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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신호등 Apr 01. 2023

원격근무 후기

한국 생활 적응의 시작

남편의 한국 이직으로 15년만에 미국 생활에 잠시 쉼표를 찍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남편과 윤재가 먼저 한국 생활을 시작하고 나는 4개월 더 미국에 머물며 회사와 생활 전반을 마무리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물론 윤재를 4개월이나 못보고 지낼수는 없으니 중간에 한번 들어간다는 계획이었고, 그래서 2월말부터 지난 일요일까지 한국에서 3주간 원격 근무를 하고 1주의 휴가를 보냈다. 


한국에 머문 4주는 앞으로 나의 미래가 어떠할지 가감없이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남편의 이직 과정을 응원하며 나는 낙관적이었다. 지금 직장에 만족하고 있지만 나도 한국에서 좋은 기회를 찾으면 되고 우리 가족이 새로운 환경과 시스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몇 개월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키즈인 윤재는 말문이 트이는 시기를 우리와 집에서 24시간 밀착하여 보낸 덕분에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고, 한국에는 학원차가 제공되는 학원들에 미국보다 쉽게 시터분들을 구할 수 있고 급할 경우 양가 부모님도 계시니 윤재도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오직 우리 둘이서 고군분투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맡아 해야했던 그 쉴틈없이 숨가빴던 생활보다 더 힘들까, 자신했다.


2월의 어느 일요일에 한국에 도착했고 월요일 아침부터 윤재를 등원시키고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부터 캘리포니아 시간대에 맞추어 원격 근무를 시작했다. 한국 시간 새벽 3시에 근무를 시작하면 캘리포니아 시간 오전 10시 미팅부터 참석할 수 있었다. 

3AM (10AM PST): 근무 시작. 

5AM (12PM PST): 캘리포니아 점심 시간. 윤재 간식 도시락을 싸고 (남편이 해놓기도 하고), 오후 미팅 러쉬가 시작되기 전에 이메일과 메세지, 업무들을 처리한다.

6AM (1PM PST): 윤재 기상. 윤재를 무릎에 앉히고 미팅을 하거나 남편이 여유 있으면 윤재 아침을 먹인다.

7AM (2PM PST): 윤재 씻고 옷 갈아입고 본격 등원 준비

7:15-7:20AM: 집을 나서야 한다!! 지금 안나가면 늦는다!! 

7:30AM - 1PM (2:30PM - 8PM PST): 조용한 집에서 집중 근무


주간 미팅이 포진해있는 시간대가 하필 윤재의 등원 준비 시간+버스 탑승 시간과 겹쳐서 괜히 급한 마음에 미적거리는 윤재에게 화를 내고 후회하는 날들도 있었고, 귀에 에어팟을 꼽고 미팅을 하며 윤재를 버스 태워 보내는 날들도 있었다. 요즘 특히 미팅이 많은 시기라 업무 시간 대부분을 미팅으로 보낸 다음 집중해서 처리해야하는 엔지니어링 일들은 업무 시간 후에 하다보니 금새 오후 1-2시가 된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윤재가 오후 3시 반이면 돌아오는데, 새벽 3시부터 근무를 한 나의 에너지 레벨은 육아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저조하기 때문이다. 어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급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일단 눕는다.  


일반적이지 않은 근무시간에 일을 하는 덕분에(?) 오후 3시 반에 하원버스 마중을 나갈 수가 있다. 하루의 후반전 시작이다. 집에 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자전거나 씽씽이를 가지고 다시 나간다. 윤재는 달리고 나는 옆에서 뛴다. 동네 이곳저곳을 누비며 새로운 놀이터도 가고 탄천 산책로도 달린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시키고 6시에 저녁을 먹는다. 식사 후 내가 식기세척기에 그릇들을 넣는 동안 윤재는 나와 함께 하고 싶은 놀이들에 대해 쫑알쫑알 이야기하며 나를 기다린다. 어서 오라고 보채다가 또 천사같이 기다리는 윤재한테 “금방 갈께, 거의 다 했어” 를 열번쯤 반복하며 부엌을 대강 정리한다. 7시 반 쯤 양치를 시키고 책을 한권 읽어주고 8시 쯤 온집안 불을 끄고 같이 눕는다. 윤재는 누워서 뒹굴뒹굴 노래도 부르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다가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잠이 들고 나도 윤재가 잠들 때쯤 기절한다. 


이런 스케쥴로 원격근무와 육아를 3주간 병행했다. 


남편은 일단 주중에 물리적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너무 적다. 남편이 노오력해서 급히 일을 마무리하고 달려오면 오후 8시. 일상적인 퇴근 시간은 그보다 늦다. 4주간 단 한번도 주중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없다. 그것이 당연한 문화, 그렇게 야근과 회식으로 일하는 한국의 시스템이 나는 여전히 의아하다. 


워크라이프 밸런스는 개인의 삶의 질 향상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으로서 본인의 가족과 아이들을 돌보고 하루 중 한두시간이나마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의무와 책임의 의미도 있다. 실리콘밸리에 저녁이 있는 삶이 있다고 야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야근은 있지만 중간에 해내야할 가족의 의무가 있을 뿐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워킹맘 워킹대드에게 늦은 퇴근은 사치다. 한국처럼 주중에는 아이의 주양육자가 조부모님이나 이모님이 되는 문화가 없기에 아이의 등/하교를 담당하는 보호자는 대부분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부모다. 그래서 부모인 직장 동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 일정한 시간에 퇴근을 한다. 곧바로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것이다. 갑자기 미팅이 잡혀서 혹은 회식이 잡혀서 아이 픽업을 못간다는 시나리오는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선생님의 퇴근 시간은 엄수되어야 할 선생님의 권리이고 그 시간까지 보호자가 오지 않으면 어린이를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해서는 보통 학교 입학 서류에 명시되어 있다. 예측가능한 업무 스케쥴이 중요한 이유다. 갑작스레 문제가 터져서 아침 저녁으로 미팅을 하며 해결에 매달리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이로 인해 육아 스케쥴이 바뀌지는 않는다. 퇴근 후 부모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회사 동료들은 저녁 9시쯤 다시 온라인으로 돌아온다. 야근의 시작이다. 이 시간대에 메세지와 이메일을 보내면 대부분의 동료들이 빠른 응답을 제공한다. 입사 첫날 두 아이의 아빠였던 매니저가 보통 이메일 처리와 슬라이드 작업은 저녁 10시부터 새벽 1시 사이에 한다고 했었는데 내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나 자신을 갈아넣으면 일도 열심히 하고 어느 정도의 육아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맞벌이 부부가 학교 외의 타인에 기대지 않고 직접 아이를 돌보고자 한다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다는 말이다. 물론 힘들다. 힘들지만 나 자신을 갈아넣고 싶은지 아닌지는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일테고, 사회와 회사의 시스템이 이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빠와 엄마가 직접 아이를 돌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라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위한 시간은 거의 없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일을 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자아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의 자아 모두 “나” 이기에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다른 분야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면 야근을 줄이거나 잠을 줄이거나 - 이 또한 선택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첫주에 느낀 건 내가 한국에서 소위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육아를 맡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학교 외 누군가에게 단 몇시간이라도 반드시 맡겨야 할 것이고 아마도 주중 대부분의 날은 아이와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학교의 하교 시간이 일단 비협조적이고 회사의 퇴근 시간은 예측이 불가하다. 열심히 일하는 문화와 책임감있는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양립할 수 없는 시스템, 그래서 주중에는 당연스레 전업 엄마나 조부모님, 이모님이 육아를 전담하고 “나” 는 일만 하면 되는 이 편하고도 불편한 문화를 눈 딱 감고 받아들여야 정상적인 직장 생활이 가능해 보인다. 새벽 3시에 근무를 시작하는 나의 비정상적인 원격근무 스케쥴이 오히려 한국에서 일과 육아의 병행을 가능케 하는 이 아이러니란.


아직 학원을 연달아 보내기엔 너무 어리고 이모님은 얼마나 믿고 맡길 수 있는지 가늠이 안된다. 6시 퇴근을 위해 아이 하교 후 3시간을 이모님께 맡겼는데 어느 날 회사에서 일하다가 아이가 없어졌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무서운 이야기 (이모님이 잠깐 핸드폰을 보느라 아이가 놀이터 밖으로 나가는 걸 놓쳤다고 한다) 는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좋은 이모님은 어떻게 찾는걸까. 집에만 있으면 이모님과 함께도 괜찮을까. 이런 고민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모두가 편안하고 익숙한 시스템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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