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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삶 Oct 11. 2015

'지금의 시간을 살포시 안아주어야겠다 하고'

Copyright 김작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지우지 마세요.


대학 사진 수업에서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


"망친 그림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면,

몇 년이 지났을 때 좋아 보일 수가 있어요."


함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지인께서 해주신 말.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그저 보이는 대로

셔터를 눌렀던 생각이 난다.


중간고사를 치르기 위해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이 나면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고

무언가 잘 나온 것은 없을까 하고

찾아보곤 했던 기억들.


찍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지워버리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이건 흔들렸네."


하고 바로 지우는 것과 찍는 것을

반복했달까.


취미로 하는 사진이기에

전문가들만큼 피나는 노력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씩 더 잘 찍고 싶어

고민하면서도

항상  목말랐던 무언가.


찍는 것과 지우는 것.

간단하게 버튼으로 해결되는 두 가지.


그래서인지 더 특별한 것 혹은

남들보다 멋진 것을 찍기 위해

오로지 특별한 대상을 찾는 느낌.


사진 관련 서적을 책상에

가득 쌓아놓고,

또 그걸 모두 읽고도

다시 찍을 대상을 고민하는.


"필름. 꼭 한 번 도전해봐."


미대를 나온 옛 친구의 조언.

그 말은 들은 지가 한 2년쯤 지난 요즘,


어느새 직장에 다니고,

사진에 대해 고민만 하다 구석 어딘가에

놓아두던  디지털카메라를

보고싶지 않았던 시기.


회사 생활 틈틈이 가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다시 생각 난

사진에 대한 추억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사진집을 주문해

거장들의 사진들을 보다가,


우연히 아버지가 오랫동안 쓰시지 않은

수동 필름 카메라가 생각나

그것을 찾아 꺼냈다.


남대문 시장.


길을 따라 보이는

진열장 위  카메라들의 행렬.


낡은 계단을 따라 올라간

허름한 건물.


작은 공간에 모여 앉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가장 앞에 눈에 띄는

돋보기를 쓰신 아저씨.


"녹아 있는 조리개만 고치면 될 것 같아.

다른 건 다 괜찮아."


그렇게

반나 절이 걸려

나는 새것처럼 바뀐 카메라 찾으러 갔다.


"여기 바늘이 노출계예요?"


마치 태어나 카메라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것저것 묻는 나에게

필름 넣는 법부터 노출을 읽는 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시는 아저씨.


그렇게 그 자리에서

짧은 시간 배운 것들을 가지고,


서툰 마음과 함께

그 날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 날은 마치 처음 사진을 접하는

사람처럼,


모든 것이 새로운 풍경 같았고,

새로운 사람들 같았다.


디지털카메라에서는

무엇을 담아도 만족이 힘들었던 기억.


그런데 필름에서는

결과를 당장 볼 수 없는

답답함이,


왜 그렇게 설레게 느껴지는지.


"망치면 뭐 어차피 배우는 단계니까."


내가 실수한 결과를 당장 지울 수 없다는 것.


그 좋지 못한 결과까지 함께

떠안아야

얻을 수 있는 필름.


결과가 좋든 좋지 않든,

받아들이게 만드는 설렘 그리고 기다림.


바쁘게만 돌아가는 삶에서

조금은 나를

느린 것에 익숙해지게 해주는 것.


"실패한 것까지 전부 다 현상해야 실력이 늘어요."


동네에 있는 한 사진관에서

주인 분이 해주신 말씀.


본인도 지금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고

집에 커다란 필름 카메라만을 남겨두고 있다고.


처음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는 질문에

필름을 맡기러 왔다고 하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사진을 공부한다니

조금은 정감이 갔는지

자신의 사진에 관한 추억을 얘기하며

볼 때마다 조금 씩 조언을 해주시는.


"이제 사물이 아니라 빛을 쫓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처음 필름을 접하고,

지인과 했던 대화.


항상 무엇을 찍을까 하던,

그런 고민보다는

이제 세상 어딘가에

빛이 있는 곳들을 찾아가는 느낌.


그만큼 빛 없이는 사진이 쉽지 않고

필름 하나하나에 빛이 소중하기에

더욱 그것을 찾아다니는.


완벽한 도구가 아니기에,

조금은 나의 노력이 더 필요한

필름이 조금은 더 정이 가는 느낌.


"이게 무슨 느낌이지?"


필름 카메라를 처음 접한 날 저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가벼워진 연필의 느낌.


사람이 선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거구나

하는 생각.


그렇게 집에 돌아와

5개월 전 시작했던

첫 드로잉들을 보면서

내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었음을 느꼈다.


무엇이든 담아내려고,

그래서 모든 선을 찾아

잔뜩 긴장한 손으로

진하게 형태를 그어놓은.


"지금 그 힘든 시간이 분명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게 그렇게 말해준

한 지인의 조언처럼,


이제 조금 씩 몸과 마음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시간들을

저 멀리 어딘가로 던져두고

자칫 좋은 것만 남기려는 욕심보다는,


언젠가 나의 새로운 눈이

생겼을 때

무언가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이제,


지금의 시간을 살포시 안아주어야겠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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