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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재비 Jul 07. 2023

After 챗GPT 0.5년, 그대로라 다행이다

기술 경쟁, 상품화, AI 윤리 사이를 허우적 거렸던 AI 마케터의 회고


기술의 파도가 이번엔 좀 거칠었다. 

 

어쩌다 넘어버린 진입 장벽 

그래도 이제 10년차라고 가끔 커리어 특강 같은 곳에 불려 나간다. 내 경력은 실낱 같은 희망을 찾고 싶은 주니어 에겐 꽤나 희망적으로 보이는 케이스 였던 것 같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IT 회사에서 교육 관련 사회 공헌 사업을 하다가, 당시에 떠오르던 AI 스타트업의 마케팅 리드로 AI 업계에 발을 들였다. 진입 장벽 높다는 AI 업계에 마케팅 리드로 마케팅 경력도 없이 냅다 뛰어들어간 나에게 주니어들은 ‘How come?’이란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저 난 파도를 탔을 뿐이라고 했다. 내 자신의 역할을 BD다, PM이다, 마케터이다 규정한 바 단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 중 한 가지의 이름으로 영원히 불릴 마음이 없으며 기술의 파도를 그저 타고 있다고. 전문성을 강조하는 시대지만 나는 제네럴리스트로 지독하게 살아남겠노라 했다. 


컴퓨터 비전 관련 기술을 다루던 회사에서 자연어 관련 회사로 넘어갈 때도 몹시나 가벼운 마음이었다. CV, NLP는 인공지능 기술과 시장의 양대 산맥이니, 한쪽을 경험해 봤으면 이왕지사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한 쪽도 마저 경험해 보겠다는 것 뿐이었다. 상품화가 기복이 있어 당시에 마케터들이 모두 퇴사하고 팀원이 하나도 없다 하여 더 잘 되었다 하였다. 2년 동안 거의 10배가 성장했던 직전 회사에서 수 많은 채용과 평가, R&R 관리, 목표 관리 등을 하면서 전두엽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팀원 각자가 성장하면서 나도 행복하고 성장을 느끼는 환경 형성은 묘연하게 느껴졌다. 리거시나 책임져야 할 팀원 없다면 시원하게 제가 다 하나씩 만들어 볼게요. 지금부터 계속 상품화 하시죠! 그저 늘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결정하고 뒤에 감당하는 나였다. 


놀랍게도 NFT 제품화도 했다 

그리고 2023년. 2023년을 시작하는 시점에는 굉장히 마음이 헛헛했다. 놀랍게도 2022년에 가장 몰두했던 프로젝트가 NFT 프로젝트 였기 때문이다. 웹3와 NFT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알듯이… 더 이상 말 하고 싶지가 않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 경계는 더욱 흐릿해 지기만 한다. 다만, 2022년의 시장과 2023년의 NFT 시장은 좀 그랬다.


마케팅할 시장이 없다… 나는 이제 뭘 하지? 

지금도 그렇지만, 일이라는 것에 너무 많은 정체성을 쏟았던 나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지경이었다. 


BANG! 챗GPT의 등장 

그러다가 갑자기 BANG! 챗GPT가 등장해 버렸다. 이쯤에 나는 불안감 때문인지, 이사간 집의 환경 변화 때문인지 매일 강렬한 꿈을 꾸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총에 맞는다던가 칼에 맞는다던가 뭐 대단한 것을 본다던가 이런 강렬한 인상을 가진 꿈들을 연달아 꾸고 있었는데 검색을 해 보면 대단한 길몽의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길몽들이 회사에 넘어가지 않기를…내 개인사를 빛나게 하는 길몽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내 개인사는 조용했고 업무 전화가 불이 나기 시작했다. 


챗GPT로 난리 나기 일주일 전, 대화형 AI 기술 동향에 대한 기획 기사를 작성해서 보도했었던 것은 훌륭한 도화선이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시기가 묘하게 겹치면서 언론의 주목도가 높아졌다. 새로운 기술이 갑자기 툭 튀어 나오면 다들 어리둥절해서 누군가에게 뭐라도 묻고 싶어했다. 그렇게 나는 챗GPT가 무엇이며 인공지능 챗봇이 무엇이며와 하는 단순 응답에서부터, 생성형AI 시대에 맞는 기업 이미지를 갖기 위한 언론 포지셔닝 작업까지 마음의 준비도 없이 혼자서 바통을 던지고 받는 이어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제품화, 제품 고도화 경쟁 

매일 아침 실리콘밸리발 뉴스를 확인하여 새로운 제품이 나오지 않으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사내 정보 공유 채널들이 활성화되고 ‘도대체 어떤 사태인가, 제품인가, 기술인가’를 알아보는 대화들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윽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관련 사이트와 책 등이 세상에 터져 나오고, 강의 자료나 트렌드 요약 같은 것들은 2-3주만 지나면 더 이상 트렌디 하지 않게 되었다. 회사에서 머리를 모아 상반기 사업 전략을 쥐어 짜내어 정리하여도 2-3주가 지나고 나서 보니 매력적으로 보이지가 않았고 실정에 맞지 않게 되었다. 


우리 회사엔 시니어가 참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정도 수준의 불확실성 시장을 겪어본 바 없었다. 앞으로 기술 변혁은 늘 이런걸까?


극도의 불확실성 속에 기술 트렌드의 끈을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으로 느껴졌다. 큰 기술적 진보가 업계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던 우리 모두를 리셋 시켰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도 감당하기 어려운 전력으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타임 포트가 열리더니 우리가 한번도 도달해 보지 못했던 지점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우리가 지켜오고 만들어왔던 기술들은 우리 만의 자산임이 분명했지만, 위기는 곧 기회이고 기존 기술이 없었던 신생 회사들의 움직임도 가볍고 민첩했다. 매일 새로운 기술적 진보가 있을때 제품화가 더 어렵다는 것도 배웠다. 아이폰 15가 출시 임박할 때, 아이폰 14를 사는 사람이 없듯이. 하지만 다음 기술은 분명히 진보할 것이면서도 매우 불확실한 것이었고, 불확실성을 뚫고 매일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하는 숙명을 덤덤히 받아 들여야 했다. 


기사, 홈페이지, 마케팅 에셋을 매일 같이 갈아 치웠다. 몹시 혼란할 때도 정제된 메시지를 만들어 자신있게 전달해야만 하는 내 팔자가 몹시 고되게 느껴졌다. 급박한 시장 상황에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이 병렬적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때로는 기획 문서 하나 구경하지 못한 채로 맹렬한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 보기도 했다. 마음 속이 복잡했다. 대화형 AI 제품은 내가 지금껏 경험했던 어떤 제품군보다 어려웠고, 그 와중에 안에 들어간 기술에 대한 정보도 스스로 습득해야 했고, AI 제품의 윤리적 이슈에 대해서도 공부가 필요했다.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AGI로 가는 길목에서의 아주 중요한 선택이 될 지도 모른다는 요상한 책임감도 자꾸 들었다. 


무튼 홈페이지를 갈아 끼웠고, 또 갈았고, 소개서를 고치고 또 고쳤으며, 기존 제품은 리브랜딩하고 아애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기도 했다. 나만 그랬을까. 동료들도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덕분에 PoC가 진행되고 제품 데모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6개월 안에 일어난 일이라니. 


날아가 버린 6개월. 

6개월. 여전히 나는 1인 마케터였다. 혼자서 박람회 3개를 2주 단위로 준비하고 나니, 코엑스에서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귀에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고 정신 차려보니 여름이었다. 매우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사실 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제품화 전쟁’은 진행형이다. 다만 다행히도 GPT-5는 아직 먼 이야기인 것 같고, 걱정이 많았던 윤리 이슈도 나만 걱정했던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할 사람도 많아지고 고민의 결과들도 종종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일이 삶의 많은 것을 차지하게 된 다소 비정상적인 상태로 살고 있어서, 기술이 너무 빨리 변화할 때 덩달아 심란한 기분을 많이 겪었다. 마케터로서 시장을 미리 예측하거나 선도하지 못하고 시장의 격정적 소용돌이에 계속 말려들어가는 느낌, 그저 일하는 한 명의 노동자로서 이렇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고 있는가?라고 쏟아지는 걱정들. 쏟아지는 자료들에 포화된 내 머리와 따라가지 못하는 체력. 일에 지배 당해 예민해진 성격과 여유 없는 마음과 일이 바쁜 만큼 단조로워지고 발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나의 일상. 

그리고 그 동안의 기술 발전 속도는 정말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꿀 것 같았던. 


아니, 제자리라서 다행인거야

6개월의 업무 평가를 진행하다가 문득 이런 저런 생각이 길어졌고 결국 한 편의 글이 되고야 말았다. 바쁘긴 했었는데 무슨 일을 했었나… 회고하며 글로 적고 보니 엄청난 격변기에도 굳건하게 잘 지켜낸 것들도 많았다. 


NFT를 하고서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도 감사하고, 불경기에 많은 직업적 변동을 겪은 주변인들도 있는데 이 미천한 재주로 커리어를 연속적으로 쌓아 올릴 수 있었다는 것도 하늘이 도운 일이다. 그리고 미쳐 돌아가던 이 AI 시장을 정면으로 몸통 박치기한 경험은 돈으로 못 살 것 같다. 앞으로도 나를 먹고 살게 해 줄 지도 모를 일.


이 글을 낙관으로도, 비관으로도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그저 열린 결말로 분주했던 내 자신을 다독여 주고 싶었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경험은 놓치면 안될 것 같은 초조한 기회, 그 동안 노력해왔던 기술 투자에 대한 약간의 박탈감,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기대감과 희망일 것이다. 정말로 여러 층위를 가진 시간 이었으리라. 그리고 누군가에겐 팝콘각, 난 튀겨지는 팝콘…? 그런거겠지. 


그냥 그랬어요. 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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