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발레하는 할머니
발레 클래스를 등록했다.
몇 년 동안 생각만 하고 실행은 미루던 일이다. 아이가 어릴 적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조금 더 지나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접었다. 아이가 자라고 형편이 서서히 나아져 이제 좀 배워볼까 하면 이런저런 일이 생겨 훼방을 놓았다. 여전히 시간과 돈이 부족해 보였고 발레를 시작할 적당한 때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하지 않을 이유를 끌어와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여건이 되는 날엔 내 몸이 움직이지 않을지 모른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한 해 한 해 체력은 급감하고 관절통도 찾아온 중년이 되었으니까. 미루기만 하다가 영원히 배울 기회를 잃고 말 거라는 생각에 닿자 내 안의 무언가가 움직였다. 적당한 시기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찾아 나서거나 만들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결단을 내릴 장치, 기계라면 전원을 공급할 장치가 필요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발레를 배우겠습니다!”라고 공표하기로 했다.
3년 째 지속하는 글쓰기 모임에 발레를 배우겠다는 다짐을 적어 글을 써 갔다. ‘발레 하는 할머니’가 꿈이라고. 글은 나보다 앞서 나가는 걸까. 혼자 생각만 할 때엔 터무니없어 보였는데 글로 적고 나니 가능해 보였다. 지금부터 배우면 된다고 적고 나니 이미 배움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모임 친구들 앞에서 발레 학원에 등록하겠다는 문장을 읽고 난 다음 날 수순처럼 학원에 문의 전화를 걸었다. 수업 약속을 잡고 발레복과 슈즈를 주문했다.
등록한 곳은 딸아이가 대여섯 살 때 발레를 배웠던 동네의 작은 학원이다. 집 근처라 걸어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 공표와 동시에 발레를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집 가까이에 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년이라는 나이에 발레에 대한 열망을 꺼뜨리지 않았던 것도 오가며 수시로 학원 간판을 눈에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 수업만 지켜봤던 터라 성인 취미 발레생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수업에는 나 말고 두 명의 수강생이 더 있었다. 첫날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어색해 잔뜩 움츠러든 나와 달리 매트에 앉아 가볍게 몸을 푸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여유가 흘렀다.
수업은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시작되었다. 글을 쓰고 번역일을 하는 나의 하루란 대부분 책상 앞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온몸은 딱딱하게 굳어있기 일쑤. 오랫동안 스트레칭을 하지 않아 간단한 동작에도 통증이 따라왔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표정을 관리했지만 굳은 몸 안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는 사이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스트레칭이 끝나자 선생님과 수강생들이 힘을 모아 홀 가장자리에 있던 바 두 개를 중앙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음악에 맞춰 발레 기본 동작을 연습할 차례. 선생님께서 먼저 시범을 보이며 동작의 순서를 설명해 주셨다. 낯설기도 익숙하기도 한 동작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려서부터 밖에서 뛰어놀기 좋아했던 나는 체육을 곧잘 했고 장기 자랑이나 운동회 때 친구들과 춤을 추거나 반 전체의 군무를 위해 안무를 짠 적도 있다. 전공으로 삼을 만큼 몸을 잘 썼던 건 아닌데도 춤에 대한 선망은 강렬해 대중이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 홀로 발레나 현대 무용, 한국 무용 공연을 보러 다녔다. 그러면서 재즈 댄스와 발레를 배웠다. 그게 벌써 이십여 년 전이다. 드문드문 재즈 댄스 수업을 이어가다 마지막에 발레 수업을 들었는데 당시 회사 일이 바빠지면서 3개월 정도 배우다 포기했다.
음악이 흐르고 선생님을 따라 동작을 연결하는데 이전에 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고작 3개월 정도였고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라 다 잊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몸은 희미하게나마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은 무척 희미해 제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게 반가웠다. 엉거주춤 허술한데도 클래식 선율에 집중하며 몸을 움직이는 순간, 작지만 또렷한 즐거움이 내 안에서 피어올랐다. 이십여 년 전에도 경험했던 바로 그 즐거움.
발레 수업에서는 음악에 맞춰 동작을 짓기 위해 몸 전체의 움직임에 의식을 집중하게 된다. 음악과 움직임에만 몰두하는 사이 딴 생각은 사라진다. 한 대상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이 잊히면 음악과 춤으로 지금이라는 순간이 명료해진다. 그 세상은 금세 음악과 춤으로 가득 차오르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지극에 닿기도 한다. 영적인 풍요로 가슴이 터질 듯한 순간, 그런 찰나를 나는 즐긴다. 책이나 영화 속 이야기에 빠져들어 모든 게 잊히는 순간처럼. 발레 수업에서 음악과 춤에 집중하는 사이 그런 찰나를 만나기도 한다. 그 감각이 좋아 수업을 그리워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유연성도 근력도 많이 떨어졌다. 예전에 보았던 동작이지만 정확하지 않고 순서도 다 잊어버린 상태.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대고 헤맸는데도 한 시간의 수업이 쏜살같이 지났다. 어느새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낮은 점프 동작인데도 반복하다 보니 숨이 차올랐다. 발레의 기본 동작은 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몸속 근육을 많이 쓰기 때문에 운동량이 상당하다. 그런데도 내내 즐거웠다. 어떤 기운이 나를 들어 올리는 기분이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고 못 하면 창피할 거라는 부담이 없어서 그랬다. 전문가가 아니니 못 하는 게 당연하고 처음이니까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고. 그 사실을 나는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평가받기 위한 시도도 아니었다. 온전히 자발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으로 시도한 일이 나를 기쁘게 했다. 거창한 일이나 남을 위한 일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일,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도 근사하다는 걸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시도하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값지다고.
이 모든 상황을 즐기는 여유가 생겨 더 기분 좋았다. 힘은 넘치던 젊은 시절엔 발레를 배운다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못하고 허둥대는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러 이런 당당함이 생겼다. 나의 부족과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여유, 하고 싶고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해 주고 그걸 경험할 수 있게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아량이 자랐다. 발레를 잘해서가 아니라 발레를 못하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신이 멋있다.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면서 고강도 운동을 해서인지 수업을 마치자 땀을 쏙 뺀 뒤의 개운함이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으아아아, 너무 재미있다!’라며 혼자 속으로 외치는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 두근거렸다. 배움과 시작이 삶에 활력을 부여한다. 새로울 게 뭐 있나 시큰둥해지던 중년 아줌마였는데, 견갑골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날개처럼 들썩거린다.
늦은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말을 떠올린다. 시작하는 순간이 최적기라는 것도.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던 이십 대의 나보다 체력만큼 열정도 줄어든 중년의 내가 더 좋다. 그래서 고민과 방황이 줄고 하고 싶은 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시간과 에너지 모두 적어졌지만 적은 만큼 더 귀하게 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함부로 쓰지 않는다. 내게 소중한 일,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지혜롭게 사용하는 법을 익혀간다. 타인에게 좋은 내가 아니라 내게 좋은 내가 되려고. 그런 나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아낌없이 사랑하려고. 언젠가의 좋은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그런 나로 지금의 짧은 하루를 괜찮은 날로 만들기로 한다.
작은 시도가 때로는 놀라운 변화로 이어진다. 고작 첫 수업이지만 오래도록 찾았던 대상을 만난 기분이다. 동시에 이제야 발레를 제대로 배워볼 수 있는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냥 기분 탓일까. 욕심내지 않고 조금씩 계속하다 보면 ‘발레 하는 할머니’가 되어 있겠구나,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하게 좇아갈 용기가 찾아왔다. 이제라도 왔으니 반갑고 강렬하게 너를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