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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May 18. 2021

과학 윤리의 미래

아들이랑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보았다. 한 회기만 봐도 눈이 방사능에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고 공포에 와들와들 떨렸다.

아들이 보면서 그런다.

“물질이란 게 정말 희한하지. 열도 안 나는데 타 죽는 거네.”

물론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정말 희한한 것이다.

저런 희한한 것이 많지 않아 오랜 세월 인류는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에 기대어  살아왔다.

난 고등학교 때 문과를 택해 분자식을 외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너무 좋았지만 화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좋아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숫자와 도형으로 치환해 물질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냈을 거에 생각이 다다르면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싶을 정도이다.

주기율표를 너무 좋아한다.

그 배열이나 순서를 외우는 것보다

하나하나 채워진 주기율표 존재 자체가 경이롭다.


내가 과학을 좋아하는 방식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이성을 이용해 숫자나 형식을 만들고

가설을 세워 실험을 하고

이론을 만들어 예측을 하여

오백 년 전만 해도 두려움에 떨고

이유 없이 죽거니 위험에 처해야 했던 많은 일들을 해결했다. 과학은 사실 그래서 인류의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그 정신 맨 밑에 휴머니즘이 깔려있는 것이다.

원자로도 처음엔 아마 그런 것의 일종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식으론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과학적 산물과 시스템이 이 문명을 받치고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우주의 비밀을 캐려는 인류는

더 이상 지구의 삶에 최적화된 감각기관으론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원리를 눈앞에 맞닥뜨리고 있다.


한 철학자는 우리에게 우주란

몇 초만 기억하는 금붕어가 어항 끝에서 돌아

다시 헤엄쳐온 곳을 되돌아 갈 때마다 만나는

새로운 풍경과 똑같은 거라고 표현했다.

즉 우리의 이성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감각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광대한 우주는 그저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곳에 걸어놓은 걸개그림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드라마를 통해 원자로 사고 후 평범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희생과 관료들의 무모한 대처. 과학자들의 탐욕스러운 은폐를 보면서 그저 우리가 가진 것의 한계를 느꼈다.

어쩌면 이우환 화백의 말처럼

인류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을지도 모르고

문명은 서서히 붕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상식과 이성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문명을 인류는 다룰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간이 탐구할 진리들은 어쩌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고

더 이상 어쩌지도 못하고

우리 감각 세계의 행복을 돕지 못할 것들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윤리가 힘을 못 쓸 수 밖에. 윤리도 사실 지구와 몸이라는 한계 내에서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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