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에 올 줄이야
10월 20일 목요일. 상담을 받기 위해 정신과에 방문했다. 번화가에 있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근처에 다니고 있어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지만 어쨌든 들어갔다. 생각보다 아늑한 분위기에 안심하며 데스크에서 나눠준 종이를 작성했다. 나 같은 경우 정신건강증진센터 연계로 상담을 신청했기 때문에 관련 된 서류들을 작성했다. 세네장 정도의 글을 쓰고 나니 먼저 상담을 받고 있던 분이 바깥으로 나왔다. 나오면서도 흐느끼고, 나오고서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앉아있는 모습이 이상해보인다기보단 그냥 공감됐다. 사연을 알지는 못하지만 저 사람도 얼마나 힘들면 여기까지 왔을까? 성인이 남들 앞에서 아이처럼 흐느끼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살았을까? 덩달아 나까지 눈물이 났다. 상담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울면서 들어가는 건 창피해서 겨우 진정하고 들어갔다. 서재같은 분위기의 방에서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보자마자 뜬금없이 이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매일 힘들다고 우는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극한직업이라니. 바로 전 직장에서 비슷한 일을 했고, 그런 고충이 싫어서 이직해서인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상담에 앞서 의사 선생님은 내가 제출했던 서류를 검토했다. 그리고 최근 가장 문제가 되는 사항들에 대한 질문을 하셨고 나는 불안, 긴장, 사람이 어려움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말하다보니 최근 가장 내적으로 부담이 되고 있는(그리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그 뒤로 트라우마가 됐던 사건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고립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삶을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는 말엔 동의했지만 월급 따박따박 나오지만 일이 없어서 힘들고 배제되는 것만 같다, 심할 때는 그만두고 싶었다는 내 말에 의사 선생님의 '대체 뭐가 문제지?'라는 표정과 질문은 당황스러웠다. 오히려 '그만둬야할 이유가 있나요?'라고 했을 땐 더 할 말이 없었다. 월급 루팡도 하루이틀이지 나름의 괴로움이 있다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 못할 문제인걸까. 고용주도 아니면서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는건가? 어쩌면 강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는 다들 너무 열심히 해서 혼자 심각하게 생각하는걸지도 모르겠구나. 대부분의 시간을 놀다가 가끔 하루쯤은 갑자기 일이 생겨 야근하고 가는, 모두 다 그렇게 사는건가? 그렇게 대혼돈의 첫 번째 상담이 마무리됐다.
대화하다가 약물 치료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나의 거부감 표출로 상담만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다음 주에 또 방문 예약을 잡아야하는데 언제로 해야할지. 벌써부터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할지 고민이다. 가족이나 주변에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남자친구에게는 말했다. 나는 울적한데 깨발랄을 받아 줄 자신이 없어서 말했는데 오히려 더 난리가 난거 같기도 하고. 이유가 뭐냐고 묻는 말에 수많은 이유가 떠올랐지만 말해봤자 상처만 받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 답답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알겠다고 물러서긴 했다. 설마 본인 부모님(겸 예비 시댁)한테 이야기할까? 싶었지만 해도 어쩌겠나 하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그 분들은 내가 힘든 일을 싫어하고 정신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물론,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다) 거기에 대해서 뭘 어쩌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무 의욕도 없다. 어찌됐건 한없는 똥꼬발랄함에 제동이 걸린 것 같아서 다행이면서도 안쓰럽다. 이럴 때마다 나는 혼자 살아야 되는 인간인가? 이런 생각 하면서 스스로 고립되고 싶어지지만 일단 자책 하지 않기로 한다. 모든 게 하기 싫어져서 집이 쓰레기장이 됐지만, 그럼에도 빨리 가서 침대에 눕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