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VIEW]
* 컨택트(Arrival, 2016)
<컨택트>의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 Contact with Arrival – 도입과 접촉하다 ]
컨택트의 영어 제목은 "Contact"가 아니다. 바로 “Arrival”“Arrival”, 도착이라는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 제목을 검색해보니 잘못된 번역의 예라는 평가가 많았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알고 있었기에 ‘외계인의 도착’을 뜻한다면 맞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영화를 본 이후에는 확실히 잘못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창에 영어제목을 다시 검색해보니 몇 가지의 의미가 나왔다. 도착, 도착한 사람 그리고도래도래, 도입, 도입.. 정확하게는 3번째의 뜻이 이 영화와 가장 부합하는 키워드였다.
ArrivalArrivalArrival
1.도착 2. 도착한 사람 3. 도래, 도입
여러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한 키워드가 아닐까. 우선 이런 종류의 SF에 도착한 나에게 접목시킬 수 있을 있을 것 같다. 사실 문과-인문계열로 이어진 평범한 내 인생에 SF는 참 어려운 분야가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에일리언과 같은 독보적인 외형을 가진 외계인에 대해서는 이질감이 참 큰 편이라 그간 큰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감상했던 적은 없기도 했고, 우주영화에 등장하는 수학적인 부분은 대체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나오는 영화라니, 어렵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나 SF영화치고는 특이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인문학도를 위한 우주영화’, 혹은‘문과판 <인터스텔라>’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우주와 외계인이 나오는데 인문학이 붙는다니,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이 영화도 기-승-전-사랑으로 이어지는 결말인걸까.
영화를 보고 나니 사람들이 표현한 것이 어떤 느낌인지 대략적으로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컨택트>의 영어제목이 “Arrival”인 것은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Arrival”은 영화 안에서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 그 자체다.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루이스' (출처: 네이버영화)
'헵타포드어'를 분석중인 '루이스'와 '이안'의 모습 (출처: 네이버영화)
<컨택트>의 외계인들은 ‘오징어’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를 지녔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징어’란 잘생긴 사람 옆에서의 그 오징어가 아니라 진짜 오징어다. 먹물을 사용해 주인공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점 또한 오징어스럽다. (영화를 본 후 ‘오징어가 땡겼다’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먹물 언어라니,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다. ‘헵타포드어’라고 불리는 이 먹물 문자는 단순한 원형 같지만 처음과 끝이 닿지 않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어딘가에 도착한다던지, 어떤 순간이 도래한다는 영화의 제목과 일치하는 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쩐지 삶과 죽음의 순환과도 닮아있다. 삶과 죽음 역시 끝맺음과 새로운 시작이 존재하는 순환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헵타포드’라고 불리는 이 외계인은 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 같은 회화문자인 ‘헵타포드어’를 사용하는데, 이 문자는 다소 수학적이다. 모양의 각도를 분석해 언어를 해석할 수 있고, 주연 배우인 ‘루이스’는 이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가르친다는 다소 신선한 발상을 행동에 옮긴다.
의사소통의 과정은 영화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진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많은 단어를 뜻하는 행동과 시각자료가 등장한다.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외계인이라니 꽤나 재미있는 조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어가 모든 문명의 초석이다.”
천체물리학 전문가인 ‘이안’은 ‘루이스’와의 첫 만남에서 ‘루이스’가 쓴 책의 서문인 이 문장을 읽어주는데 이 장면이 어쩌면 전체를 아우르는 복선이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들의 운명에 있어서도 언어는 또 다른 초석이 되었으니 꽤 그럴싸하다. 영화를 본지 시간이 좀 흐른 후 생각해보니 이 언어의 이름은 ‘헵타포드’일 수도, ‘한나’일 수도 있겠다.
[ H-A-N-N-A-H – 한나 ]
의미 없다고 생각한 먹물의 문양이 언어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왜 오묘한 기분이 들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필자 스스로 언어란 이래야한다, 라고 생각해오던 어떠한 벽(마치 ‘헵타포드’를 만나는 공간에 놓인 그 투명한 벽과도 같다)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외계, 우주의 환경에 따라 생명체의 모습도 다를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처럼 언어도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간 간과해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막연하게 <E.T.>의 한 장면처럼 필자는 외계인은 우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더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생명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헵타포드’는 의사소통의 과정이 필요한, 삶과 죽음을 겪는 어찌 보면 인간과 동등한 생명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헵타포드’ 중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이 존재하는 ‘헵타포드’는 그 순간 인간과 동등한 선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마치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인종인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기에 하나 더, 영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또 다른 존재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스미스소니언전에 전시된 사진 '금환일식을 바라보는 구경꾼' (출처: 한국정경신문, Colleen Pinski. all right reserved.)
영화에서는 개기 일식의 한 장면처럼, 어떤 흔적을 남기는 찰나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순간은 영화의 도입부로부터 시작해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순간에 더욱 빈번해진다.그 찰나에 존재하는 그녀의 이름은 ‘한나’, ‘루이스’의 딸이다.
일반적인 영화의 흐름을 생각해보았을 때 도입부에 등장했고, ‘루이스’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그녀는 과거형 혹은 현재형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이미 한번 언급했듯이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순간에 ‘한나’는 더욱 빈번해진다. 어린아이에게 어떠한 글자와 의미를 가르치듯이 ‘헵타포드’를 가르치는 ‘루이스’에게, ‘한나’의 존재는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영화 안에서 ‘한나’는 ‘헵타포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라고도 볼 수 있다. [루이스-한나]의 부모와 자식 관계가 [인간-헵타포드]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언어를 배우는 ‘헵타포드’는 마치 아이와도 같아서 어떤 한 단어를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며 가르쳐야 한다. ‘루이스’와 같이 ‘헵타포드’를 가르치는 ‘교감형 부모’가 있는 반면, ‘서툰 부모’ 중 일부는 전쟁을 선포하며 과격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육아의 과정 중 일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한나’의 존재는 여전히 매우 모호하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이미 ‘한나’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관객에게 그녀는 이미 과거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같은 선상에서 ‘한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루이스’는 아이를 잃은 아픈 상처를 가진 엄마라고 생각되며, ‘헵타포드’에 대한 애정은 모성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읽히기 쉽다. 필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고,이 사실을 관객이 범하기 쉬운 오류라고 지적하기 어려울 만큼 연출은 아주 자연스럽다. 언어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듯이 ‘루이스’는 ‘헵타포드어’를 이해하며 ‘한나’의 이미지와 자꾸 마주친다. ‘한나’를 아는 듯, 모르는 듯한 ‘루이스’의 태도는 관객에게는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이해의 포인트는 바로 ‘시간’‘시간’이다. ‘헵타포드’에게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개념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헵타포드어’와 같이, 멀리서 보아야 전체적인 그림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한나’의 존재 역시 그렇다. 그녀는 과거이자 현재, 동시에 미래다. ‘한나’의 영어이름은 ‘H-A-N-N-A-H’‘H-A-N-N-A-H’, ‘헵타포드어’와 비슷한 구조로 나열된 원형 문자임과 동시에 끝이 있는 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나’의 존재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의 만남과도 같은 것이다. ‘헵타포드어’로 해석이 가능한 미래의 존재.언어와 시간을 끌어와서 만든 영화 <컨택트>는 이렇게 문과판 <인터스텔라>가 되었다.
[ [ 삶이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삶이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
‘한나’의 존재가 영화에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다. ‘헵타포드어’는 미래를 예측하는 신비한 언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함인가?
이 답은 죽음을 앞둔 ‘한나’에게 ‘루이스’가 속삭이는 한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생각에 잠긴 '루이스' (출처: 네이버영화)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다소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시작과 끝. 그러니까 영화는 ‘루이스’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도 한다. ‘헵타포드어’를 이해하게 된 ‘루이스’가 미래의 시간을 통해 딸의 죽음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 ‘자유의지’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같은 결과를 두고 ‘이안’과 ‘루이스’의 선택이 갈린 것처럼 인간은 같은 선택지를 두고도 종종 다른 선택을 하곤 한다. 어쨌든 서로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삶은 ‘헵타포드어’처럼 어디에선가 시작되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기에 선택하지 않는 삶은 과연 행복한가? 딸의 죽음을 미리 알게 된 ‘이안’과 ‘루이스’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영화는 미래를 알게 된 인간의 선택과 그로 인한 나비효과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루이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그 사소하고 따뜻한 장면을 비출 뿐이다. ‘루이스’를 미워하는 그 순간마저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삶들을. 그리고 그런 순간을 만났음에 감사함을 느끼게끔. ‘이안’의 미래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왠지 ‘루이스’의 삶이 좀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삶이 죽음으로 흐르는 그녀의 시간 속에서 ‘한나’를 만난 것만큼 ‘루이스’에게 의미 있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결말을 보고 어쩌면 <컨택트>가 <인터스텔라>처럼 결국은 ‘사랑’으로 끝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문과판 <인터스텔라>로 불리는 이 영화의 가치는 곳곳에 숨어든 여백에 있다. 왠지 모르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헵타포트어’의 여백을, 영화의 모든 공간에 존재하는 여백들을, ‘루이스’의 선택을, 나의 삶 어느 지점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 어딘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나의 ‘한나’는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삶이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당신은 종종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쨌든 그 결말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그 선택이 무엇이어도 좋을 것 같다.마지막으로 ‘한나’의 존재를 내가 이해한 문장으로 당신에게 여백으로 남겨둔다.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시작과 끝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 그 과정은 의미가 있다그 과정은 의미가 있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