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2019
늘 궁금했다. 가난한 사람은 질병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행동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설명은 와닿지 않았다. 과학적인 근거를 찾고 싶었다. 그러던 중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를 만났다.
저자는 미국인 의사인 네이딘 버크 해리스다. 그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의학과 생물학을 공부했다. 하버드의학대학원에서 공중보건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탠퍼드대학교 병원에서 소아과 레지던트로 수련했다. 2019년 1월에는 캘리포니아주 공중보건국장에 임명되어 주민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그의 이력은 주류이자 엘리트이며 검증된 인물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책에 담긴 내용 또한 비전문가가 말하는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식으로 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제도권에서 활동하면서 과학적으로 서술하는 지식이라는 점을 책을 읽는 내내 떠올려야 한다.
네이딘은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가장 좋은 사립 병원 중 하나인 퍼시픽 메디컬 센터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맡은 업무는 건강 격차의 해소였다. 그 일환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의료기반이 열악하고 가난한 지역인 베이뷰 헌터스 포인터(이하 베이뷰)에 진료소를 연다.
그는 진료비 지급 여부에 상관없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주민의 면역력을 개선하고 천식 환자를 줄였다. 그런데 아동 환자의 비율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질병을 앓거나 성장이 부진한 아이가 많았다. 대부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일명 ADHD)로 병원을 찾으면서 네이딘과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아이들의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고 ADHD로 보이지만 정확히 진단하기 어려웠다. 해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는 중 네디인은 상사가 건넨 <2004년 샌프란시스코 지역 건강 평가>라는 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본다. 그곳에서 베이뷰는 사망의 첫째 원인이 '폭력'으로 나타난 유일한 구역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네이딘은 베이뷰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인 마리나 디스트릭트의 숫자를 비교했다. 베이뷰의 아이가 폐렴에 걸릴 확률은 2.5배, 천식에 걸릴 확률은 6배, 당뇨를 앓을 확률은 12배 높았다. 유치원생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마약이 거래되고 빗나간 총알이 벽을 뚫는 베이뷰의 일상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었다.
폭력이 인간의 생리 기능과 생물학적 기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우리는 나쁜 환경이 나쁜 결과를 불러오는 요인 중 하나라고 배웠지만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네이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홀로 퍼즐을 맞추면서 가난한 공동체와 나쁜 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했다.
몇 달 뒤 동료인 클라스 박사가 논문 한 편을 건넨다. 빈센트 펠리티 박사와 로버트 안다 박사 연구팀이 쓴 <아동 학대 및 가정 기능장애와 성인기 주요 사망 원인들과의 관계: 부정적 아동기 경험 연구>라는 자료였다. 네이딘은 논문을 읽으면서 아동기의 불행이 주는 스트레스와 나쁜 건강의 연관성을 과학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펠리티와 안다는 부정적 아동기 경험을 줄여서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s)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불행을 열 가지 범주로 분류하여 18세가 되기 전에 환자가 부정적 경험에 노출된 수준을 측정했다. 하나당 1점으로 계산했으며 만점은 10점이다.
ACE 지수의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정서적 학대(반복적)
2. 신체적 학대(반복적)
3. 성적 학대(접촉)
4. 신체적 방임
5. 정서적 방임
6. 가정 내 약물 남용(알코올 중독자나 약물 남용 문제가 있는 사람과 함께 거주)
7. 가정 내 정신질환(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 또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과 함께 거주)
8. 어머니가 폭력을 당함
9.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10. 가정 내 범죄행위(가족 중 투옥된 사람이 있는 경우)
연구진은 ACE 지수가 높을수록 건강에 대한 위험도가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른바 용량-반응 관계다. 많이 노출될수록 많은 반응이 발생하는 것은 상관성을 입증하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만 7421명의 표본 데이터로 연구를 진행했으므로 과학적 보편성에도 문제가 없다.
불행과 건강의 관계는 충격적이었다. ACE 지수가 4점인 사람은 0점인 사람보다 심장병과 암에 걸릴 확률이 2배, 과체중・비만 2배, 간 질환 2.5배, 폐 질환 3.5배, 우울증 4.5배, 자살 경향성 12배, 학습・행동 문제 32.6배가 높았다. 6점 이상이면 기대 수명은 20년 낮았다.
슬슬 불행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과정이 궁금해진다. 생명체가 어떤 역경에 놓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동시에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그 상황에 맞서거나 아니면 피하도록 신체를 최적의 상태로 만든다. 하지만 성장기나 장기간 노출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다른 모든 호르몬과 신체 기관들의 기능을 망가트린다.
네이딘은 학부 시절의 한 실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못에 물이 부족하도록 만들면 올챙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코스테론을 방출한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어린 올챙이의 성장이 억제됐다. 면역과 폐 기능이 떨어지고 신경 발달에 손상을 입었다. 장기간 노출된 올챙이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
예를 들어 갑상샘 기능 저하증은 유아에게 치명적이다. 만약 어떤 역경으로 갓난아기의 갑상샘에서 갑상샘 호르몬을 생산하지 않으면 신체와 정신 성장에 심각한 해를 입힌다. 그러나 성인기에 발생하면 가볍게 치료할 수 있다. 증상도 비교적 가벼워서 크게 걱정할 질환이 아니다. 시기가 적응과 부적응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우리가 아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지속 시간의 문제다. 전투를 치르는 군인은 전장에서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된다. 그때 몸이 너무 많은 걸 기억해서 현재와 과거의 자극을 혼동하면 스트레스 장애가 발생한다. PTSD는 이처럼 과거의 스트레스 반응이 반복 상태로 고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대표적인 스트레스 호르몬은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굶주림을 겪거나 호랑이를 마주치면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코르티솔의 주요 효과는 혈당을 높이는 것이다. 뇌가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필요한 혈당을 충분히 공급하여 돕는다.
혈당은 정맥 속에서 흘러 근육의 연료로 쓰인다. 먹이를 발견하면 재빨리 움직이고 쫓아가도록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셈이다. 또한 코르티솔은 체내의 수분과 염분을 조절하고 혈압을 유지한다. 성장과 생식을 억제하기도 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아이를 낳는 것보다 당면한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코르티솔은 수면도 방해한다. 호랑이 숲에서는 얕은 잠을 자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그 밖에도 지방 축적을 자극하고 당분과 지방 함량이 높은 음식을 갈망하게 만든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 단 음식이 당기거나 폭식을 하는 이유는 바로 코르티솔 때문이다.
물리적 위협이나 부상, 지진이나 교통사고 같은 환경적 스트레스 요인이 발생할 때도 코르티솔이 생산된다. 문제는 그 호르몬이 면역과 호르몬 체계와 신체와 정신 능력을 갖춰가는 성장기에 분비되거나 어른이라도 지속해서 노출되면 생존에 불리한 '부적응'이 발생하는 것이다.
아드레날린은 코르티솔과 조금 다르다. 심장을 빠르고 세차게 뛰게 만들어 모든 곳에 피를 보낸다. 기도를 열어 더 많은 산소를 흡수하도록 만든다. 혈압도 높이고, 작은 근육에 피를 골격근에 보낸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소변을 볼 것 같은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지방을 당분으로 바꾸어 에너지원으로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코르티솔은 시상하부의 지시로 뇌하수체가 자극되면 부신피질에서 생산한다. 아드레날린은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부신수질에서 생산된다. 호랑이가 사라지면 이러한 시스템은 멈추도록 설계된다. 하지만 집에 호랑이가 있어서 계속 불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트레스 반응이 자주 활성화되거나 너무 강력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의 생산을 차단하는 능력이 사라질 수 있다. 반면 필요한 스트레스와 힘들지만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는 보호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영향들 완화할 수 있다. 그래서 부모의 보살핌이 중요하다.
필요 없고,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는 유독성 스트레스다. 예를 들어 학대나 방임, 경제적 곤란 등 ACE 항목에 속하는 부정적 경험이다. 이때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면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장기간 활성화되어 뇌와 신체의 발달 장애를 일으키고 질병과 인지 손상의 위험성을 높인다. 그 영향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유독성 스트레스는 주로 뇌와 호르몬, 면역계를 망친다.
편도체는 뇌의 공포 중추다. 위협을 식별하고 그의 반응을 돕는다. 만약 스트레스에 만성적으로 노출됐다면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될 위험이 크다. 주사기를 든 간호사를 보고 과도하게 공포를 느끼는 식이다. 실제 MRI 연구를 통해 비대해진 편도체를 확인했다. 무서움을 판단하는 기능이 상실되는 것이다.
뇌의 청반이라는 곳은 뇌에서 나오는 아드레날린인 노로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곳이다. 청반이 조절 장애를 겪으면 불안과 흥분, 공격성이 높아질 수 있다. 위험에 대한 경계용으로 방출되는 호르몬이 계속 나오면 수면 주기를 심하게 망쳐놓을 수도 있다.
이마 바로 뒤에 위치한 전전두피질이 망가지면 추론과 판단, 계획, 의사 결정을 하는 능력이 약화된다. 복측피개영역은 보상과 동기 부여, 중독을 담당한다. 스트레스 반응체계에 과부하가 걸리면 도파민으로 보상하는 이곳에 문제가 생긴다. 감도가 망가져 더 많은 자극의 양이 필요해지는 결과가 발생한다.
높은 수준의 코르티솔은 해마에 유해하다. 해마는 장기 기억과 공간 개념, 감정적인 행동을 담당하는 뇌 속의 기관이다. 그런데 ACE 점수가 높은 아이일수록 코르티솔 수치가 높고 해마의 부피는 작았다. 트라우마 상황이 끝나도 해마는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들과 함께 줄어들고 있었다. 그중 다수는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위탁 가정의 아이, 학대 경험 아이들의 코르티솔 수준은 높았고 분비 패턴도 깨져있었다. 코르티솔은 아침에 증가하고 점점 줄어들어 밤에는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아침 수치는 높지 않았고 저녁에는 줄어들지 않았다. 하루 평균 수치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생리 주기부터 성욕과 허리둘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성장호르몬, 성호르몬, 갑상샘 호르몬, 인슐린까지 모두 감소한다. 난소와 고환 같은 생식샘에 기능 이상이 생긴다. 수감 초기에 여성 재소자 중 33%가 생리불순을 겪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렙틴, 그렐린이라는 호르몬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가한다. 이 호르몬은 코르티솔과 힘을 합쳐 더 강하게 식욕을 부추긴다. ACE 지수가 높으면 과체중인 이유가 패스트푸드만 먹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처럼 코르티솔 수치가 높으면 튀김보다 채소를 선택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면역계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면역을 억제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활성화하면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코르티솔 수치가 증가하면 감기, 위장염 등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해진다. 알레르기, 습진, 천식과 같은 염증과 같은 과민반응을 일으킨다.
자가면역질환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일으키는 대표적인 면역계 이상 증상이다. ACE 지수와 류머티즘 관절염, 낭창, 제1형 당뇨병, 셀리악병, 특발성 폐섬유증 같은 자가면역질환으로 입원한 빈도를 검토했다. ACE 지수가 2점 이상인 사람이 0점인 사람에 비해 입원 비율이 2배 이상으로 나타났다.
아쉽게도 이러한 유독성 스트레스의 변화는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 악순환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살핌이다. 실제 연구에 사용된 새끼 쥐를 어미 쥐가 많이 핥아줄수록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낮아졌다. 반면 어미 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새끼 쥐는 나중에 자신도 그런 어미가 되었다.
우리의 DNA에는 환경과 경험으로 기호가 바뀌는 '후성 유전체'가 존재한다. 만약 네 살 아이가 불행을 경험하면 후성 유전체가 DNA 메틸화와 히스톤 변형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신체 작동 방식이 바뀌게 된다. 그 변화는 심각한 질병이나 죽음으로 귀결될 수 있다.
DNA 메틸화는 메틸기라는 생화학 표지가 DNA 염기서열 시작 부분에 붙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유전자 스위치의 작동이 막힌다. 히스톤은 DNA가 RNA로 옮겨지는 것을 막는 단백질이다. 만약 히스톤이 변형되면 비정상적으로 DNA가 읽히고 전사된다. 사용될 것과 사용되지 말아야 할 것이 뒤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보호자의 보살핌은 후성 유전체의 정상화를 돕는다. 어미 쥐가 새끼 쥐를 많이 핥아줄수록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코스테론이 줄어든다. 새끼 쥐의 내부에서는 천연 항우울제인 세로토닌이 방출되어 스트레스 반응 조절을 활성화한다. 보살핌과 의료진의 개입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유독성 스트레스의 결과는 질병의 유발이다. 우리의 DNA 가닥 끝에는 유전 정보가 없는 비암호 염기서열이 붙어있다. 자동차의 범퍼처럼 DNA 가닥을 보호하여 원본이 그대로 복제되도록 돕는 '텔로미어'다. 만약 텔로미어가 손상되면 세포가 노화하거나 암세포로 변한다.
세포의 노화는 세포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다.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피부의 탄력을 유지하고 주름을 방지하는 단백질인 콜라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콜라겐을 만드는 섬유아세포가 많이 줄어들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텔로미어의 손상이고, 궁극적으로 만성 스트레스다.
텔로미어가 사라지면 세포는 정확하게 DNA 복제하는 능력을 잃는다. 그 결과 '영원히 계속 세포를 만들라'라는 돌연변이 암호가 생겨나서 걷잡을 수 없이 세포가 늘어난다. 그것이 종양이고 계속되면 암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ACE 지수가 높을수록 이러한 텔로미어의 길이가 더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행히 텔로미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있다. 텔로미어의 길이를 늘이는 효소인 텔로머레이스의 수치를 높여야 한다. 명상과 운동은 텔로머레이스를 증가시켜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남들보다 짧은 텔로미어를 가지고 출발했더라고 꾸준히 노력하면 결점을 보완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동기의 불행이 낳는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호르몬이 건강을 망치는 내용을 폭넓게 알아봤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균형이 무너진 호르몬과 면역계, 뇌와 신체의 기능을 다시 정상화할 수 있을까. 네이딘은 독자에게 운동과 식습관, 명상이라는 방법을 제시한다.
식상하게 들리기도 한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좋은 식습관을 유지하고 명상하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뻔한 조언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실천하기 어려워서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우리는 여기서 운동과 식습관, 명상의 효력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규칙적인 운동은 뇌와 신경세포의 영양제 역할을 하는 '뇌유래신경영양인자'라는 단백질의 양을 늘리는 데 일조한다. 이는 해마와 전전두피질처럼 학습과 기억에 중요한 뇌 부위들이 활발하게 작동하도록 돕는다. 뇌도 키워준다는 사실도 나오고 있다. 스트레스 반응 조절에 도움을 주고 염증 물질인 사이토카인을 줄여준다.
건강한 식습관은 체중 감량뿐만 아니라 면역계를 촉진하고 뇌 기능을 향상한다. 특히 오메가3 지방산과 항산화 물질 그리고 과일, 채소, 통곡물 등 섬유 수가 풍부한 음식을 먹으면 염증에 맞서 싸우고 면역계의 균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 대조적으로 정제 설탕, 녹말, 포화지방은 면역계의 불균형을 악화시킨다.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고 면역계와 인지기능을 개선하는 연구에서 항상 제시되는 치료법은 명상이다. 이른바 마음 챙김은 스트레스 관련 수치를 낮춰주고 건강한 수면을 유도하면서 면역기능을 개선한다. 명상은 스트레스와 반대되는 휴식-소화 체계인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네이딘은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운영되는 전문 진료센터 웰니스를 설립했다. 당시 검사장인 카멀라 해리스(현 미국 부통령)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아동기 불행은 지역의 범죄율과도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뿐이겠는가. 교육, 복지의 측면에서도 ACE 연구는 정책 결정에 참고할 중요한 요소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는 또 다들 진실도 제시한다. 개인의 현재가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결정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동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아프지도 않을 것이며, 발달 부진이 없고 학습 능력은 높을 것이다. 나쁜 동네 나쁜 집안에서 자랐다면 결과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요즘 우리나라에 팽배한 능력주의는 네이딘의 과학적 연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이 스스로 불행과 그로 인한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아이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왜 그들이 나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딘가 아팠고 공부가 그렇게 싫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생략됐다.
캘리포니아주는 그나마 다르다. 네이딘에게 공중보건국장 자리를 맡긴 것은 불평등한 여건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책적으로 아동기의 불행에 개입하여 사법과 복지, 교육과 행정 부문에서의 사회적 문제와 비용을 줄이겠다는 방침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결과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대로 두면 각종 질병과 주거, 교육, 치안에 수십 조의 비용을 치러야 할지 모른다. 네이딘은 문제를 직시할 용기를 가질 때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우리도 더 외면하지 말고 마주해야 한다. 과학적 근거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