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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31. 2017

연필로 글을 쓴다는 것

마음 속 평화를 찾기 위한 나만의 의식

“7,000 원입니다.”


독일제 연필 한 다스, 휴대용 연필깎이, 그리고 지우개를 작은 봉투에 담아 건네며 점원이 말했다. 

칠천 원, 만족감에 비해 참 '그뤠잇'한 액수다.


굳이 그 날 연필 한 다스를 산 건 왜였을까. 평소 문구류에 집착하는 데다 수첩에 뭔가를 끄적거리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연필 12자루를 한 번에 산 건 초등학교 새학기 이후 처음이었다.



딱 한 번, 내 생애 가장 불안했던 시기에 연필로 수첩에다 글을 쓰며 평온함을 되찾은 적이 있다. 2013년과 2014, 2015년 상반기까지. 첫 회사를 그만둔 뒤 기자가 되겠다고 2년 동안 '언론고시'를 붙들던 때다. 하지만 안 그래도 공부하는 시간만큼이나 생각할 시간이 많아 괴로웠던 터라, 내 생각을 그대로 수첩에 옮기는 건 ‘반추작용’을 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대신 ‘필사’를 했다. 당시 성전처럼 매달렸던 법정스님의 <일기일회>를 따라 적었다.


<일기일회>는 법정스님께서 살아계실 때 주지로 계셨던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회를 하셨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책이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간결하지만 힘 있는 말씀, 문장들을 연필로 노트에 꾹꾹 눌러 썼다. 마음 속에 묻은 때를 벗겨주었던 내용을 몇 구절 실어본다.


성북동 '길상사'에 있는 아기 불상.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듯 했다.


“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 성숙해져야 합니다. 인간은 성숙해질수록 젊어집니다. 세월에 찌들지 말고 더 젊어지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때가 옵니다. 저마다 섣달 그믐달이 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래서) 기적입니다. (중략) 이런 기적 같은 삶을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하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죽음은 삶의 한 과정입니다.”


“궁극적인 자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뜬금없이 연필 한 다스를 산 건 그 때의 기억 때문이었을 거다.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는 요즘이었다. 일도, 사람도. 


직장을 옮겨 일을 한 지 2년 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의 업무역량은 발전도 후퇴도 없이 어쩌면 이렇게 한결 같으며, 그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내가 마음의 문을 열기 두려워한 딱 그만큼 나에게서 멀리 있는 건지. 그렇다고 현실을 바꾸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내 의지의 영역이 아닌 듯했다.


삶이 의지의 영역에서 멀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나는 괴로움의 칼끝을 나에게로 돌렸다. “네 역량이 늘지 않은건 너의 노력 부족 때문이야”, “사람들이 너에게 마음 쓰지 않는 건 니가 그만큼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야.” 삶이 내 의지 밖으로 벗어난 것이 역으로 내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나를 향한 칼끝이 내 남은 용기마저 다치게 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할 용기, 사람들에게 다가갈 용기, 나를 괴롭히는 현실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용기는 내 안에서 가로막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도저도 못 하는 상태에서 방향성까지 잃으며 반 년을 괴로워했다.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보내다 딱 ‘죽겠다’ 싶을 때 연필을 잡았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만, 글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책을 보고 쓸까'

서점을 들락거리다 뜻밖에 눈에 띈 책은 뜻밖에 <요가(The New Book of Yoga)>(시바난다 요가센터)라는 서적이었다.


“요가는 몸으로 시작하여 몸을 초월하는 영혼의 해탈로 끝나는 것이다.”


“몸은 수레와 같고 마음은 그것을 이끄는 운전사와 같고, 영혼은 인간의 진정한 자아다. 그리고 수레는 ‘지혜, 감정, 의지’ 세 가지 힘으로 간다.”


“긴장된 몸을 유연하게 풀어  이완시키면 마음이 평온해지며, 그러한 내적 평온의 상태에서 본래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이 요가의 핵심사상이다.”


이 책은 요가의 철학과 동작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책으로, 그 자체가 자기수양을 위한 인도요가의 철학 서적이었다. 자기 비난과 그로 인한 자신감 결여에 시달리던 나에게 '몸에서 시작해 마음으로, 나 자신으로 향하는 수행' 과정을 담은 요가 서적은 나에게 비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와 같았다.



연필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는 마음을 닦는 일이다. 돌돌돌, 사각사각, 연필심과 나무 냄새를 맡으며 글귀를 옮겨 적는 동안 내 잡념은 온전히 그 글에 의해 사라진다. 이번에 산 연필 한 다스를 다 쓸 때쯤 내 마음도 성숙해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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