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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Apr 11. 2022

대화의 기쁨

<나의 눈부신 친구> 연작을 읽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에서 느끼는 즐거움 중 가장 큰 쾌감을 주는 활동은 무엇일까?

마약의 쾌락을 가늠할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락의 최고치이자 기준치를 섹스로 정한다. 그럼에도 더 짜릿한 기쁨으로 나는 대화을 꼽는다.

영적인 섹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없다. 열반은 깨달음이 주는 에너지로 존재의 파장이 바뀌는 경험인데 모든 구원은 계시가 아니라 대화에서 오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얘기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얘기하고 싶은 상대는 너무나도 귀하다. 그런 사람을 인생에서 만난다는 거 자체가 기적과도 같다. 아니 내 경우가 그런 것 같다. 대화의 세계는 마치 우리의 정신 구조에 자유로운 바람이 드나들게 하는 것과 같다. 이쪽 문이 열릴 때 저쪽문도 열려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어야 한다. 어떤 방문은 내가 열기도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무시무시하다. 이 방이 열릴 때는 폭풍우가 치고 서로 꽝꽝 문이 닫히기도 한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문을 걸어 잠그고 싶게도 한다.


나의 눈부신 친구의 주인공 엘레나는 자신의 나쁜 면을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 릴라에게 매혹된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놀라운 매력을 동경하면서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그녀를 동일시하였다가 부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녀에게 실망하고 질투하고 경쟁하다가도 그녀에게 승인받으려고 하고 어린 시잘처럼 그녀와의 대화가 통할 때 마다 사랑, 섹스나 명성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희열을 맛본다. 그렇다. 대화의 희열은 한번 맛본 후에는 그 이전의 수준에서 만족할 수가 없다.

우리에겐 모두 어두운 부분과 습한 부분이 있어 삶이 무거운 것이다. 우리는 안팎으로 이걸 방어하고 관리하면서 짬짬히 예술을 감상하거나 자연에 편히 놓여있을 때에나 거풍을 하게 되는데, 릴라와 엘레나와 같은 사이라면 서로 문을 열고 바람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 둘은 인형이 떨어진 어두운 지하실에 함께 들어간 사이고 수업을 빼먹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 해변을 다녀 온다. 착한 아이라면 위험한 지하실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감히 들어서지 않았겠지만 릴라는 그러지 않았다.

 이 두 주인공이 각자 삶의 파도를 타면서 지긋지긋한 돈과 고향과 씨름하면서 간절히 원한 것은 서로가 비추어 보고 들여다 본 그 모습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환상이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화가 주는 기쁨은 어쩌면 실체가 없는 마음을 그려내고 없음과 있음을 모두 포획하는 그 순간에 있다. 그래서 그것은 미망과 다르며 우리를 고양시켜주면서 더깊이 닻을 내리게 한다. 우리를 가두던 육체가 사라지고 감각이 열리면서 오히려 확장된다.

그래서 대화의 기쁨은 당연히 육체적이고 동시에 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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