부가 틀렸다고 말하는 주장은 옳지 않다. 감각은 최소한 근거없는 추측들 보다는 낫다. 아직 확증을 잡지 못한 감각이 있을 수 있다. 이를 테면 멀리서 보는 물체가 둥글게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마름모꼴이었다고 할 때, 멀리서 본 감각은 옳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다만 멀리서 보이는 감각으로 인정해야 한다. 원경과 근경의 두 가지 감각은 모두 옳다. 오히려 옳지 않은 것은, 가까이서 본 마름모꼴을 적용해서, 멀리서 볼 때 보이는 둥근 형상을 마름모꼴로 규정하는 것이야 말로 옳지 않다. 감각에 충실한 것은 가짜 이론들과 허상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준다.

제 8조 인생은 유한하다. 그러나 그 인생이 누리는 쾌락의 양은 반드시 무한이 유한보다 많은 것은 아니다. 육체는 쾌락의 한계가 무한하다고 생각하며, 무한한 쾌락을 공급하기 위해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찰은 육체의 한계를 계산하고 그 안에서 완전한 삶을 제공해줄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죽어간 사람이 아직도 즐기지 못한 쾌락이 있어서 아쉽다는 건 넌센스다. 

제 9조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제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결핍을 없애는 일 만으로 만족하는 일은 삶 전체를 완전하게 만든다. 경쟁이란 행위는 쾌락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 쾌락을 낳는 가능성이나 상상력을 위해 애쓰는 노력이다. 쾌락의 소박함을 아는 자는 결코 경쟁할 필요가 없다. 

제 10조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살 수는 없다.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서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 수는 없다. 최소한 사려깊게 사는 일의 잣대와 아름답게 사는 일의 기준과 정직하게 사는 일의 척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없다. 

휴우. 헌장을 만들기도 쉽지 않구먼. 어쨌거나 에피쿠로스에 얼마나 다가갔는지 모르지만, 그의 명쾌해보이는 생각들 중에서 고르고 입맛대로 정리했다. 도봉산 아래 학교를 내고, 에피쿠르스 스쿨이란 간판을 달아 내걸면, 이 자식들 음란사교 조직이라고 대번 당국에서 조사 나올까? 그 스쿨 정문에 저 헌장 10조를 딱 걸어놓으면 당국에서 상당히 헷갈려 하면서 저 문구들을 연구하느라 골머리 깨나 앓을까? 걱정마라. 당국이여. 당분간 재정 문제로 스쿨 개교는 미룰 작정이니까.


3.


에피쿠로스는 BC341년 1월 하순경에 사모스라는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이 해는 플라톤이 죽은 지 7년이 흐른 뒤였다. 사모스는 아테네인들이 개척한 변경 지역이었다. 그는 18세 때 아테네로 왔다. 이때는 플라톤의 친구였던 크세노크라테스가 아카데미아 교장을 맡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칼키스란 곳에 있었다. 크세노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주류 지식인들이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그들의 철학을 배우고 연구하며 자란 세대다. 그런데 이 무렵 아테네인들이 페르디카인들에 의해 사모스에서 축출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에피쿠로스는 아버지가 살고 있던  콜로폰이란 곳으로 이사를 한다. 여기서 그는 얼마 동안 머무르며 제자를 키웠다. 그리고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마 콜로폰의 제자들과 함께였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철학에 접한 것이 14세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학교의 선생들, 특히 문법과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실망하여 철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14세의 에피쿠로스를 선생들이 실망시킨 대목은, 당시 유명했던 철학자 헤시오도스의 '카오스'란 개념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지적인 열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후 직접 학교 선생이 되었다. 혹자는 그를 비난하여 "살아있는 존재 중에 가장 다루기 힘든 자"라고 말한다. 이는 그의 지적 엄격성과 치밀함이 자주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격렬한 논리전의 와중에 많은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에피쿠로스의 적들은 자주, 그가 정통 아테네 출신이 아님을 공격의 소재로 삼고 있다. 사모스 촌놈이라는 경멸을 담아 그를 인신공격하고 싶었을까.

에피쿠로스는 이전의 철학자들 중에서 아낙사고라스에 가장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설에서는 나우시파네스의 학생이었고 사모스의 플라톤주의자 팜필로스의 제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카데미아 학장이었던 크세노크라테스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고도 하고, 데모크라테스(그가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받아 철학을 시작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의 원자론과 퀴레네학파의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의 쾌락론을 연구한 뒤 그것을 자신의 철학을 만드는 기초로 삼았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비교적 덜 중요해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당대 혹은 전대의 거의 모든 지식인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독자적인 스쿨을 연 뒤에는 독창적인 그의 교리를 토론과 생활 속의 실천으로 정착시켜나갔다. 그는 그의 형제 3명을 자신의 철학에 입문시킬 정도로 자신이 설파하는 주장에 대해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나우시파네스의 관계는 눈길을 끈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학문에 눈을 뜨게된 에피쿠로스는 그를 이렇게 혹평한다. " 나우시파네스를 멀리하라. 그는 노예들처럼 허풍과 궤변에만 열을 올린다." 그는 나우시파네스를 연체동물, 까막눈, 사기꾼, 창녀라고까지 불렀다고 한다. 그가 나우시파네스를 선생님이라 부른 것은, 그를 비아냥거리는 호칭이었다고도 말한다. 나우시파네스의 철학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이같은 에피쿠로스의 태도는 그가 지나친 확신으로 독선을 지녔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당시의 이런 분위기는 철학과 주장과 이론의 백가쟁명 속에서 선명성 경쟁과 이론투쟁을 벌이는 지식인들의 투쟁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될 것이다. 

그의 에피쿠로스 스쿨의 사부생활은 당시의 관점에서 아주 튀는 행동들의 연속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친구와 제자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체통이고 자제심이고 따질 겨를 없이 가장 열정적인 말로 벗들을 맞이하고 대했다. 그는 새로온 벗에게 "아폴론 신이여!" 혹은 "주인님!"이라 부르며 경배했다. 직업이 창녀였던 제자 레온티우스와 테미스타에게는 "당신들이 내게로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것이오. 당신들이 나를 불러주기만 한다면 내 스스로 삼단뛰기(올림픽이 유행하던 시절이다)를 해서 찾아갈 것이오"라고 말한다. 퓌토클레스란 아름다운 제자에게는 "사랑스러우며 신과 같은 그대를 위하여 여기 주저앉은 채로 기다리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축복받은 자여, 쪽배를 띄워라. 모든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이리로 오라"고 말하기도 한다. 제자 레온티온에게 띄운 에피쿠로스의 편지는 간절하다. "주인이자 구세주인 레온티온이여. 우리가 당신의 편지를 읽을 때 우리가 얼마나 환호성을 지르는지 아시는가?" 이런 열렬한 제자 유치운동으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규모를 불려간다. 

그의 스쿨은 노예와 창녀를 조건없이 받아들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맘마리온, 헤데이아, 에로티온, 니키디온, 레온티우스, 레온티온 등은 에피쿠로스의 일급제자이자 창녀들이다. 그는 당대에도 육체적 쾌락을 강조하는 퀴레네학파의 주장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자신의 주장이 그들과 전혀 다른 것임을 부각시키는데 애를 썼다. 에피쿠로스의 쾌락론과 창녀들과의 동거 생활은 근거없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소재였다. 그 또한 이런 문제를 의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맛을 통한 쾌락, 청각과 시각을 통한 쾌락, 그리고 성적 쾌락 외에 무슨 좋은 것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에피쿠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레온티온을 자주 들먹인다. 창녀 레온티온은 에피쿠로스가 가장 아꼈던 열세살 연하의 제자, 메트로도로스의 아내가 된 여자이다. 에피쿠로스는 레온티온과 열정적인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메트로도로스 또한 그랬다. 이런 대목에서 혹자는 사랑의 삼각관계 등을 짐작하며 상상력을 불려갔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랑에 빠지는 것은 현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으며 아이를 가지는 일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상황에 따른 선택이며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성교를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이득을 주지 않으며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운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태도가, 성적으로 얽히는 인간관계보다 친밀한 우정적 관계를 옹호하는 논지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또 유언장에도 노예 해방을 못박아 놓는다. "나는 나의 노예들 중 뮈스와 니키아스, 뤼콘 그리고 파이드리온을 해방시키겠다."



4.


낯선 편지 한통이 지난 일요일 아파트 우편함에 꽂혀있었다. 발신인을 보는 순간 놀랐다. 주소는 아테네 에피쿠로스 동산으로 되어 있고, 발신자는 이 스쿨의 교장인 에피쿠로스가 아닌가. 이 편지가 2천여년의 시간과 유럽과 아시아라는 공간을 뛰어넘어 여기로 배달된 것도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수신자를 보는 순간 더욱 놀라고 말았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친구이자 제자이자 학문적 도반(道伴)인 메트로도로스의 아내가 될 창녀 레온티온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시간과 공간이란 인간세의 격자를 뚫고 건너왔을 뿐 아니라, 내게 전달되어야 할 게 아니라 레온티온에게 전달되어야할 편지가 잘못  배달된 것이었다는 얘기다. 여러 개의 놀랄 만한 기이함이 겹치니 어느 것부터 이성적으로 반응해야 할 지 몰라 그냥 모든 판단을 접어두고 편지를 읽기로 했다. 

에피쿠로스는 말하지 않았던가. 짐작이나 상상이나 추론은 대부분 가짜다. 믿을 수 있는 건 눈과 코와 귀와 신체의 모든 감각으로 받아들인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검증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 배달되어 있는 이 편지를 보고 있는 내 눈은 어김없는 진짜다. 그러니 이 편지도 진짜이며 그 편지의 내용 또한 우선적으로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생각으로 봉투를 뜯는다. 에피쿠로스의 글씨는 물론 아테네의 고어로 씌어져 있으나, 이걸 읽을 수 있었던 건 인터넷에서 사귄 그리스의 한 고문학도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장들을 영어로 정성껏 번역해서 내게 이메일로 보냈다. 읽어가면서 나는 이 아름다운 철학자이자 실천가인 그의 육성을 듣는다는 마음에 크게 들떴다. 

"그리운 레온티온에게"

맨처음의 형용사부터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레온티온은 아테네 출신의 창녀로 원래 에피쿠로스의 열렬 팬이었다. 에피쿠로스가 서른 네살의 나이로 스쿨을 창설했을 때, 그녀는 가장 먼저 입교를 신청했다. 에피쿠로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지적 우열과 빈부귀천은 모두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문과 수행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비록 몸을 파는 창녀가 되었으나, 오랫 동안 학문에 갈증이 있어왔고 무엇이 진정한 삶의 가치인지에 대해 고민해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행히 학문 기회에 있어서의 평등을 주장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취지에 비추어 저도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받아줄 수 있는지요?" 이때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물론 학생이 될 수 있다. 레온티온은 훌륭한 철학자가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의 창녀 생활을 계속 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어렵다. 스쿨에 입교하면 단체생활을 하게 되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할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겠는가?" 레온티온은 기꺼이 하겠다고 말했으며 이후 그녀는 에피쿠로스 스쿨의 모범 학생이 되었다. 

레온티온은 그러나 에피쿠로스를 진정으로 흠모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육체적인 욕망까지도 품고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그 욕망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제자들에게 섹스를 쾌락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섹스의 많은 부분은 가짜 쾌락이다. 성적 갈증의 해소는 아주 간단하다. 심지어 그것은 자기 혼자서도 일정하게는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란 감정과 결부시켜 쾌락을 강화하고 신화화하려 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남녀 간의 성적 욕망과는 다른 감정이다. 사랑이란 친구 간에 샘솟는 배려와 동지애, 그리고 삶의 동반자 의식 등이 진정한 사랑이다. 섹스를 사랑으로 포장하고 미화하지 말라. 그것을 감각 그대로 지켜보라. 섹스의 욕망은 그것이 해결되는 순간 잠정적으로 끝난다. 거기서 그쳐라. 그것을 인간관계로 잇고 사랑이란 낱말의 광휘와 상상력으로 부풀린 신화들로 덧대는 순간, 그것은 고통과 짐이 될 수 밖에 없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레온티온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섹스를 부정하시나요?"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그렇진 않다. 다만 그것을 해결한 뒤에 가짜 욕망들을 부풀리는 마음과,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와 레온티온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에피쿠로스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열정과 지혜를 칭송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를 진정한 우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가끔 레온티온이 그 선을 넘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받아주었다. 따뜻한 말, 진정한 격려, 지나치지 않은 노동과 소박한 먹거리의 삶. 그들은 그 속에서 행복했다. 에피쿠로스보다 열 세 살 아래인 메트로도로스가 입교했을 때 에피쿠로스는 이 총명한 제자에 반하고 말았다. 이 제자와 스승은 근 12년 가량을 함께 생활한다. 메트로도로스에 대한 얘기는 두 가지 이설이 전한다. 그는 스승의 과도한 친절과 배려를 견디지 못하여 스쿨을 떠난다. 그리고는 에피쿠로스의 적대자가 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이 때에도 이 제자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그가 쉰 두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는 설이다. 그가 죽을 때 에피쿠로스는 안회를 잃은 공자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축배를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굳세고 아름다운 벗이 먼저 자리를 떠났도다. 임종 장면은 얼마나 훌륭했던가. 모든 사람은 지금 막 태어난 그날처럼 짧은 순간에 떠난다. 죽은 친구에게 우리의 감정을 보여주자. 그의 죽음을 비탄하면서가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생전의 모습을 즐겁게 기억하자. 우정은 춤추면서 세상 주위를 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외친다. 일어나서 행복한 삶을 칭송하라." 

이 두 사람이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서로 다르게 전해져온 얘기인지 알 수 없다. 전자의 경우는, 좀 의아하다. 메트로도로스는 매우 지혜롭고 굳센 사람이었다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그리고 스쿨을 떠난 경위도 좀 어색해보인다. 에피쿠로스는 죽기 전 법정 유언장을 남기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메트로도로스의 동생 티모크라테스에게 자신의 재산을 공동관리하는 권한을 준다. 티모크라테스는 변덕이 심하고 절제가 잘 안되는 사람이어서, 에피쿠로스가 불안했던지 다른 사람과 공동관리를 할 것과, 스쿨에 관한 운영권은 또다른 총애하는 제자인 헤르마르코스(이 사람도 그러나 중풍으로 일찍 죽는다. 에피쿠로스의 후계자라 할 만한 이 제자는 '배움에 대하여' "플라톤에 대하여' '아리스토틀에 대하여' 등의 책을 남겼다)에게 줄 것 등을 단서로 달아놓는다. 에피쿠로스는 어쨌든, 메트로도로스의 동생에게 자신의 재산을 넘길 정도로, 메트로도로스란 사람을 사랑했다. 

뿐만 아니라 에피쿠로스는 자기가 가장 아끼던 연인이자 철학적 동반자인 레온티온이 메트로도로스의 아내가 되는데 기꺼이 동의했다. 창녀들과의 염문은 당시 스쿨 바깥의 수근거림을 키우는 악재들이었으나 에피쿠로스는 그런 소문들에 개의치 않고 열정적으로 여러 여인들에게 '우정'을 강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저 편지의 첫 머리인 '그리운 레온티온'은 이제 막 결혼하려는 그녀에게 에피쿠로스가 보내는 호칭이었다. '그리운'이란 아름다운 벗에게 시집을 가는 또다른 아름다운 벗을 향한 우정어린 표현이리라. 편지를 읽어가자.

"당신이 보낸 편지는 잘 읽었소. 나에 대해 가지는 연민과 그리움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겠소. 나는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메트로도로스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해 행복해하고 있소. 나에 대한 우정의 마음이 식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하게 온기를 키워가고 있음에 감사드리오. 우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당신과 내가 만난 것이 큰 축복이었고, 당신과 내가 나눴던 모든 학문적 토론들, 그리고 내가 당신을 통해 행복해졌던 많은 시간들이 내겐 더할 나위없는 신의 은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나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벗 메트로도로스와의 관계에 흠이 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나 또한 그러하고 당신 또한 그러합니다. 또한 지금 이 결혼의 축복 또한 우리 우정의 아름다운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는 무엇을 바라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자주 놓치곤 합니다. 이미 우린 행운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어찌 행운이 부족하다며 마음을 괴롭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내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그건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의 도움이 친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진실로 친구를 돕습니다. 당신은 어제 당신이 나를 생각하다 자결하는 꿈을 꿨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의 스쿨이 아직도 관계의 미혹과 욕망의 거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벗의 꿈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해석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꿈에는 신적인 본성이 없습니다. 그것이 예언적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꿈은 다만 우리 기억과 상상의 영상들이 우연하게 유입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미래의 어떤 일과 결부시키는 일은 허약한 정신과 우매한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메트로도로스에 대한 당신의 마음에 대해선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좀 과묵하며 자기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고 진실하며, 가슴 속에 따뜻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정에 너무 적극적인 사람과 너무 머뭇거리는 사람, 모두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정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모험을 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애의 중심도 우정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린 고통과 쾌락의 두 가지 핵심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이 끝나는 순간, 쾌락은 최대치가 됩니다.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쾌락을 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본능과 의지를 움직입니다. 고통이 사라져 쾌락이 완전하게 되었는데 또다른 쾌락을 향해 기웃거리는 허기를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부르는 탐욕입니다. 충분한 것을 적다고 느끼는 자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맛있는 음식들을 영원히 욕구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조용히 마음을 낮추고 소박한 삶과 그리움을 유지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좋은 삶과 평온한 기분을 늘 간직하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벗이여.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알면 어쩌지'하는 일을 인생에서 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실을 이웃이 알게 되는 결과를 낳아서가 아니라, 그 마음은 이미 자신을 결박하고 두려움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줄 것입니다. 젊은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해야할 일은, 자신의 젊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진정한 젊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등에처럼 달라붙는 욕망이 오염시키는 것들로부터 담담해지고 편안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욕망이 생겨날 때 항상 두 가지 질문을 준비하십시오. 이 욕망이 성취된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욕망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 만으로도 어리석은 선택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충동이 나를 사랑의 쾌락에 약하게 만든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법이나 미풍양속을 깨지 않고, 이웃에 방해를 주지도 않으며, 당신의 몸을 해치거나 생필품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이런 문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와도 만나지 않는 충동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의 쾌락이 우리를 진짜 이롭게 한 적이 별로 없으며, 해를 주지 않았다면 다행으로 여기라고 제가 늘 말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악한 일을 대면했을 때 그것을 고의로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더 나쁜 일과 비교했을 때 그것보다는 낫다는 점에 이끌려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겁니다.

레온티온이여. 내가 하는 말을 가슴에 기록해놓기를 바랍니다. 아니 노트에 적어놓기 바랍니다. 노트에 적어놓고 늘 꺼내서 외우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죽을 운명이며 살 날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자연에 대한 토론을 통해 영원하고 무한한 곳까지 나아갔습니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내일의 주인이 아닌, 바로 현재의 당신이 진짜 당신입니다. 행복을 지금 당장 실천하십시오. 우리는 미루다가 인생을 낭비하며 결국 여가도 누리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우리는 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산 노인을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젊음은 흐르는 물이며 불안한 방황이지만 늙음은 항구에 내린 닻처럼 평온하고 마음이 자유롭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났던 좋은 일을 잃어버린 노인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우린 많은 좋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길에 오른 한 우리는 시작보다는 끝을 더 만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끝에 이르면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레온티온이여. 우린 철학을 하는 체 해서 안되며 철학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지속적인 건강 상태와 건강에 대한 확고한 희망은, 우리에게 완전한 기쁨을 줍니다. 나는 몸이 허약하여 먹는 일과 노동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과 삶의 소박함으로 진정한 건강을 찾았습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일과 음악과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 사랑의 쾌락, 아름다운 것을 본 뒤 생기는 기쁜 감정을 제외하고, 대체 무엇이 선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즉 아름다움, 그리고 뛰어남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를 지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그것들을 버리는 게 좋습니다. 몸이 원하는 소박한 쾌락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짜 욕망으로 뛰쳐나감 없이 마음 안에서 고요히 느낄 때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레온티온이여. 이 변함없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소서."

연애편지를 기대했던 나는 이 열띤 레토릭에 약간 실망하긴 했다. 하지만 레온티온을 향한 에피쿠로스의 견실한 우정과 진정성을 느끼는 데는 충분한 편지였다 싶다. 나는 긴 편지지를 다시 계단처럼 접는다. 먼 시대 한 인간의 가슴 속에 스쳐간 아름다운 생각들이 절절이 새겨져 있는 편지. 나는 다시 이 편지를 레온티온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파트 우편함에 다시 꽂아둔다. 그리곤 "아름다운 에피쿠로스"라고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른다. binsom@copy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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