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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주 Apr 04. 2023

잘 이혼하는 법

혹은 싸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법


이혼하기까지 꽤나 오랜시간을 들여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처음 서류를 내러 가던 그 순간까지도 맞는건지 틀린건지 내가 잘하고 있는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사실 이건 결혼하던 그때에도 그랬다.

맞는지 틀린건지는 해봐야 안다.

그리고 무엇이 정답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내가 살면서 바란 것들이 너무 큰 것들이었나?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그냥 서로를 생각하며 다정히 늙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애초에 그게 불가능한 사람을 선택해놓고

그래 내가 바란 게 잘못이었다.





잘 이혼하는 법은 사실 부부 사이에 싸우지 않는 법과 비슷하다. 적당히 서로 원하는 것을 맞춰주고 타협해야 끝낼 수 있다.

재산분할도 양육권도 합의되는 부분이 없다면 이혼까지는 상당한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




처음 그 사람의 외도 사실이 발각되고 가출까지 감행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이혼할 생각은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

'허수애비지만 그래도 서류상으로라도 아빠가 있는 게 낫지 않겠나'

'편모 가정 아이들은 차별을 당한다는데'


 그 사람 역시도 그저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갈구했을 뿐이지 나와의 이혼은 결사반대였다.

그냥 이혼하는게 낫겠다는 문자 하나면 집으로 다시 들어왔으니까.


이혼은 하기 싫지만 외도를 저지르고 있는 상간녀와 따로 집을 얻어 살고 있던 그 사람이 한 번씩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내가 이 사람을 죽여버리거나 아님 내가 죽어버려야 이 고통이 끝날 거 같다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 모든 짓을 저지르고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저 인간을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내려치거나 칼로 찌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자신이 무서워졌다.



그러면서도 끝내 이혼할 용기가 없었다.


'세상 남자들 다 똑같고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남편이니까 너만 참고 살면 된다'

'벌어다 주는 돈 쓰면서 살다가 니가 뭘 할 수 있겠냐. 그 동안 내 덕 보면서 편히 살았으니까 그냥 이대로 살아라'

'나랑 이혼하고 헤어진다고 뭐 대단한 세상이 있을 것 같냐. 남자들은 다 쓰레기고 내가 걔 중 나은 편이다.'

'너 행복하자고 나랑 갈라서면 애는 불행해질텐데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


이런 말들에 너무 오래 길들여진 탓이었다.

내 스스로가 무능하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사람이랑 헤어지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어떻게든 내가 한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들고 싶어서 지난한 세월을 버텨왔다.

내가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이해하면 괜찮아질거라는 마음으로.

나만 포기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근데 결국은 그게 아이에게도 상처가 되고 마음 아픈 일이 되는 걸 보니 더 이상 버티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결국 이제 버티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혼을 준비했다.



이혼은 충동적으로 할 수 없다. 아니 하면 안된다.

재산관계나 양육권 등에 대해 미리 충분히 논의하고 상의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을 미리 잡아둔 뒤에 해야한다.


나는 이혼을 준비하기 위해서 일단 다음의 내용들을 정리했다.


1. 안정적인 소속/수입의 확보

안정적인 소속과 수입은 제일 중요하다. 수입이야 당연히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좋지만 안정적인 소속의 경우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오랫동안 '니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말을 들으며 '그래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생각보다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직장이 아니더라도 안정적인 커뮤니티나 모임 등 '소속'을 하나 정도는 만들어두기를 추천한다.

이혼하는 과정에서 혹은 이혼 후에도 혼자 있으면 사람이 자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떨쳐내기가 정말 쉽지가 않다. 에너지가 안으로 파고 들게 되면 결국 나를 갉아먹을 뿐이다.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활동이 하나쯤은 있는 것이 좋다. 운동이나 문화생활이라도 좋다. 집중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꼭 하나 준비하자.



2. 적정 양육비 책정


가정법원에서 해마다 발표하는 양육비 책정 기준표가 있지만 이것만 보고 양육비를 산정하기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아이의 건강상태나 재산관계 등 생활에 필요한 비용은 천차만별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준일 뿐 꼭 이 금액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협의만 된다면.


나는 아이에게 들어가는 양육비용과 기타 지출을 고려하여 금액을 정했고, 이 내용을 정리해서 그 사람에게 양육비로 이 금액 이상을 달라고 딱 요구했다.

처음에는 받아들였다가 그 사람이 돈벌이 사정이 안좋아지는 바람에 지금은 약간 감액을 하긴 하였으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이제 학원비나 이런것들이 본격 많이 들어가기 시작하니까 다시 양육비를 조정해달라고 요구할 생각이다.



3. 재산관계 정리 및 협의

살고 있는 집부터 그 안에 들어있는 냉장고, 청소기, 티비, 세탁기 등에 이르기까지 재산관계에 대한 협의가 필요하다.

아이와 살려면 필요하기 때문에 아무튼 자잘한 생활가전들은 다 가져오는 것이 좋다.

상대방이 유책배우자라면 최대한 내가 요구하는 것에 맞춰주게끔 자주 본인의 잘못을 상기시켜준다.

대부분 유책배우자들은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는 멀쩡한 인간이라면 여기서 구구절절 자기 몫을 주장하지 않는 경우도 간혹 있다.

다행히 우리집 유책 배우자는 크게 자기 몫을 요구하지 않았다.

살고있던 집을 팔아 현금을 나누고 기타 가전이나 생활용품은 다 내가 가지고 왔다.

상대방이 요구한 건 리클라이너 의자 하나였다. 알아서 가져가라고 했다.

재산관계가 명확하게 정리되기까지 1년 이상 걸렸다.

집이 팔려서 내 집으로 이사를 한 후에 본격적으로 이혼 도장 찍는 시기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4. 주변 인간관계 정리

사실 내가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이 사람이 나를 진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나온다.

당시에 친하게 지내던 아이 어린이집 모임 엄마들은 재미있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남말하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하나 끼어있었다.

그 친구에게는 내 불행이 그저 가쉽거리로 소비되었다.

어쩌니 너 너무 힘들겠다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라고 했지만 순식간에 아파트 전체에 내 소문이 퍼져나갔고 '저 집 남편 바람나서 집나갔대' 라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너 이혼하고 친구들 하나 못 만나고 인생 혼자 그렇게 살거야?'

이 얘기도 그 사람이 나한테 자주 하던 말 중에 하나였는데, 여자는 이혼하면 친구들도 안만나고 고립된다는 것이었다. 내 얘기가 그냥 카페 엄마들 수다모임에서 연예인 찌라시처럼 오르내리는 걸 들으니 왜 사람이 고립되는 쪽을 택하는지 이해가 갔다. 분명히 얘기를 들었다는 아이 친구 엄마 하나가 나한테 슬쩍 와서 '요새 남편이랑 사이가 안좋아? 왜 무슨 일인데~' 하면서 떠보는 것도 환멸이 났다.


그치만 좋은게 좋은거라고 그럴수록 내 편이 되어줄 사람들, 진정으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골라내서 만났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에서 내 소문이 돌던 괴로움은 이사를 하면서 좀 나아졌다.


이사를 하고 나서는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만 사실을 이야기하고 주기적으로 만났다.

원래 전남편 손님들로만 북적였던 집에 내 친구들이 미리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게 너무 좋았다. 한동안 주말마다 친구들을 불러 맛있는 걸 해먹고 수다를 떨고 놀았다.

비로소 '나'로써 사는 삶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5. 양육권 협의

양육권과 면접 시간이나 방법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미리 결정해두는 것이 좋다.

나중에 이혼 서류에 내용을 적어서 내야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이혼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꽤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실험해보았다.

처음에는 내가 있는 상황에서 같이 셋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같이 있는 스트레스를 도저히 버틸 수 없었고, 같이 있으면 그냥 정말 같이 있을 뿐이었지 그 사람이 아빠로서 아이를 챙긴다거나 놀아준다거나 하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 꼴을 내가 차라리 안보는게 낫겠다 싶어서 아이와 둘이 시간을 보내라고 하는 쪽으로 면접 방법을 바꿨다.

아이가 가끔 셋이 놀면 안되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었지만 잘 설명해서 둘이 시간을 보내게끔 했다.

차라리 내가 없는 상황에서 둘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어떻게 하겠지' 생각하는게 많이 없어졌는지 한번씩 아이들 농장 같은 곳에도 데려가고 같이 축구도 하고 그러고 있는 것 같다.


가정법원에서 보여주는 무의미한 영상은 부모가 꼭 함께 무언가를 해야만 아이한테 좋은 영향이 간다는 것처럼 보여주던데 어떤 부모는 그냥 각자 따로 아이와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위의 내용들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조금 더 수월한 이혼이 가능하다.

이 내용들만 전부 협의가 된다면 이후의 과정은 그냥 일사천리기 때문이다.

협의의 과정에서 싸우지 말고 상대방을 살살 구슬러서 혹은 상대의 유책부분을 되새김시켜주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혼 중에 싸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이혼을 잘 거치고 나면 그 다음 과정이 다시 기다리고 있다.

작은 일로 부딪히면서 이제 헤어질 사람과 에너지 소모하지 말고 다음 인생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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