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을 보고 난 후 영화 속 그 어떠한 일들에 대해서도 확신하거나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 우물, 남산타워와 해미의 방에 들어오던 한줄기의 빛과 같은 것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가 없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해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종수는 또 다른 인물 벤을 만나게 된다. 세 인물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고, 관계 속에 공존하면서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종수는 자기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벤에 대해 질투를 느끼며 고독함속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는 것과 차마 볼 수 없는 것,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또는 보인다고 믿거나 실재한다고 믿는 것들로 엮여 있다. 수수께끼와 같은 인생의 일들 속에서 껍데기만을 골라내는 일이 가능할까?
어느 날 해미가 벤의 말처럼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종수는 해미의 존재와 해미가 겪은 일의 진위여부에 대해 집착을 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통해 다시 짧고도 강렬한 빛을 볼 수 있다 여겼던 걸까? 왜 그에겐 해미가 필요했던 걸까?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나는 또 어떤 의심을 키우고 있는가? 종수가 받아들인 ‘비닐하우스’가 벤에겐 다른 상징적 의미를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확실히 보지 못했으니 의심할 수가 없다. 종수가 마지막 벤에게 행한 일은, 이 모든 의심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풀고 만다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청춘의 무력감에 의해 나 또한 늘어지는 것 같다가도 그 청년을 통해 무언가가 분출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종수라는 청년에게서 불타올랐던 것은 꿈을 향한 열망보다 앞선 질투심이었다. 꿈이 있어도 그 누구는 현실에서 꿈을 꺼내보지 못한다는 거, 하지만 이마저도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지 못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합리화라 볼 수도 있겠다.
진실은 어딘 가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가늠만 할 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것에 대한 가능성만 열어둘 수 있을 뿐,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벤의 대사들이 의심을 불러올만한 것들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 의심에 의심이 더해지면 마치 사실처럼 믿게 되기 마련이다.
해미가 얘기 했듯이 우리는 그저 리틀 헝거가 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나는 때에 해미의 지난 이야기를 되뇌어보게 된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없다는 걸 잊어버리게 되는 거라고. 종수 혹은 우리가 그렇다고 여겼던 것, 그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기보다도 없다는 걸 잊어버리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현대 사회의 단면을 그려낸 버닝은 묘하게도 보고 난 후에, 남아 있는 작은 불씨를 비벼 끄고 싶고 싶다는 마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