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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Mar 06. 2024

꿈을 꾸었다.

마리엽편   image(c)FABIO FLGEL/EYEEM/GETTY

나는 외국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왕 비행기타고 가는거, 다시 몇 번 못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아쉽지 않게 계획해야 하게 된다. 남들은 털털하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내 선택을 통해 나온 결론에 빨리 수긍해서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살면서 좋은 것만 수긍하지는 않으니까, 빨리 수긍한다 해도 그 결론에 까끌거림이 있을 때가 허다하다. 여행에서 먹고, 자고, 뭘 하는 것은 내 선택이다. 내 선택에 까끌거리는 느낌이 드는 건 더 싫다. 이게 흔치 않은 외국여행 기회라면 더.


그런데 그날은 영국에 갈 결심을 하고, 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아무런 준비 없이 공항에서 발권하고 친구 E와 갔다. 영국에는 지인 P가 지금 살고 있으니, 그에게 기대어 숙소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P에게 간다고만 알리고 비행기를 탔고, 히드로 공항 도착장에서 전화를 했다. P는 지금 자기가 묵는 곳을 알려주었다. P는 런던에 장기체류 중이다. 꼼꼼한 P가 아무데나 고르지 않았을 거다. P는 내 선택을 미룰수 있는 사람이다. 한 밤 중 우버에서 내렸더니, 도심 속 한귀퉁이 구멍처럼 나있는 허름한 골목 시작점에, 그 숙소로 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P가 1박에 20파운드 정도라고 했던가. 거저다 싶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들도 까끌거리지 않았다.


홍콩 뒷골목에 있을 법한 계단을 올라가니, 공용주방이 먼저 보였다. 형광등 불빛에 낡은 씽크대, 열쇠로 잠그는 냉장고가 있었고, 매니저는 조리도 가능하다면서 검은 웍을 나에게 주려했다. 그 웍을 내게 건내던 중 우리는 서로 웍에 녹을 발견했다. 매니저는 다시 웍을 거둬 기름으로 달궈 닦아냈다. 밤은 깊어가고, 멀리 비행한 여독에 E는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가, 이내 정해진 방으로 들어갔다. E가 가고도 매니저는 웍을 한참 닦더니 이정도면 쓸만하다고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받아 키친타월로 살짝 밀어보니, 녹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여기는 잠시니까_참을 수 있다기 보다는, 그 매니저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게 좋을 게 없다는 느낌이었다.


열쇠로 연 냉장고에 공항 도착장 맛있게 보이는 집에서 산 샌드위치와 먹을 것을 넣었다. 기분좋게 산 백화점 지하에서 산 것 같은 고급 식품들이 침침한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이 주방 안에서 먹는 다면 어떤 고급도 고급느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매니저에게 숙소를 안내 받는 중이다. 공동 샤워실을 거쳐 있을 것 같지 않은 복도를 지났다. 노란색 장판이 깔려 있고, 그 아래 어떤 충전재를 넣었는지, 바닥은 딛을 때마다 움푹 들어갔다 나왔다. 전에 유도를 하는 곳이었을까, 그런데 여기는 런던 어디쯤 되나, 지금 생각해도 별 달라질 게 없는 생각이네. 나는 여기있고, 오늘 밤은 여기다라며 생각을 껐다. 복도 같지 않은 긴 복도를 지나 내가 잘 방문이 열렸다. 구조적으로 건물 어느 한 곳 비게 된 아무곳 도 아닌 곳을 방이라고 치기로 하고 손님을 받은 것 같다. 방이라기엔 길고, 천장이 높고, 벽이 복도와 같은 페인트 벽이다. 까끌. 일단 힘들어 매트리스에 누웠다. 의외로 침구는 완전 깨끗하고 포근하다.


매트리스에 누워서 보니 여기도 노란색 장판 깔린 물렁한 바닥, 벽에는 '현금만이 세금을 피할 수 있고, 이 비즈니스로 돈을 벌 유일한 방법'이라는 게 광고처럼 디자인 되어 있었다. 숙박비 현금으로 안내면 사달이 날 것 같네, 까끌, 하며 시선을 돌려 잠이 들었다.


아침. 넓게 쳐진 커텐을 열었더니, 빅밴을 낀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런던의 전형적인 뷰와 가을 날씨에도 사람 가득한 야외수영장이 보인다. 진짜 여기 뭔가. 수영장 쪽은 분명 호텔인데, 내가 있는 곳은 분명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 호텔과 다른 건물 사이 어떤 틈을 방으로 막아 놓고 나를 들인 건가? 커튼이 열린 창 옆에 일반상점의 쇼윈도 처럼 투명 유리문이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식 계단이 수영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숙소에 수영장은 포함안되어 있겠지만,  여차하면 수영장으로 내려갈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추워서 내려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좋다 싶다. 가만. E는 시차적응이 안되었을 테고, 이제 P에게 전화해 보자. P는 긴히 상의할 게 있어 영국사는 지인을 만나러 나갔다고 했다. 벌써? 나 좀 보고가지 싶었는데,  어제도 나보러 못나올 정도로 자고 오늘도 이리 일찍이라면 영국살이가 그만큼 팍팍하나 싶기도 하고, 나 푹자고 여독 풀라고 그런건가 싶기도 하고. 이 숙소를 어찌할 지 빨리 판단해서 움직여야 한다. 20파운드. P가 묵는 곳. 뷰는 어쨌든 좋다. 짐싸서 다른 데 또 풀기는 귀찮고…감내할 수 있는 까끌.을 계산해본다.


수영장 가는 쇼윈도 문에서 유니폼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문을 열고 내방으로 들어왔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들어와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와락 잡아채 가져갔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순식간이었다. 나는 쇼윈도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나는 빠큐를 날렸다. 그가 마침내 보더니, 나에게 빠큐를 했고, 여유 있게 계단을 계속 내렸다.

나는 그가 계단아래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뭐라도 해야했다.


OOOO!


욕이 튀어 나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쌍욕을 하고 순간 너무 심했나 살짝 당황했다. 내 휘청이는 기세를 눈치챘는지, 남자가 멈추더니 '너 죽었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이내 도로 계단 위로 올라왔다. 나는 간발의 차로 쇼윈도 문을 잠갔다. 죽여버릴듯 '너, 이거 열려.' 여유있는 미소 표정의 남자. 나는 꿈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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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쓴다고 했지만, 인물/사건/배경을 생각해 내기가 힘들다. 2월 초반에 꿈꾸고 옮겨 적어 놓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썼다. 읽는 사람에게 누군가에 대한 오싹함과 불같은 화를 느끼게 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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