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 일하는 B가 결혼을 서울대에서 했다. 아뿔싸, 서울대는 집에서 멀고, 대중교통으로는 영 까다롭다. 축하하러 가는 길 컨디션 유지를 위해 택시를 불렀다.
“어느길로 가드릴까요?”
“기사님 추천하시는 길로 가주세요.”
“에. 그래도 뭐. 네비대로 가드릴까요?”
“상관없어요. 저, 어차피 잘 몰라요. 기사님이 운전해보셨으니 더 잘아실 거 잖아요.”
“안물어보고 가면, 뭐라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요즘에는 손님들이 다 길박사시니까… 간 보시는 분들도 있고. 처음에는 가만히 계시다가 어느길로 가는지 보고 ‘왜 이쪽길로 가냐고. 그러면 돈 더 많이 나노는데’ 이러시고… 적은 돈벌이에 위축되기도 하는데, 나이들면 마음이 더 아기가 되어서 사소한 말에도 마음상하는 것 같아요…”
“기사님이 저보다 더 부자실 거 같은데요?”
“흐흐. 집있고, 아들 둘 장가보냈어요. 제 주관을 빼놓고 운전한 지 오래 되었어요. 뭐, 편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네비가 좋은 핑계거리가 되니, 저는 이제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네비대로 가도, 뭐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요. 그래서 네비대로 가드릴지 여쭤본거에요. 이 일도 감정노동이에요…이 일 한지도 50년이 다 되었는데, 가끔 나는 왜 바보같이 한우물만 팠나 싶어요. 이거저거 해봤어야 하는데…“
“50년이요? 장인이시네요. 한우물만 판거 멋있으세요. 저는 그렇게 못살아 아쉬운데!”
“장인…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충남 광천에서 태어 났어요.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인데, 윤석열도 같아요. 그 후손인 윤장군이 조정에서 난이 일어날 것 같자, 피바람이 불 걸 알고, 홍성으로 피란와서 더 깊숙히 광천까지 일가를 이루었댑니다. 돌아가시면서 유언이 벼슬 같은 거 하지 말고, 후손들에게 농사지으며 소소하게 살 것을 부탁했대요. 그래서 그런지 농사짓는 것 외엔 다른 일상이 없었어요. 학교도 멀어서 10km쯤 매일 버스 타고 다녀야 하는데, 그 버스 본네뜨. 그게 엔진일텐데 예전엔 버스 안에 튀어나와 있었어요. 그 위에 앉아서 침흘리며 운전기사를 구경하는게 낙이었어요. 얼마나 멋있게 보였는지. 꼭 운전을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상경했어요. 그때가 1971년 고대근처에 카센터하는 친척네 집에 얹혀지내면서, 한달동안 운전면허 공부를 했어요. 그러고는 군대에 갔어요. 그런데 그시절에 면허 있는 사람이 드무니까, 바로 차출되었어요. 면허는 땄으나 운전할 차가 없어서 장농면허였는데, 운전을 시켜보더라구요. 반은 사람타고, 반은 짐싣는 트럭이 당시 닷지 트럭이라고 있었어요. 그 트럭을 운전했는데, 나중에 보니 제 신상기록에 운전 ‘A’라고 적더라구요. 그렇게 운전병이 되었어요. 처음엔 트럭을 몰다가, 부대 중령님 차를 몰게 되었어요. 제대할 때가 되자, 중령님이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을 소개 시켜 주셔서 운수회사에 들어가서 운전을 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회사차를 몰았어요. 그때 일반인들 평균 월급이 7만원인가 그랬는데, 저는 15만원 월급에 밥값5만원, 그리고 차에 200리터까지 기름 쓸 수 있는데, 포니를 몰고 다녀서 한달에 100리터 밖에 기름을 안썼어요. 그럼 주유소에서 남은 기름에 해당하는 비용을 캐시백해줬거든요. 이때가 이스라엘하고, 이집트 전쟁났던 때였어요. 그 다음에 OPEC 생기고, 여튼 기름값 엄청올랐었으니까. 이거저거 다하면 한 30만원 되었죠. 좋은 직업이었죠. 그런데 어느날 인사과 에서 부르더니 ‘미스터 윤, 미스터 윤이 회장님 차를 몰아야 겠어’ 하는 거에요. 아니 글쎄 그 회장님이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한 분이었어요. 기사들이 다 몇달 못버티고 회장님 한테 짤려서 기피대상 1호 였는데, 제가 회장님을 모시게 된거죠. 저는 성격이 유하지가 않아요. 흑백이 분명한 사람인데… 회장님 차 몰면서 씨이팔좇팔 해 가면서 한강다리에서 싸우고, 차세우고 집에 걸어간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분 차를 17년 몰았어요. 그분 성격은 불같은데, 사모님은 누나같은 다정한 성격이셨어요. 부부는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난다잖아요? 제가 회장님과 싸우고 제가 안나가면 사모님이 전화가 와서 회장님이 사모님이 운전하는 차도 안타고, 다른기사차도 안타고 택시로 회사를 나가고 있다고 하시면서, 저보고 나와달라고 사정하시면 나가게 되었죠. 그렇게 회장님이 제 차아니면 안타는데, 주말에도 움직이시니까, 전화오면 바로가고 해서 휴가가 딱히 없었어요. 회장님은 다 이룬 사람이에요. 명예도 있죠, 부도 있죠, 서울에 다니는 버스 중에 그분 지분이 상당할 것이에요. 회장님 자식 둘이 있는데, 둘다 미국 대학가서 잘 되었죠. 한 아이는 죠지타운 졸업했어요. 그래서 매년 이맘때 1월에는 회장님이 미국에 한달 정도 가는데, 그 때가 유일한 제 휴가였어요. 40대 초반즈음, 1월에 집에서 쉬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남의 집 머슴살아 주고 있구나. 내 아이들도 커가고, 남자로 태어나 사업도 해보고 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있는게 뭐가 있을까 했더니, 회장님 운수회사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으니 운수경력이 생겼더라구요. 그 당시에는 운수회사 운전경력이 있으면, 택시면허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회사 인사과에 이야기해 개인택시 면허를 따, 운전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30년 쭉 이 일을 한거죠……
세월이 정말 빨리 지나갔어요. 뭐 어려운 때도 있었고…, 다사다난 했지만 지나고 보니, 괜찮은 삶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상고를 나왔는데, 그때 당시 은행으로 갔던 친구들은 승승장구였었어요. 은행이 그때는 해가 지지 않는 공장 같았거든요. 그런데 IMF때 제일은행 없어지고, 친구들도 많이 일을 잃었죠. 그때 저는 일을 계속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대학가는 친구도 부러웠어요. 부모님이 시골서 늦둥이로 저를 낳아, 농사짓는데 농사지을 힘도 없으셔서,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제가 부모님을 부양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좀 공부에 한이 있어요. 한 친구가 건국대 야간대학을 졸업하더라구요. 저도 할려면야 했겠지만, 아이키우고, 택시하고, 부양해야 하는 부모님 도 두 어깨에 위에 있고, 영 힘들더라구요. 대신 신문은 꼬박 봤어요. 젊은 분들이 싫어하는 조중동. 신문을 꼼꼼히 보고 있어요. 제가 논리적으로 따지는 걸 좋아해요. 000 그냥반 사설도 많이 읽고. 그러구선 자식들 만큼은 어떻든 대학 잘 보내려구, 잠실에 아파트 살면서, 그때당시 강남 8학군에 아이들을 보냈어요. 아이들은 압구정에 학교에 다녔어요. 그랬는데, 첫째는 변변한 대학을 못가고 사업하고, 둘째는 육군사관학교를 갔어요. 이제는 둘다 결혼해서 자식낳고 잘삽니다. 둘째는 81년생인데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이제 고등학교 갑니다.”
“엄청 좋은 인생 같으신데요. 오히려 후회되는 것은 없으세요?”
“딱 하나 있어요. 아들 둘을 너무 엄하게 키운 것 같아요. 내 아들이 자기 아들 키우듯 다정하게 키우고 싶어요. 잘 키운다고 그런 건데, 이제와서 친해지려 해도 아이들이 저를 어려워 하는 것 같아요. 그거 말곤 없어요. 저는 술, 담배 일절 안해요. 세상 낙이랄게 따로 없어요. 운전하기 싫은적도 없어요. 쉬는 날 친구들이랑 산에가는 것 정도가 좋네요. 저는 술을 안마시니까, 산에 가서도 친구들 막걸리 마시는 데 옆에서 이야기 하다 오고. 그리고 아내 말에 절대 복종해요.”
“아까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 좋아하신다고 하셨는데, 부인 말씀은 안따지세요?”
“절대 안그러죠. 그래야 제가 편해요. 사실 제가 이일 시작하고 도시락 싸서 다녔어요. 조미료 든 음식이 싫어서. 그리고 밥값5000원 씩쳐서 20일 일하니까 10만원 별도로 아내에게 주고. 그런데 10년쯤 지나니, 밥을 사먹으라고 하더라구요. 도시락 싸기 싫다고. 그래도 계속 10만원은 줘요. 어느날 그것도 이제 그만 줘도 되지 않겠느냐 했더니, 그건 그냥 받겠다고 해서 그냥 뒀어요”
“많이 사랑하시나봐요”
“사실 아내는 제 유일한 친구입니다. 제가 성격이 모나서, 친구가 사실 별로 없어요. 사랑이라기보다 의지, 의타심이 있지요. 결국 나 죽으면 거두어 줄 사람이잖아요.”
“부인분이 먼저 돌아가실 수도 있는데…”
“흐흐. 집안 내력상 그럴일은 없을 거에요. 아파트 명의도 아내이름으로 했어요. 제가 먼저 죽으면 상속세 나오고, 아들과 자산 가를때 아들들은 그렇다 쳐도, 며느리들은 또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아내가 편하게 쓰라고... 택시가 일하기 좋아요. 요즘엔 택시 2부제가 없어졌는데, 저는 계속 이부제 처럼 일해요. 새벽 5시에 나와, 오후 다섯시까지. 낮에 점심먹고 낮잠 좀 자고 한시간에서 시간 반 쓰면, 하루 10시간쯤 일하는 셈이죠. 그렇게 2일 일하고, 하루 쉬고. 제가 하남사는 데, 4시반이면 김포에 있어도 빈차로 바로 집으로 오는 자동차도로 타요. 미련없이 고홈합니다. 쉴때는 차 소지하고, 아내가 밥하기 싫어하니, 아내 먹고 싶은 것 먹으러 가요. 둘이 4만원 이면 뒤집어 쓰거든요.”
“저희 남편도 택시 하라고 해야 겠네요. 흐흐. 좋은 직업 같아요”
“좋아요. 요즘 면허 한 1억이면 사는데, 혼자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으니. 제가 지금 일흔 둘인데, 제 건강이 괜찮은 한 계속할 수 있어요. 어차피 차는 필요한 거니까, 영업용으로 하셨다가 나중에 자가용으로 쓰셔도 되고. 그래야 여자가 편해요.”
(서울대 들어섬)
“손주가 지방 자사고를 다니는 데 엄청 공부를 잘한대요. 말로 듣기로는. 손주자랑은 팔불출 아니겠죠?”
“자식자랑이건, 손주사랑이건 저는 듣기 싫지 않던데요?”
“저는 친구가 자식자랑하는 건 듣기 싫더라구요. 흐흐. 그런데 손주는 자랑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저는 손주가 이 학교에 들어가면 좋겠어요.”
“저는 여기 멀고, 교통편 안좋아 싫던데… 친구가 이런 곳에서 결혼을 하네요. 진짜 택시타고도 한 시간 걸리고…”
“결혼식이 몇시인가요?”
“11시요”
(11:06)
“늦었네요. 그런데도 전혀 서두르지 않으셨네요. 긴 제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쓸데 없는 말이 너무 길었어요”
“아니에요. 진짜 재미있게 왔습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END)
----
마리엽편
실제로 있었던일 인데, 한나아렌트의 아래 글에 영감을 받아서 재구성해봤다.
“우리가 누군가를 ‘누구’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우리의 어휘는 혼란되어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만다... 어떤 사람이 누구였고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 일 때에만 가능하다... 이야기가 드러내는 주인공은 어떤 영웅적 자질도 필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