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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nemployment Jun 27. 2023

고통 대처 매뉴얼

음 그러니까. 사랑에 실패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진한 고통이었다. 과거형으로 쓰긴 하지만 사실 고통에서 내가 정말 멀어졌는지, 얼마나 멀어졌는지 잘 모르겠다. 언제 다시 고통이 고개를 들고 스멀스멀 나를 잠식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매뉴얼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것을 보니 고통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긴 것 같다.


이전에는 고통이 지나가면, 오예! 드디어 극복했다! 라며 서둘러 엉망진창이고 진흙의 구렁텅이 같은 고통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빠져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고통을 견뎌내는 법도, 고통을 대하는 태도도, 그리고 그 길고 어둑한 터널을 지나고 나서 나의 소회도. 특히 이번에는 이 터널을 통과하며 너덜너덜해진 나를 일으켜 세워 나만의 [고통 대처 매뉴얼]을 만들고 싶었다. 비단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로 내 마음이 땅으로 꺼져 들어갈 때, 내가 나를 구할 수 있는 방법론.


일단 고통을 주는 원인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져야 한다. out of sight, out of mind. 

그 고통의 원인이 사람이든, 일이든 일단 멈추고 잠깐 물리적으로 도망쳐야 한다. 도망치는 게 대단히 잘못된 것 같고 또 도망을 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아무리 멀리 도망을 간다 해도 언젠간 그 고통과 만나게 된다. 고통을 다시 만날 건데 왜 도망을 가야 할까. 고통과 다시 만나 이걸 뚫고 지나가려면 내 마음에 에너지가 필요하다.


도망을 결정할 때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자각하고 내 자각에 대한 판단을 믿어주는 것이다. 이미 고통이 지속되어 마음의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인지, 고통을 좀 더 견뎌볼 만한 상태인지. 고통에서 계속 도망가지 못하는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인 상황을 명분으로 스스로 고통을 좀 더 견뎌볼 만한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높은 고통을 견디다 보면 마음의 역치가 높아지기도 한다. 즉 좀 더 인내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도망가야 할지, 좀 더 버텨볼지 결정하는 건 좀 어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마음의 에너지가 바닥을 치고 있다면 도망가야 할 때. 현실적인 상황이 너무 어렵지 않다면 고통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해 잠깐 도망/도피는 좋은 선택지다. 일단 고통의 원인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지면 내 에너지가 충전되고 그 에너지로 고통을 제대로 뚫을 수 있다.


도망과 도피에서 충전된 내 에너지로 해야 할 것은 고통이라는 감정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해서 상상하는 것이다. 감정을 형상화하는 것만으로도 고통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고통과 나를 분리주시하는 게 필요한데 이건 요가와 명상에서 배웠다. 나의 경우 고통이 올라올 때마다 나보다 훨씬 큰 먼지 덩어리를 상상하고 그 감정을 먼지 덩어리에 버리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먼지덩어리가 나를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고통이 나를 덮쳐올 때는 깜깜한 밤,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큰 파도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고통과 나를 합쳐서 생각하는 것 대신 고통/고통을 받고 있는 나/그걸 지켜보는 나 - 이 세 가지를 분리하고 형상화해서 떠올렸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고통을 계속 파고들면 안 된다는 점이다. 고통을 그냥 형상화해서 상상할 뿐, 과거를 계속 들추면서 고통이 바닥이 날 때까지 긁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기 쉽다. 그냥 고통을 놔주면서 형상화만 해야 한다. 내 경우 먹는 것도, 일도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정말 도 닦는 마음이 필요했다. 고통을 끝까지 파서 모두 닳아져 버릴 때까지 이 생각에 계속 매여있는 것이 이 고통을 열심히, 성실하게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냥 고통을 놔주는 게 가장 현명하다.


이렇게 생각을 전환하도록 도움을 준 책은 마이클 싱어의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다. 한 달간 이 책만 다섯 번 읽었을 정도로 씹어서 삼키고 싶은 책이다.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내 감정과 생각을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평소에 읽기 좋은 책은 아닌 것 같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나 - 할 거다. 하지만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는 정말 좋은 책이다.


고통을 형상화해서 상상하고 고통을 분리주시하면서 동시에 해야 할 일은 내 루틴을 찾고 적당한 정신적 긴장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너무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도 있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몸을 움직이고 뇌를 사용하는 일이라면 뭐든 했다. 이번 고통을 지나오면서 가장 도움이 많이 됐던 루틴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보이차 마시며 발리에서 사 온 인센스에 불을 붙이는 것. 그리고 '나의 직업, 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인센스가 타들어가는 것을 멍 때리면서 보면서 보이차를 마시다가 마이클 싱어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고 일의 세계로 들어가 자유로움을 느꼈다. 


일이 늘 감사하고 중요한 존재이긴 했는데 내 마음과 정신의 안식처가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새로운 것을 할 때 같이 해보자는 좋은 동료들, 그리고 약간의 익숙함과 긴장감이 만들어 내는 조화로움. 내가 처음 운전면허를 따고 제주에서 드라이브를 할 때 느꼈던 자유로움을 일에서 느꼈다. 사람에게 일이 주는 의미가 제각각이겠지만 내게는 일이 정신적 안식처였고 나를 충전시켜 주는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였다. 내게 루틴을 만들어주고 돈도 주고 잠시 고통에서 벗어나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요가와 명상은 생활의 기본값으로 놓지 않고 꾸준히 해나갔다.


고통을 분리주시하고 루틴을 만들면서 나를 움직이며 에너지를 만들면 다음 단계에 접어들 준비가 된거다.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달래가면서 루틴으로 어느 정도 내면의 에너지를 채우면 이제야, 고통을 만나 이걸 있는 그대로 소화시킬 단계가 된다. 루틴을 지켜가면서 고통을 분리주시하면 고통과 고통을 받는 내가 객관화되어서 보인다. 고통을 만나서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고통을 피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책에서 너무 많이 떠들어대는 말이라 쉽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힘든 사람한테 힘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 고통이 아픈데 그걸 왜 받아들여. 그리고 아픈데 어떻게 받아들여.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내면의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많은 밑작업이 필요하고 꽤 시간이 드는 작업이다. 아직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라서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 에너지가 생긴 상태니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고통이 나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는지, 그 고통으로부터 평소의 삶에서는 포착하지 못했던 내 욕망이 보인다. 여기서는 도망가면 안 된다. 처음에는 고통이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라 도망가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통을 만나고 뚫고 지나가는 단계에서는 끝까지 나를 밀어붙이는 솔직함과 담대함이 필요하다.


욕망을 발견하고 이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낼 것인지를 결정한다면, 고통에서 나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 보이게 된다. 문제를 확인하고 나만의 솔루션을 찾은 거다. 이것도 단번에 되진 않는다. 시간이 좀 필요하고 이 때는 같이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으면 좋은 것 같다. 이 욕망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고 다른 케이스를 확인하면서 내 상황과 대입해 볼 수도 있으며 또 욕망과 솔루션 간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탄탄하게 만들 수 있다. 


아직 나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어 아직 잘모르겠다. 부디 내게 꼭 맞는 솔루션이 나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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