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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Aug 17. 2017

여성의병장 '불광동 박씨' 이야기

밝여사는 행주대첩의 숨은 전사였다



밀양박씨 박재윤의 장녀(혹은 해주오씨 집안이라는 설도 있음)로 불광동(한성부 북부 연은방(延恩坊) 불광산계(契), 현재의 연천(延川)마을)에서 살던 박씨 여인은 마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지혜가 있었다. 


한 고을사람이 가례(家禮)를 치렀는데 손님으로 초대된 수십명이 식중독을 앓다가 9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관청에서는 초대한 사람을 불러 문초를 했으나 뚜렷한 죄상을 밝힐 수 없었다. 이때 밝여사는 그 집의 볏짚단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네가 쌀을 잘못 낳아 사람들을 죽인 셈이 되었으니 너를 능지처참함이 마땅하다’라고 글을 써서 짚단에 걸어두었다. 


이 소문을 들은 관리가, 문득 깨닫고는, 옥에 가뒀던 사람을 풀어주고, 대시 그 짚단인형을 끌고와 형벌을 내렸다. 


이후 고을 사람들은 박씨여인을 ‘밝여사(밝女士, 밝은 여자선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녀는 20세에 이웃마을 남평문씨 집안의 문옥형(文玉亨)에게 시집을 갔고, 아들 문천립(文天立)을 낳는다. 


밝여사의 집안은 북한산 일대의 농경지를 많이 지니고 있었는데, 그녀는 모내기 작법을 활용한 농사 기술을 보급하고 그 지역의 관개(灌漑)를 크게 개선하여, 수확량을 높였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들 중에서 상당 부분은 빈민에게 이자없이 빌려주는 방식으로 구휼(救恤)에 사용했고, 또 일부는 장차의 전란(戰亂)을 예견하여 비축하였다고 한다. 


1592년 그녀 나이 4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피난을 떠나면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그해 12월8일 신종황제가 제독 이여송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아 4만1천명으로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출병하도록 명한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3년 1월9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한성으로 진격한다. 명나라 부총병이던 사대수(査大受)가 조선의 경기방어사인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선발대로 내려오다가 1월25일 서오릉 부근에서 왜장 가또오 미쯔요시(加藤光泰)의 수색대와 만난다. 사대수 부대는 미륵원(彌勒院) 전투에서 크게 이겼으나 연서역(延曙驛)에서 왜적에 포위를 당했다. 


27일 고양 벽제관 혜음령에 매복하고 있던 왜군과 큰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우리 군이 패퇴(敗退)하던 고개를 패퇴고개(되박고개)라고 불렀다.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창릉천(昌陵川)에 머무르고 있었다. 


밝여사는 그 며칠 전 마을사람을 시켜 북한산 노적봉 옆에 볏짚을 쌓게 했다. 일본군이 몰려오자 깨끗한 하얀 무명옷으로 갈아입고는 일본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창릉천에 함지박 하나를 들고 나갔다. 왜적의 길잡이인듯한 병사 하나가 다가와 조선말로 묻는다. 


“어디로 오는 길이냐?” 


“조선은 예의의 나라다. 어찌 늙은 여인에게 반말을 하는가?” 


안색이 맑고 당당한 여인의 이 말에 병사는 움찔하더니 말을 고친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노적봉에서 내려오는 길이오.” 


“거긴 왜 갔는가?” 


“노적봉(露積峰)은 노적가리 봉우리란 뜻입니다. 즉 쌀가마니를 쌓아 덮어두는 곳으로 조선 병사들은 군량미 저장고입니다. 높이 두는 까닭은 그곳이 고지인지라, 지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들고 있는 함지박엔 무엇이 들어있는가?” 


“병사들이 마을의 늙은 기민(饑民)을 위해 보름에 한번씩 쌀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지금 노적봉에 가서 쌀을 타오는 길입니다.” 


조선말을 하는 병사가 왜병에게 설명을 하더니, 밝여사가 들고있던 함지박을 빼앗아 병사들에게 보여준다. 그 안에는 흰 쌀이 가득 들어있다. 


“쌀을 더 타올 수도 있소?” 


“예. 아직 군량미가 풍족한 편이라, 아끼지 않고 더 내주더이다.” 


“그럼 이것은 우리를 주고, 다시 함지박을 들고 올라가서 쌀을 더 구해오시오.” 


밝여사가 함지박을 들고 골짜기를 오를 때, 뒤에서 병사가 물었다. 


“이곳 창릉천의 물이 왜 이렇게 부옇소?” 


사실은, 전날밤 밝여사가 상류에 대량의 석회를 뿌려둔 까닭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말했다. 


“상류에서 밥을 짓느라 쌀을 씻으니, 당연히 이곳 계곡물이 부열 수 밖에요.”


 그리고는 천천히 올라갔다. 왜적 두명이 밝여사를 따라붙었다. 밝여사는 산중턱에 이르자 돌멩이 두 개로 딱따기를 쳤다. 그러자 숨어있던 마을 장정 2명이 활을 쏘아 왜적을 쓰러뜨렸다. 


그 무렵 창릉천 왜병들은 쌀로 밥을 짓고 있었다. 또 몹시 갈증과 허기가 났던 말과 병사들에게 계곡물을 먹이게 했다. 쌀뜨물이라면 주린 배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밝여사는 급히 조명(朝明)연합군에게 전갈을 보내 창릉천을 급습하게 했다. 이 무렵 왜병들은 석회수를 먹은지라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고 있었고 말들은 날뛰고 있었다. 


이날 전투 이후 왜군은 퇴각을 거듭했다. 밝여사는 마을의 여인들을 모아 의병대 상군(裳軍, 치마군대)을 조직했고, 북한산 일대에서 펼쳐지는 전투 때마다 우리 병사들에게 끼니를 제공하고 부상자 치료를 도왔으며 전황 연락책을 맡아 봉화(烽火)를 올렸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대였으며, 그녀는 첫 여성의병장이었다. 창릉천 쌀뜨물 사건 이후 그녀는 ‘밥한(어)머니(大母)’라는 명성을 얻는다. 


1593년 2월12일 행주산성에서 접전이 펼쳐지자, 그녀는 고양인근의 여성들을 창의상군(倡義裳軍, 치마부대 의병)으로 조직하여 참전을 이끈다. 


상군은 전투보조요원으로 식군(食軍)과 의군(醫軍)을 두었으며, 또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주력군을 구성하여, 행주성 사수를 위해 돌을 나르는 일을 맡았다. 돌을 나르기 위해 앞에 보조치마를 둘렀는데, 이를 행주치마라 불렀다. 


행주상군(幸州裳軍)의 뒤에는 ‘밥한머니’가 있었다. 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노적봉이 잘 보이는 창릉 모퉁이에 그녀를 기리는 석상(石像)을 새겨놓았다.


1623년 80세가 된 그녀는 조선 군대를 위해 창고에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쌀을 모두 내놓는 결단을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인조임금은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갔던 효령대군을 수행한, 그녀의 아들 문천립에게 가선대부의 위계를 내리고 왕의 성씨인 이(李)씨(완산이씨)를 사성(賜姓)하였다. 밝한머니가 돌아간 뒤 왕은 그녀의 남편인 문옥형도 가선대부 위계를 내렸고 밝한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봉했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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