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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Nov 15. 2020

학창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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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큰 천체 곁을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회전하는 위성처럼, 어쩌면 영원히 도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차게 꿈틀대던 병은 점차 힘을 잃다 이내 멈추고 만다. 가늘고 기다란 녹빛의 주둥이를 나에게 들이민 채로.


ㅡ오, 김정하!


나이가 몇인데 이 짓거리냐고 투덜대는 나와는 달리, 동창들은 제대로 걸렸다는 듯 실실 웃고 있었다. 무슨 상상을 하면 저런 미소가 나올지 나로서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스스로 평가하기에 그 시절 내 존재감은 먼지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니까.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름을 듣고 나서야 그런 애도 있었지 하고 되뇌는 그런 흔한 학생 중 하나 말이다. 그렇기에 의례상 하는 반응이겠거니 여기며, 질문이 없더라도 적당히 차례를 넘겨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ㅡ내가 물어볼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여성이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길게 땋은 머리를 앞으로 넘긴 여성. 분명 면식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이름만큼은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어딘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어오는 짓궂은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ㅡ너, 왜 우리랑 말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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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그다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한 나는 타지의 그저 그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누군가에게 알려주면 다시 한번 묻거나, 비슷한 다른 학교의 이름을 되묻는 그런 고등학교 말이다. 본디 무신경한 성격인지라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교내에 지인 한 명 없다는 것만큼은 그런 나로서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첫날부터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저들끼리 즐겁게 떠드는 모습까지 보고 있자면 말이다.

지금 시대라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봤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딱히 시간 때울 게 없던 나는 도서관에 드나들기를 선택했더랬다. 그리고 딱히 안락하진 않았지만, 고요했던 그곳에서 자연스레 손 가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충 이문열 작가의 <삼국지>를 시작으로 각종 역사책을,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부터 시작해서 각종 문학 도서까지 손을 뻗는 그런 모양새였다.

딱히 친구를 사귀어야 할 새 학기에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결과로 따지자면 썩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 시절 사내놈들이 그렇듯 뭘 그렇게 읽냐고 물어오는 녀석을 시작으로 교우 관계는 반 전체로 넓어졌고, 독서에서 비롯된 흥미는 점차 공부까지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래, 중요한 것은 공부였다. 공부를 하지 않아 진학한 학교에서 같잖은 이유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 그것이 내 학창 시절 가히 전부라 부를만한 일이었다.


딱히 공부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냥 시험 기간이면 책 대신 교과서를 읽는 그런 생활이 1년 즈음 지났을 때 내 성적은 남자로서는 1등이었고, 전교에서는 10등을 오가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래, 남자로는 1등 이라니. 참으로 쪼잔한 계산식이 아닐 수 없지만, 나로서도 딱히 알고 싶진 않았던 등수였다. 어느 날 담임이 출석부의 이름을 부르듯 내 등수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뭐,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날 내 안에 모종의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자존심을 걸고 승부할 때 피어나는 것과 비슷했지만, 그 보다는 좀 더 뜨거웠던 것이었다. 그것을 품은 숙주를 불태울 정도로.

공부가 독서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등수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된 건 아마도 그 날 이후였을 것이다. 점차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탓에 점점 재미는 없어졌지만, 등수는 그와 반대로 착실히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옳은 길인가 고민하면서도 휙휙 바뀌는 교과서를 뒤쫓느라 허덕이는 그런 나날의 반복이었으니까. 

덕분이랄까, 다시 1년이 지났을 때엔 교내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가파른 상승을 이루어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기대했던 만족감 따위는 찾아오지 않았다. 2등이라는 자리는 그런 것이었다. 생에 처음 도달해도 잠시도 머물고 싶지 않은, 그런 자리.


이제와 시인하자면, 그즈음의 내 승부욕은 정상적인 형상에서 꽤나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패배감, 질투, 자격지심 온갖 것들이 뒤섞여 악취를 뿌리며 걸어 다녔으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꼴에 맞지 않는 공부량을 유지하다 보니, 나 자신도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동력이, 이유가 절실했고 그러다 찾아낸 것이 바로 미워하는 힘이었다. 선의의 경쟁을 포기하고, 악에 받혀 매달리는 것. 그녀로 인해 정상의 경치 구경 한 번 못 해봤다고, 상이란 상은 죄다 쓸어가는 탓에 수시까지 포기했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에 맹목적으로 매달려 그녀를 속으로 증오했더랬다.

우스운 건, 이 또한 대입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생성됐는지, 그녀보다 어찌저찌 더 높은 등급을 요구하는 대학에 합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대입 결과에 한할 뿐이었다.

1등을 넘어선 2등이라니. 포효라도 내질러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졸업식 당일 축하한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철퍽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만유인력이 고장 나 중력이 두 배에 달하면 보일만한 모양새로 비척거렸다.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습관처럼 그 순간조차 그녀를 미워하려 했지만, 그녀의 진심 어린 미소에 되려 역공까지 당하고 말았더랬다. 승자의 미소를 보여줄까 즐거운 상상도 품었던 것 같은데. 글쎄, 어째서였을까.


ㅡ왜 우리랑 말 안 했냐니깐?


앙칼지면서도 장난기 담긴 목소리가 다시금 나를 불러 세웠다. 초점까지 돌아온 자리엔 그 새 어딘가 익숙해진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정상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내 증오의 원천. 지금은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길게 땋은 머리를 앞으로 넘긴 여성. 

점차 기억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래, 머리는 땋고 다니지 않았지만 원체 창백할 정도로 하얀 사람이었다. 볼살이 조금 빠진 듯 턱은 갸름해지고, 눈은 화장 탓인지 조금 커 보였지만 그렇게 놀랍지는 않은 정도였다. 세상은 언제나 나를 두고 변해가니까. 그녀와 같이 적어도 내가 눈치챌 수 있는 정도의 변화라면, 내가 되려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 물론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은 그녀의 똑똑함에는 어쩐지 애환이 스미는 느낌이지만.


당시 우리 학교는 야자가 자율이었던 탓에 참석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고, 때문에 내가 홀로 교실 불을 끄고 나오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정규 수업이 끝나면 학원이라도 가는지 보통 야자는 건너뛰는 일이 많았는데, 어쩐 이유에서인지 하루는 끝까지 야자를 참석해 단 둘이 야자를 마치던 날이 있었다. 


'너, 왜 나랑 말 안 해?'

그 날 교실 불을 끄고 돌아서는 내게 그녀가 내게 건넨 말이었고, 그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나눈 말이었다. 그래, 그녀는 그 날의 질문을 나와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다시 꺼낸 것이었다. 

저렇게 묻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날 답변을 안 했나 싶었지만, 그 날의 기억은 떠오르질 않았다. 글쎄, 당시의 내 성격을 감안하면 차마 사실대로 말 못 하고 어버버하고 말지 않았을까.


지금 꺼내기에도 낯부끄러운 말임은 틀림이 없는데, 어쩐지 못 꺼낼 이야기는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글쎄, 추억에 희석이라도 된 걸까, 아니면 내 어떤 조각들이 세월에 녹아내려서일까. 무엇이든 딱히 상관없었지만, 중요한 건 나 역시도 털어놓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내 스스로도, 그녀에게도 그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만의 이유는 알 수 없겠지만, 마냥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고도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조각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빼내고 가는 것이 좋을 테니까. 

나는 한 잔을 입가에 털어놓은 뒤 그녀를 주시했고,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어딘가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내 입가는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내 부끄러운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 몰랐을까. 그 총명했던 사람은 치기 어렸던 내 증오를 모를 수가 없었고, 그 멍청했던 나는 그것을 숨길 줄도 몰랐을 텐데.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 앞에서 완패였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그녀와는 달리, 나는 그녀가 무슨 의도를 품고 물어본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부에서도, 인성에서도 그리고 대인관계에서도 패배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패배를 인지한 순간 내 입꼬리 역시 그녀를 따라 슬쩍 올라가고 있었다.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못하는 몸이라니. 내 스스로도 꼴이 우스워서일까, 억누르려던 입꼬리는 반동으로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고 곧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되었다. 

내가 둔 과거의 악수를 지금껏 놓치지 않은 집요한 사람, 알면서도 그 어떤 내색 한 번 내지 않았던 사람. 그렇기에 1등의 자리에 걸맞은 그녀에게 즐거운 패배감을 느끼며, 나는 입이 열린 김에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답을 꺼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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