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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Dec 08. 2022

다시 서른

홍차씨, 이제는 행복하신가요?

안녕하세요, 홍차입니다.


홍차로는 브런치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 행복한 홍차를 기록해두어야 슬프고 힘든 일을 또 겪더라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거 같아서 짧게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29살의 홍차씨처럼 하루하루가 불안한 사람들에게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내년부터 만 나이로 나이를 센다고 하는데, 그럼 저는 내년에 또 서른 살로 살게 되겠군요 (히히). 두 번째로 살게 된 서른 살은 조금 더 지혜롭고 멋지게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022년이 미친 듯이 빠르게 끝나가고 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더니. 특히 올해, 남들은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 같은데 나는 제자리걸음은 커녕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 것 같다.


아임 에그 샐러드...


퇴사한 이후 할 일 없이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괴로운 지 알게 되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긴 고민 끝에 미국 대학 박사 프로그램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석사 공부를 할 때에는 내 부족함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워서, 그리고 주먹구구 연구소에 입사한 이후로는 자잘한 일상의 투쟁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는데, 어쩌면 퇴사 후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번에야 제대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국 석박사 유학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학교에 지원하기 전 받을 수 있는 외부 장학금과, 합격한 후에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이렇게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난 운이 좋게도 꽤 규모 있는 지원 전 장학 프로그램의 수혜 후보자로 선발되어 이제 학교 쪽에서 좋은 소식을 받으면 내년부터 미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으며 (!) 박사 공부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지원 전 장학금 수혜 후보자더라도 학교에서 리젝 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아직 좀 불안하긴 한데, 최선을 다해 지원했기 때문에 이젠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기도 메타... 미국 가즈아...!


내가 퇴사한 후 주먹구구 연구소는 모종의 이유로 원래 있던 빌딩에서 보증금도 받지 못한 채 쫓기듯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나마 새로 옮긴 빌딩도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수압이 너무 낮아 화장실에서 똥을 쌀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직장인 기준 최대의 비극이 아닌가 싶다). 박졸렬 또한 경미한 의료 사고와 승진 누락 등 우울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우주가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사실 박졸렬이 횡령이나 폭행으로 구속되어 신문의 작은 구석을 수놓을 것을 상상하던 나에겐 좀 안티 클라이맥스였는데,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큰 일을 저지를 깜냥이 없는 사람이라는 박졸렬에 대한 내 첫인상과 딱 부합하기 때문에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녹음 파일은 백업을 잘해두었습니다ㅎㅎ 박졸렬씨 앞으로 착하게 사세요~


박졸렬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한 달 내로 날 해고할 수 있게끔 증거를 조작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며 의기양양해하던 석대리의 근황은 더욱 충격적이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하여 내가 퇴사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부터 석대리 또한 노동법 위반의 희생자로 전락하여 월급이 대폭 삭감되었고, 이제 곧 쫓겨나게 생긴 모양이다. 통쾌함보다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하늘의 인과응보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점점 더 엉망진창, 주먹구구로 흘러가는 이들의 인생을 멀리서 지켜보며, 사랑의 반대말은 결코 미움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애정이든 열정이든, 정(情)이 없으면 미워할 수도, 분노할 수도 없다. 그저 바닥 없이 추락하는 이들이 참으로 애잔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아이 참, 왜 저러고 살지? 우걱우걱


올해 배운 더 중요한 교훈은, 무언가를 성취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거다. 박졸렬을 신고하기만 하면, 멋지게 퇴사하기만 하면, 보상금을 많이 받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29살의 홍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순간의 희열이 옅어질 때마다 약물 중독자처럼 더 큰 자극을 찾아 헤맸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항상 무언가를 이루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기만 하면, 학위만 받고 나면, 직장을 갖고 돈을 벌기만 하면,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만 하면... 어떤 상태에 도달하면 행복이 지속될 거라는 생각이 나를 점점 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ㅂ;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생각은 사실 굉장히 게으르고 의존적인 내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행복은 매일 일상에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서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올 미래를 기다리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낭비했던 건가.


바쁜 일이 서서히 마무리되며 가족과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쨍한 가을 햇빛 아래서 낙엽이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을 볼 때. 아침에 고양이가 내 다리 사이를 스윽 스쳐 지나가며 내게 아는 척을 할 때. 직접 요리한 음식을 가족과 나눠먹을 때. 동네 병원 가는 길에 새로운 햄버거집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얼마 전 첫눈이 내렸을 때.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에서 왜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사는 건지 마음이 아플 뿐이다.




박사 지원을 준비하며 계속 영어로만 글을 쓰다가 오랜만에 한글로 글을 쓰려니 조금 어색합니다. 외부 장학 프로그램과 학교에 지원하고, GRE 시험도 봐보고, SOP를 쓰는 등, 올 한 해 바쁘게 산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유학 관련 정보나 일상 똥글을 적기엔 브런치에 너무 멋있는 척을 많이 해놔서 네이버 블로그에 정리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되돌아볼 때에도, 그리고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이러다가 또 동물의 숲 하느라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어요.)


전쟁 범죄를 옹호하던 아베가 암살당하고, 제국주의의 마지막 망령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죽고, 대한민국 학계의 잘못된 점만 모아놓은 박졸렬의 주먹구구 연구소가 망해가고 있는 2022년의 기운이 저는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이 좋은 기운 2023년에도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이제 진짜로 (진짜 진짜 진짜) 안녕!


모두 행복합시다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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