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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이스와 줄리 Mar 12. 2021

'육아노동자'의 삶

나는 작년 9월부터 '육아노동자'로 살고 있다. 회사에서는(사회에서도) '육아휴직자'로 분류되겠지만, 나는 스스로를 휴직자가 아닌 노동자로 여기며 지내고 있다.


나의 업무는 아침 7시30분쯤 시작된다. 6시30분~7시 사이에 아이가 일어나면 잠시 혼자 놀게 둔 다음 재빠르게 양치하기, 옷갈아 입기, 물 한잔 마시기의 루틴을 진행하고 분유 물을 끓인다. 그 사이에 빨래를 돌리고 부엌 그릇들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기 위해 거실을 치운다. 


매일 아침 옷을 갈아 입는 이유는 나름대로 '출근의식'을 치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산 초반에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내 루틴도 전혀 잡히지 않아서 그냥 시간이 흐르는대로 지내곤 했다. 그러다보니 하루종일 잠옷차림으로 지낼 때도 많았고 하루가 실체 없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육아와 삶의 경계를 구분지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출발이 옷을 갈아 입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아이 방에 가지 않고 꼭 먼저 양치를 한다. 아이가 우선순위가 되면 하다 못해 양치를 하고 아침에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뒷전으로 밀릴 때가 많다. 육아는 장기전이기도 하고 최소한의 '자기존엄'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상 직후 세수와 양치, 따뜻한 물 한 잔은 꼭 챙기려고 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루틴을 매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나를 조금은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나의 일과는 아이의 낮잠 시간에 맞춰 다음 과정으로 넘어간다. 아이가 자기 전에는 소음을 많이 낼 수 있는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이유식을 만든다. 아이가 자고 있을 때는 환기를 시키고 장난감을 정리하거나 닦고 가습기를 청소하고 건조기를 돌린 후 빨래를 갠다.


그 외에도 가끔씩 이불빨래를 돌리거나 계절옷들을 정리하거나 이유식 재료들을 주문하거나 가계부를 정리하거나 도시가스 검침을 챙기거나 아이 식탁의자 정품등록을 한다든지 장난감대여점에서 어떤 장난감을 빌릴지 검색해본다든지 등등의 아주 사소하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을 그날 그날 챙기고 있다.


아이 루틴이 일정해지면서 나의 일들도 매일 조금씩 다르긴해도 일정한 패턴을 보이게 되었고, 실제로 회사에서 일하는 듯한, 업무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회사에서 했던 것처럼 To do list도 매일 기록하고 있다. 까먹지 않기 위함도 있지만 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빨간줄을 긋는 쾌감, 즉 성취감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사실 집안일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집안일에서 어떤 성취감을 느끼기는 매우 매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을 아무리 깨끗하게 치워도 서너시간이 지나면 다시 어지러워지고 아무리 밥을 맛있게 지어도 내일 그 밥을 또 지어야 하며, 광이 나게 싱크대를 닦아도 이틀 뒤면 물때와 음식찌꺼기가 그득해지는... 집안일은 정말 끝없는 굴레 같은 것이랄까. 


물론 깔끔해진 거실을 본다든가 내가 한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과 아이를 볼 때면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집안일들은 '성장'보다는 '성실' '근면'을 요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취감을 느끼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기에 이왕이면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고 그래서 나는 그저 쉰다는 의미의 '휴직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창출해내는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 몸에 K-노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도......)


지금까지 집안일에 대해서만 열거했을 뿐 나의 주 업무는 '아이돌보기'이기 때문에 집안일과 별개로 아이를 보살피는 일도 진행한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세수를 시키고 분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먹이고 노래를 불러주고 책을 읽어주고 달래주고 안아주고 손톱도 깎아주고...+무한애정쏟기. 이쯤되면 굳이 내가 노동자 지위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정말 노동자가 아닐까 싶기도.


어쨌든 '육아노동자'가 된 후 좋아진 점들이 있다. 첫째는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업(회사일)을 할 때 힘든 일이 있어도 일이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넘어갈 때가 있듯이 가사/육아 노동을 할 때도 '그냥 이것은 업무 중 하나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면 위기의 순간들을 훨씬 잘 넘길 수 있다. 특히 아이를 돌보는 일은 마음을 쏟는 것에 한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것들이 스스로를 옥죌 수 있는데 나는 이런 부분들이 많이 해소되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장점은 남편과의 사이도 좋아진다는 점이다. 각자 일을 하는 셈이기 때문에 서로의 일을 존중한다. 내 근무시간인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는 남편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별로 섭섭하지 않고 나도 그 시간 동안은 즐겁게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퇴근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을 더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오늘 하루를 열심히 일하고 에너지를 쏟았기에!  일반 직장인처럼 주말을 기다리게 된다거나(주말엔 남편이 많은 부분을 함께 한다. 고마워!) 불금을 신나게 보내게 되는 건 덤으로 얻는 즐거움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를 존경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외면받아왔던 엄마들(아빠들)의 집안/육아 노동은 더욱 더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깨닫는다. 지금은 퇴근 1시간30분 전!!! 남편이 오늘 조금 늦는다고 해서 연장근무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일은 주말이니까 다 참을 수 있다. 오예- 모두 따뜻하고 피로가 사르르 녹는 주말을 보내시길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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