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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Jul 16. 2021

첨부파일과 함께 사라지다

모오-던이메일 라이팅에티켓을 배우게 된 건에 관하여

홍차는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예의가 없는 사람은 단연 주먹구구 연구소의 박졸렬이었노라 말한다. 그는 본인 기분이 나쁘다고 직원들에게 거리낌 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물론, 앞에 놓인 물건을 뭐든지 물어뜯고, 밥 먹을 때 쩝쩝거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말하니 개 같은데, 정말 개 같은 노릇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그 누구보다 예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박졸렬은 걸어 다니는 0.1톤짜리 모순 덩어리였다.


예를 들어, 그는 막 대하려고 어린 여자들만 뽑는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드세지 않아 다루기 쉽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여자들만 뽑아 놓고 군대식 예의를 강요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차별주의자인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 편견 없는 성평등주의자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결같이 모순적인 인간, 그게 바로 박졸렬이었다.


예의에 대한 그의 기준 역시 모순적이었기 때문에 주변 이들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둥굴레차씨, 영어로 이메일 보낸 거 너무 예의 없어. 게다가 문법 다 틀렸잖아."

"아 소장님 저.. 홍차인데요. 죄송합니다. 혹시 어디가 틀렸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틀린 곳을 알아야 제가 고쳐서 다음번엔 실수를 안 하지..."

"아니! 뭐! 그런 게 있다고! 딱 봐도 몰라?!!"


박졸렬이 정말 나쁜 상사인 이유는 그가 개인위생에 신경 쓰지 않고 비호감이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가 틀린 것이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를 그렇게 화가 나게 했는지... 이런 것들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예의 없는 짓'이고 '무능력'한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어른한테 그냥 이름을 부를 수가 있어? 난 이해를 못하겠어. 말 좀 해봐."

"이 분은 미국분이신 데다 워낙 저희 쪽과 연락을 자주 하시는 분이라서 전임자도 허물없이 연락을..."

"왜 자꾸 내 말을 끊어?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홍차씨."


그날 홍차는 박졸렬이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이미 작성한 이메일 내용 중 호칭과 쉼표 하나를 바꾸게 되었다. 그나마 바뀐 호칭도 부담스럽다는 답변이 돌아와 원래대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박졸렬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는 그녀가 이메일을 쓸 때마다 모니터에 거대한 얼굴을 들이밀고 점 하나까지 감시하기 시작했다. 예산안을 검토하고 승인을 내리는 것도 마다하고 일개 직원인 홍차가 실수를 하는 것만 기다리느라 박졸렬의 업무는 길을 잃어갔다.


하루 종일 움직임 하나하나 감시를 받으며 힐난을 받게 된 홍차는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감옥에서도 이런 감시를 받을 것 같지 않았다. 하긴 옥살이 보다 나을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마는데, 그건 박졸렬 바로 눈앞에서 실수를 한 것이었다... 사실 그녀 혼자만의 실수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 그래서 여기, 그렇게 어, 어, 그렇게 쓰고. 빨리 이거 파일 첨부해서 보내."

"넵, 여기 첨부했습니다.... 소장님, 근데, 보내주신 이메일 주소가 양식이 맞지 않다고 알림 창이 뜨는데요?"

"아, 새로고침 몇 번 눌러보라고. 이런 거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해? 하여튼 여자애들이란..."


홍차는 사회인이고 문명인이며 어른이라는 이유로 위장 안쪽부터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억눌러야 했다. 대신 그녀는 F5 버튼이 마치 박졸렬의 졸렬하게 좁은 이마라도 되는 듯 미친 듯이 눌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메일이 보내져 버렸다.


첨부파일 없이.


홍차는 먼 훗날 이 일을 회상하며 과연 자신이 버튼을 누른 다음에야 이 실수를 알아차리게 된 것인지, 아니면 누르기 전부터 실수를 할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손가락은 고장 난 전자동 인형처럼 움직였고, 그렇게 이메일은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아... 아니!!!"

"헉, 새로 고침 하면서 첨부 파일을 날아갔나 봐요! 파일을 다시 첨부했어야 했는데... 소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새로 고침이 뭐가 어쨌다는 거야?"


박졸렬이 조금 신이 나보이는 것은 홍차의 착각이었을까? 생각 외로 박졸렬은 길길이 날뛰지 않고 차분히 앉아 의기양양하게 홍차를 내려다봤다. 오롯이 그녀의 잘못이었으므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박졸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느껴본 감정 중 가장 쓰레기 같은 감정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가만 보니까 그, 그, 둥.. 아니 홍차씨는 우리 연구소랑 안 맞는 거 같아?"

"아... 네..."

"먼젓번 영어 메일도, 응?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보내라고, 엉? 함부로 아는 척하지 말고."


박졸렬은 그제야 자신의 방으로 뒤뚱뒤뚱 돌아갔다. 주변 직원들도 드디어 개가 개 집에 들어가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 밖으로는 새 떼가 날아갔다. 17층에서 바라보니 새들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홍차는 그 순간 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박졸렬들에게 똥을 갈기기 위해서 말이다...


홍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쉬쉬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자리에서 일 년을 채 채우지 못한 채 사라진 수많은 여직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심술기 가득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인수인계를 해주며 홍차를 벌벌 떨게 하던 전임자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곳에서 5년을 일한 경력자였다. 그런 여자도 박졸렬의 주먹구구 연구소를 버텨내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 인양 사라진 것이다.


한 인간을 청춘에 다다르게 하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러 명의 청춘을 한 순간에 어그러 뜨리는 것은 그다지 큰 노력이 필요 없는가 보다. 박졸렬이라는 무능한 인간이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상하게 홍차는 이 사실이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편도체가 제거당한 실험용 쥐처럼 두려울 것이 없어졌다. 그러자 박졸렬이 무심코 던진 모욕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비상식적이고 억압적인) 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어느 모로 보나 칭찬에 인색한 박졸렬에게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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