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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마법의 세상에서

영화 <위키드: 포 굿>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존 추

CAST. 신시아 에리보, 아리아나 그란데, 조나단 베일리, 양자경, 제프 골드블룸 외

SYNOPSIS.

“너로 인해 완전히 달라졌어, 내가”

전혀 다르지만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된 ‘엘파바’(신시아 에리보)와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쉬즈에서의 마법같았던 둘의 우정은 오즈의 마법사와 그를 둘러싼 비밀들을 알게 되면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내몰린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악한 마녀 ‘엘파바’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모든 걸 잃을까 두려운 착한 마녀 ‘글린다’. 서로 대척점에 서게 된 두 사람은 거대한 여정의 끝에서 운명을 영원히 바꿀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POINT.

✔️ 사랑받는 뮤지컬, 그 뮤지컬의 원작이었던 소설 <위키드>, 영화계의 전설인 1939년작 <오즈의 마법사>, 그 전설의 시작점이 된 소설 <오즈의 마법사>까지... 20세기 동안 수많은 영감을 준 작품의 아우라를 겹겹이 끌어안고 찾아온 작품입니다. 풍성하지 않을 수가 없죠. 알고 보면 더 재미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봐도 감상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 2024년 개봉한 <위키드>가 뮤지컬 1막 부분을 담았고, <위키드: 포 굿>은 그 뒤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 촬영은 한번에 해서 나누어 개봉한 작품으로... 1년 간의 인터미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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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키드>와 <위키드: 포 굿>은 원작의 원작(?)의 원작까지 가진 작품이다. 1900년에 출간된 소설 <오즈의 마법사>부터 그 1939년 영화, 뒤이어 소설 <위키드>와 뮤지컬 <위키드>까지 줄줄이 사랑받은 끝에 영화화된 작품이니까. 소설 <오즈의 마법사> 하나만 놓더라도 다각적인 해석을 낳은 만큼 매혹적인 이야기인데, 거기서 새로운 해석과 각색이 계속 덧대지면서 사랑받은 끝에 여기까지 온 작품이니 레이어가 풍성할 수밖에 없다.


레이어가 풍성한 작품을 보는 것은, 그에 이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 영화의 면면 중 어떤 점이 내 마음을 건드렸는지, 그게 내 마음 속 무엇과 공명했는지 살피면서 우리는 결국 나 자신을, 그리고 지금 내 안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키드: 포 굿>은 보고 나서 누구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내 마음을 건드린 레이어 몇 겹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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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세상에서 진실을

감추고 싶은 진실이 하나 있을 때, 그걸 감추는 좋은 방법은? 첫 번째, 그럴 듯한 거짓 사이에 숨겨 알아보기 어렵게 한다. 두 번째, 적을 하나 상정해 모든 시선이 그리로 향하게 만든다. 두 가지 방법의 공통점은 언어가 혼탁해진다는 점이다. 다만 첫 번째는 숲에 나무를 감추는 셈이므로 언어가 나뭇잎처럼 흩날린다면, 두 번째는 선과 악을 상정해 갈라야 하기 때문에 언어가 딱 잘라 양분되는 차이점은 있겠다. <위키드>의 세계는 단연 후자다. 언어를 교묘하게 비틀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을지 뒤흔드는, 우리가 역사에서 본 어떤 사회들과 유사한 체제로 굴러가고 있다.


쉬즈 대학교의 학장인 마담 모리블이 '언론부 장관'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은 거의 <1984>를 방불케 한다. 체제의 얼굴이 되어 비눗방울 모양의 장치를 타고 다니며 미소 지어야 하는 글린다와 모리블의 언어를 통해서, '선하다good', '행복하다happy' 같은 단어들은 철저하게 피상적인 것들이 되어 간다. 마치 마법사 오즈의 섬세한 기계 장치를 감추고 있는, 얼핏 '마법 같은' 겉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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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이면에 있다. <위키드>를 보다 보면 결국 이러한 체제의 코어에는 뒤틀린 자기 중심성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오즈(와 그에 동조하던 때의 글린다)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공리주의적 화법을 많이 사용한다. 얼핏 만인을 향하는 듯하고, 그다지 진실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온한 방식이다. 그러나 "좋다good"는 건 누가 정하지? 다수는 언제나 선한가? 공리주의적 관점의 여러 이점도 있지만 공리주의적 관점이 가장 메인에 서면 안되는 이유를 <위키드>에서 본다. 결국 "좋은good" 것들이 불편하고 낯선 것, 어색해서 피하고 싶은 것들을 골라내기 너무 쉽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배제한 축제의 땅은 결코 "좋은" 곳이 될 수 없다. 엘파바는 그 사실을 직시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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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과 "열린" 것 사이, 우리의 선택

엘파바와 글린다는 얼핏 정반대처럼 보인다. 엘파바는 초록 피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고 자랐고, 마법사를 만나면 자신의 피부를 평범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 생각이었을 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섞이고 사랑받는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동시에 큰 노력 없이 태생적으로 마법과 곧장 공명할 수 있는, 그리머리 마법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반대로 글린다는 어린 시절부터 만인의 인정과 사랑, 거의 '추앙'을 받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친구들에게도 다소 시혜적이고 우아한 귀족적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글린다의 마음에는 마법에 대한 욕심이 있다. 마법 지팡이를 흔들고 그리머리를 읽어내며 마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결국 둘은 스스로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 상태로, 마음에 꿈을 품고 있으며, 그 꿈이 깨지지 않게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동시에 서로로 인해 넓어진 시야각에 들어온 것들이 그 꿈에 섞여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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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대조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글린다의 웨딩홀과 엘파바의 지하 철창이 교차되는 장면이다. (동시에 이는 인류사의 잔인한 몇몇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예를 들면 오래 전 가나의 해안가에 세워졌던 하얗고 높은 성들. 거기서 총독은 집무를 보았고, 사람들은 성 안의 교회당에서 기도의 손을 모았다. 그 바로 아래 십수 미터 아래 지하 던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던 것을 과연 알았을까. 던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더러는 그 안에서 죽었고, 더러는 고개도 들 수 없는 좁은 계단을 따라 해안가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문을 벗어난 이들은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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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둘의 여정을 보며 내심 궁금해졌다. 과연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과, 타인에게 열려 있는 소망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겉만 보면 오즈나 엘파바나 "타인들을 위해" 어떤 지향점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 차이를 두 사람도 알고 관객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순수한 선의란 것도 없음을 안다. 그리머리를 가지고 부단히 애쓰는 엘파바의 마법은 어쩐지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누군가를 돕거나 구하려는 노력들은 온전하게 그가 희망한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냥 관심을 갈구하는 건 아닌지 엘파바도 혼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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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타인의 시선을 갈구하는 글린다뿐 아니라 엘파바까지, 인간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까 가스라이팅과 라벨링의 세월을 거쳐 "선한" 존재가 "사악한wicked" 존재가 되겠다는 선포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 걸까. 자기애를 덜어내려는 노력? 모두를 위해 좋은 게 무엇일지 부단하게 고민하며 사유하는 것? 아니면... 그냥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말고 먼치킨처럼 안온하게 사는 것?


그러나 (비록 마법사와 모리블의 작품은 아니었다지만) 동물 다음으로 이동권을 제한받은 존재는 먼치킨이었다. 체제가 소수자를 밀어낸다면, 체제의 가장자리에 있는 존재들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사람의 세계도 흔들리고 부서진다. 그 이유로 체제 안에서 눈을 감고자 하는 이들은 안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결국 중심부의 존재들끼리만 관계를 맺는 선택을 한다. 같은 아파트 거주자끼리만 자녀 소개를 시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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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소망의 가능성은 마법이 아닌 관계에서 찾아지는 게 아닐까. 피예로와 엘파바의 사랑의 노래는 서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looking at things in another way"에 기인한다. 세상이 규정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주눅들어 있던 엘파바에게 피예로가 건넨 사랑의 말, 그리고 피예로가 겪은 일 앞에 엘파바가 돌려준 사랑의 말이다. 이는 피예로와 엘파바 이전에, 엘파바와 글린다 사이에서 이미 기능했던 감정이기도 하다. "너로 인해 because I knew you", 서로를 앎으로써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세계를 보게 되었고, 그래서 이전의 자신과는 영영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고백은 <위키드>에서 눈물 글썽거리며 추던 춤이 어떤 마음으로 자라났는지 명확하게 드러낸다.


아름다운 넘버를 들으며, 관객석에서도 <위키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위키드>의 세계에서는 마법이 힘의 정점(오즈)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엘파바도 마법의 힘을 지렛대 삼아 그들에게 대적하기 때문에, 마법이 굉장히 커다란 무엇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렇지 않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처음으로 오즈의 기계장치가 드러났을 때의 그 초라한 감정이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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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의 세계에서 마법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다. 유능한 마법사처럼 보였던 오즈는 기계장치로 마법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고, 날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자 마담 모리블은 그의 뒤에서 언어를 혼탁하게 섞는 데에만 마법을 사용한다. 선의로 움직이는 엘파바의 마법조차 의도대로 되는 때가 없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세상,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한 세상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의가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고, 사랑과 열정이 반드시 보답 받는다는 보장도 없으며, 파먹고 살아갈 추억마저 내 손에 부서질 때도 있다. 영영 갈라지는 관계의 길도 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선택하며, 기계적 산수 대신 사랑의 감정으로 바라본다면 변화는 그 길 끝에 있다. 세상의 가장자리가 무너지고 누군가의 존재가 밀려나지 않게 싸우는 것. 설령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 해도, 끝내 생에 최선을 다하는 것. 서로 다른 존재들과 섞여들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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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포 굿>을 보고 나오니 소설 <위키드>가 궁금해졌고, 오랜만에 <오즈의 마법사>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주디 갈란드의 청아한 목소리도 오랜만에 다시 듣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이 모든 작품들을 아우르는 동안 내가 읽어내는 게 체제의 폭력성과 거기 맞서는 사랑이라면, 나는 과연 무엇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지 궁금해졌다. 노란 벽돌 길에 안녕을 고하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지. 137분 동안 <위키드: 포 굿>의 노란 벽돌 길을 걸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또 어디를 향할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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