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깨달았던 것과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것
어젯밤 올라온 지정 글감이 맘에 들었다. '깨달음'도 맘에 들지만, '사소한'은 더욱 맘에 들었다. 거창한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슬렁거리지만, 결국 내가 얻을 수 있는 진실은 사소한 것들에 가득 담겨 있다는 걸 안다. 거창한 것이 대단치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단지, 사소한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내 맘이다. 그리고 내 바람이다. 사소한 깨달음은 매일 일상 중에 일어날 수 있다.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이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어제 글감을 받아 들자마자 수십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새내기일 때 몇 명의 반주를 맡았다. 그중 한 사람이 성악을 전공하는 복학생 선배였는데 굉장히 연습을 열심히 하지만 레슨 때마다 만족할 만한 피드백을 못 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교수님이 원하는 소리를 뽑아내야 하는데 선배는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 일까 싶은데 그때는 참 놀랍게 받아들였던 이야기를 들었다. 포르티시모의 소리를 내는 것과 피아니시모의 소리를 내는 것 중 어떤 게 더 힘들까 하는 얘기였다.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소리가 날 듯 말 듯 작아지는 부분의 레슨을 하던 중에 교수님이 던진 질문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면 당연히 포르테시모이다. 크고 강한 소리를 내야 하니 몸이라는 악기에 얼마나 힘을 주어야 할까. 생각해보지도 않고 선배는 포르테시모라 했다. 교수님은 피아노 위에 무거운 컵을 하나 올려놓으셨다. 이 컵을 세게 소리가 나도록 놓아 보라고 시키자 선배는 쿵 소리를 내며 컵을 내려놨다. 그리고 이번엔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면서 컵을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선배는 끙하면서 들릴락 말락 한 소리를 냈다. 피아니시모가 더 힘든 것이다. 더 힘들고 공을 들여야 아름답게 사라지는 듯한 피아니시모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직접 해보면 아는 것인데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 엉뚱한 정답을 내기 쉬운 이야기다. 소리를 내는 일만 그럴까. 아니, 사는 일이 다 그렇다. 큰소리치고 화내는 일이 훨씬 더 쉽다. 아무 말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반응만 내놓는 건 그보다 훨씬 힘든 일일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내가 가진 것의 반대를 내놓는 것이 힘든 것이다. 그것이 더 옳은 일인가, 더 멋진 것인가 하는 건 그다음의 문제다. 내게 없거나, 적은 것을 내 안에서 뽑아내는 것이 힘든 것이다. 아마 그때의 그 선배는 목소리가 아주 우렁찬 사람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가늘고 고운 소리를 내는 하이 소프라노였다면 교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다.
이 일련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사람들 누구나 자신의 고유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루 24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타고난 천성과 환경의 합작품으로 이미 몸에 편한 무언가를 입 듯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어떤 순간에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때 온 힘을 다하여 그것을 연기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정말 죽을힘, 온 힘을 다하여야 한다. 다른 누군가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온 힘을 다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쉽게 다른 사람에 대해 평가하고 또 비난하거나 원망할 수 있다. 그렇게 자주 나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남과 소통하는데 오해를 하고 만다.
오늘 종일 이 사소한 깨달음에 사로 잡혔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오래전 내가 깨달았던 것과 지금의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서로 다르다. 거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결론을 맺게 될 터인데 하나의 이야기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 신기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래전 그날 얻은 것과 오늘 내가 얻은 것 모두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어리둥절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