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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Aug 17. 2017

모죽지랑가의 비밀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이성복시인과 죽지랑, 득오 이야기

▶ 화랑 죽지랑은 왜 그토록 득오를 챙겼나


삼국유사에는 죽지랑과 득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앞부분은 죽지랑과 낭도인 득오(곡)에 관한 에피소드다. 득오가 갑자기 결석을 해서 죽지랑이 물어보았더니, 익선이란 모량부의 관리가 공공근로를 시키기 위해 급히 차출해갔다고 한다.

죽지랑은 떡과 술을 들고 낭도 137명과 함께 득오를 찾아가 휴가를 주기를 청했으나 익선에게 거절당한다. 이 장면을 본, 신라조정의 관리가 화랑 죽지랑이 낭도를 아끼는 마음을 귀하게 여겨, 수송하던 조30석을 익선에게 줬으나 그래도 득오를 내주지 않았다. 말안장까지 보태서 선물을 주니 그제서야 풀어준다.

조정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익선을 처벌하고자 했는데 그가 도주해버려 그 큰아들을 붙잡아 추운 한겨울에 연못에서 목욕을 시켜 '죄를 씻는 형벌'을 주었다. 그는 얼어죽고 말았다. 효소왕은 이런 얘기를 듣고 모량부에서 관리를 지낸 자는 관직과 승직을 갖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이런 일들이, 득오를 아끼는 죽지랑(죽만랑이라고도 한다, 죽지를 듁맛이라고 읽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으뜸과 맏이의 뜻을 지닌다 한다. )의 마음 때문에 빚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엔 화랑과 낭도의 의리를 높이 샀고 그것을 무시하는 관리에 대한 도덕적 징벌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 불교수행자가 부활몽, 삼국유사 일연은 '죽지랑의 자비'를 새겼다


삼국유사 '죽지랑'조의 뒷편에는 이 화랑의 탄생설화이다. 부친인 술종공이 삭주의 장군으로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죽지라는 고개를 넘는데, 한 범상찮은 노인이 길을 닦고 있다. 술종공이 고마워했고 그 자리에서 노인과 뭔가 필이 통했다. 한달 뒤 술종공과 부인의 꿈 속에 동시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상히 여겼는데, 알아보니 그 노인이 죽은지 며칠 되었다고 했다. 부부는 그 노인이 아이로 태어났다고 믿었고, 그래서 '죽지노인'이 환생했으니 그 이름을 죽지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죽지랑은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고 진덕,태종,문무,신문왕 대에 걸쳐 장수와 고위관직을 지냈던 인물이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하는 죽지랑과 득오의 스토리다. 우선 시기를 맞춰보면, 죽지랑은 650년경(진덕여왕대)부터 김유신(595-673)과 함께 삼국통일 전투를 치뤘던 장군으로 신문왕 다음대인 효소왕 대(692-702)에는 낭도 137명을 이끄는 화랑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역사가 특별히 기록해놓은 저 에피소드는, 죽지랑의 인품과 화랑도의 우애를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거기에 세속의 권력논리에 의해 신권(神權)의 대행자인 화랑의 품격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시의 강력한 모럴이 흥미롭게 반영되어 있는 이야기다.


▶ 죽지랑이 70세를 바라보는 늙은 화랑?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다. 김유신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649년에 그의 나이를 19세로 잡으면 630년생이 된다. 효소왕이 즉위한 때(692)엔 63세이며 득오 관련 사건이 났을 때는 70세를 바라보는 고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화랑이 미소년이 아니라, 그런 백발노인이었던 말인가. 평생 엄청난 공훈을 쌓은 죽지랑이 익선이란 지방 벼슬아치에게 뇌물까지 바치며 낭도를 빼내려 했던 말인가. 아리송하다.

이런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효소왕대로 되어 있는 득오 사건과 관련한 기록을 선덕왕대(632-647)의 오기라고 보는 학자(서태수, 1971)도 나왔다. 이렇게 본다면 647년 17세 화랑 죽지랑이 그려지게 된다. 낭도를 지극히 아끼는 자비로움을 갖춘 '불도 수행자(거사)의 화신'. 그의 큰 아낌을 받은 득오가 뒷날 그를 기억하며 지은 시. 모죽지랑가는 신라의 가장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추앙의 헌사이다. 


▶ 오랜 시간, 모죽지랑가의 교과서가 되어온 '양주동 풀이'


이제 어느 사내가 울먹이며 읊조렸을 그 향가를 따라가볼 시간이다.


(한자로 읽기)


去隱春皆理米(거은춘개리미)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모동거질사곡옥시이우음)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아동음내질호지사오은)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모사년수취음타지행제) 
 目煙廻於尸七史伊衣(목연회어시칠사이의) 
 逢烏支惡知作乎下是(봉오지악지작호하시)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랑야모리시심미행호시도시)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봉차질항중숙시야음유질하시)


(읽기)


간 봄 그리매
모든 것아 우리 시름
아름 나토샤온
즈지 살쯈 디니져
눈 돌칠 사이에
맛보옵디 지조리
낭이여 그럴 마즈뫼 녀올 길
다봇 구러회 잘밤 이시리


(풀이)


간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고 하는구나
눈 깜박할 사이에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이까


                양주동의 향가 '모죽지랑가' 읽기와 풀이







▶ 빈섬이 새롭게 풀어보는 '모죽지랑가'


이번엔 빈섬이 풀어본다. 우선 이 노래의 제목에 쓰인 '모(慕)'는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추모'의 의미라 보았다. 


산 사람에 대한 단순한 애모(愛慕)라면, 그의 인격이나 추억을 그리워해야 할텐데, 빠르게 흐르는 시절을 한탄하는 듯한 맥락과 맞지 않아 보인다. 이별 하는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라면 '모(慕)'가 조금 성급해보이는 점도 있다.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대체 저 위대한 화랑이 왜 가는 건지도 알 수 없다.


去隱春皆理米(거은춘개리미) 
 간 봄 기림에


# 봄(春)은 화랑(花郞)이란 말이 지닌 '꽃'과 대응하는 상징어다. 가신 화랑님을 기리며. 라는 의미다. 기린다는 말은 그리워한다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이미 완료된 어떤 존재의 성취를 기억에 돋을새기는 행위다.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모동거질사 곡옥시이 우음) 
 모든 것일사 울어서 시름


# 위대한 화랑이 죽었으니 한 나라가 모두 슬퍼한다. 귀천이 따로 없고 하늘과 땅이 따로 없이 모두 함께 울어서 슬퍼한다.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아동음내질호지사오은) 
 아름다움 내질렀사오니


# 양주동 선생은 '아름 나토샤온'이라고 예쁜 말로 풀었는데, 이게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다. 내질호지(乃叱好支)를 내타호지로 읽으신 것일까. '내지르다'는 말은 '꺼내다'는 의미다. '살아생전의 아름다움을 이제 육체에서 내버렸으니'라는 의미로 읽으면 자연스럽다. 화랑에게는 육체적인 젊음과 아름다움이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화랑은 하늘과 접신하는 존재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대표선수와도 같이 우러름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그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일이 아닌가.



皃史 年數就音 墮支行齊(모사 년수취음 타지행제) 
 얼굴사 나이 먹은 탓이간제


#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고 하는구나'라고 양선생은 풀었지만, 주름살이란 말이 어디에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연수(年數)란 말은 나이를 가리킬 뿐이다. 4대의 제왕을 모신 죽지랑의 이력을 보자면, 70살은 훨씬 넘겼을 가능성이 있으니, 왕년의 꽃미남 자취는 남아 있으되 얼굴에 세월의 자취는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마냥 아름답다고 추켜세울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目煙 廻於尸七 史伊衣(목연회어시칠 사이의) 
 눈의 흰자위가 돌아갔을 사이에


# 너무 리얼한 표현이라 끔찍하기까지 느껴지지만 위대한 화랑의 마지막을 외면해서는 안될, 당시 사회의 예법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마침내 숨을 거두는 장엄한 장면을 득오는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逢烏支惡知作乎下是(봉오지악 지작호하시) 
 득오를 만난 게 싫었는지 알게 하소서


#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의 다양한 해석과 완전히 갈라서버렸다. 여기가 시안(詩眼)이 빛나지 못하면, 시 전체가 너무 밋밋해진다. 오(烏)를 '만나오지(逢烏支)'처럼 이두로 풀 수 있겠지만, 그러면 뒷부분이 아주 얄궂게 풀린다. 양선생은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라고 득오가 떠나가는 늙은 죽지랑에게 '이별 드립'을 날리는 것처럼 풀고 있다. '기회를 짓다'는 말이 어떻게 나오는지도 알기 어렵다. 봉오(逢烏)를 '득오를 만남'이라고 풀면, '득오를 만난 거지(것이) 싫어서인지' 알려 달라는 말이 된다. 즉, 위대한 스승이 떠나는 것이 내가 싫어서 가는 것인지 말씀해달라는 얘기다.



郞也 慕理尸心未 行乎尸 道尸(랑야모리시심미행호시도시) 
 화랑이여 추모 드리는 마음이 따라가옵는 길


# 격정의 대목을 지나, 득오는 화랑을 부른다. 돈호법이다. 나를 떠나가시는 그대를 마음이 따라가고 있다며 그 사모를 드러낸다. 양주동선생은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그리운 마음'은 누구의 마음인지 아리송하다. 죽지랑의 마음일까. 득오의 마음일까. 나는 여기서 득오의 마음으로 풀었다. 득오의 마음이 따라가는 것이다.



蓬次叱巷中宿尸夜音 有叱下是(봉차질항중숙시야음유질하시)
풀더미 공동묘지에서 주무시는 밤을 어찌 하실지


# 이 마지막 행이 또 흥미로운 대목이다. 봉차질항중숙시(蓬次叱巷中宿尸)가 뭔가. 양선생 해석.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주무실'로 풀었다. 노화랑을 보내는 득오가 별사로 쓴 것이라면, 스승이 가는 곳에 다북쑥이 돋아있을지 할미꽃이 피어있을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다북쑥이 가득 찼을 마을이 '봉차질항'이라면, 그 마을은 공동묘지다. 그 묘지 속에서 주무시는 밤을 저 스승께서 어떻게 보내실지 참담하다는 말이, 무릎 푹 고꾸라지며 쏟아내는 호곡을 방불케 한다. 적어도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이까"라며 가시는 여행지 모텔 사정을 묻는 질문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 이성복 시인이 변주의 폭을 넓혀준 모죽지랑가


사실 이 시를 다시 읽은 건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시집의 맨처음에 나오는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 봄 청도 헐티재 넘어
추어탕 먹으러 갔다가,
차마 아까운 듯이
그가 보여준 지슬못,
그를 닮은 못

멀리서 내젓는
손사래처럼,
멀리서 뒤채는 
기저귀처럼
찰바닥거리며 옹알이하던 물결,

반여, 뒷개,뒷모도
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그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

 

                       이성복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 지슬못의 '옹알이하던 물결'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의 이미지가 왜 신라의 죽지랑과 그의 죽음을 눈꺼풀 안으로 담아내던 득오와 이어졌는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생생한 맥락이 지워진 역사적 기억의 한 순간이, 현실 속에서 기이한 공명과 변주를 이루며 사라지는 순간 속에 다시 아로새겨지는 장관을 보여준 것일까. 그 먼 날의 허망한 길들, 윷말의 반여나 뒷개나 뒷모도와 같은 주어진 형식을 가감없이 실천하는 속내없는 삶의 방식처럼 생생한 비린내도 남기지 못한, 언어들이라고 이성복은 모죽지랑가를 슬퍼했던가. 몇번이고 시를 읽고 다시 읽어본다. 까닭없이 슬프고 아름답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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