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내 인생의 한 사람' 칼럼
세바시가 첫 방송이 되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세바시앱이 생겼다. 방송 프로그램이 독자적인 시청용 앱을 배포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CBS TV 같은 중소 방송사의 신규 프로그램 주제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 후로 앱 사용자가 30만 명 이상 모였다. 앱은 세바시를 세상에 퍼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철호 대표 덕분이었다. 그는 오지큐(OGQ)라는 회사의 창업자였다. 오지큐는 ‘HD백그라운드’라는 모바일용 이미지 플랫폼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초기기업)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세바시 강연자로 참여한 그는, 세바시의 강연 콘텐츠가 세상에 이롭다는 판단으로 스스로 앱을 만들어 기부했다. 2011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999년이었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PD였던 나는 그를 전화로 연결해, 방송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당시 PD가 나였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회사를 세웠다. 정치인 개개인을 종목화하고, 그들의 실제 정치 활동을 기반으로 사용자들이 정치인 주식을 사고파는 정치인 증권 시장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였다. 회사의 이름은 ‘포스닥’이었다. 포스닥은 그 창의성과 혁신성 때문에 당시 방송과 언론가의 화제가 되었다. 나도 당시 그를 섭외한 수많은 PD와 기자 중의 하나였다.
2016년에 한 번 더 그의 덕을 봤다. 그해 4월에, 나는 18년 다닌 회사를 떠났다. 세바시의 독립 법인 설립을 두고 회사 내부에서 찬반 갈등을 벌이던 중 나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퇴사는 일종의 마지막 호소 전략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중년 백수 하나가 더 추가되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신철호 대표가 나에게 한 뉴스 스타트업의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백수는 면했다. 평생 PD 업만 해왔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공동 대표로서 경영자-사실은 경영 인턴-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1년 뒤 2017년 4월에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세바시가 독립 회사로 출범했다.
2020년, 우리는 다시 뭉쳤다. 세바시와 오지큐는 ‘배움의 커뮤니티 플랫폼’이란 프로젝트명을 내걸고 IT 기반의 세바시 플랫폼을 공동사업으로 준비하고 있다. 양사의 개발팀이 이 플랫폼을 함께 개발중이며, 공동의 사업으로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내일을 바꾸는 배움, 세바시’. 이 계획에 따라 세바시의 슬로건도 바꿨다.
그는 내 인생에 중요한 순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업’이라는 운명 속에서 그는 내게 ‘은인’이라 불려도 좋다. 하지만 우리에게 비즈니스 파트너라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법한 딱딱한 예의나, 계산은 없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그를 ‘찰호야’라고 부른다. ‘철호’ 보다는 더 촌스럽고 재미있게 들려서 그렇게 부른다. 그는 같은 이유로 나를 ‘밤준이 형’으로 호칭한다. 가끔은 ‘아부지’라고도 부른다. 나이 차는 두어 살이지만, 외모 차가 한 세대 이상 크게 차이난다는 걸 주장하고 싶어서이다. 남들이 보기에 철없는 사내아이들 같다.
사실 그와 나는, ‘비즈니스 파트너’ 사이가 아니다. 동시에 진지한 이야기가 어색할 정도로 친근한 사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변잡기 수다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하루 시간을 때우는 죽마고우도 아니다. 그럼 무슨 사이일까?
관계는 늘 어렵다. 내 일의 영역에서 몰입해 살다 보면 친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역설적이게도 오랜 친구와 멀어지기 마련이다. 일을 통해 만나는 사이도 쉽지 않다.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은 늘 피곤하다. 사업의 필요가 없어지면, 단호히 관계는 끊어진다. 운이 나쁘면 서로 등을 지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하며 사는 일이 고달플 때마다 떠올리는 질문이 있다.
‘삶과 일의 경계에 누군가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오늘 ‘내 인생의 한 사람’을 글로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됐다. 내게는 이미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그가 바로 신철호 대표이다.
샘터 기고 칼럼 '내 인생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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