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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Jul 03. 2021

권위라는 이름의 난쟁이

시말서와 시발서 그 중간의 어떤 것을 쓰게 된 경위

도주에 실패한 이들이 남긴듯한 무수한 손바닥 자국으로 더러워진 유리문을 열고 주먹구구 연구소에 들어서는 순간 정체된 공기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이 곳 구석에서는 바퀴벌레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코끼리 무덤의 전설처럼, 죽음을 직감한 동네 바퀴벌레들이 모두 이 곳을 찾아와 죽음을 맞이하는 듯 했다. 우리의 홍차씨 또한 어떤 본능의 부름으로 매일 아침 그녀의 영혼과 열정의 죽음을 직감하여 이곳으로 향했다.


인간 상식과 논리는 물론 시공간 마저 뒤틀린 이 곳을 지배하는 박졸렬은 지도자의 권위는 능력과 이해심이 아니라 윽박지름과 자신을 두려워하는 아랫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고 믿는 전형적인 꼰대였다. 박졸렬은 신입 직원을 관련 없는 회의에 불러들여 기존 직원들을 혼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보이지 않는 근육을 한껏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진짜 근육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항상 뚱뚱한 만년필을 입에 물곤 했는데, 이는 비위생적인 것은 물론 그가 아직 구강기를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물론 홍차도 출근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박졸렬의 권위 차력쇼에 불려간 바 있다. 학창시절부터 선생님들을 비롯한 권위자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던 홍차에겐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접근법이었다. 눈물의 똥꼬쇼 차력쇼 이후 그녀에게 박졸렬은 두려우며 존경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빽뺵거리며 억지를 부리는, 슬프게도 꽤 흔한 추한 어른의 표본이 되버렸다. 직원들은 그가 의도한 모멸감이나 반성하는 태도, 더 노오력해야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아침부터 이 상황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망연자실해 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비릿한 미소였다.


시간이 갈 수록 박졸렬이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마주할 상황이 점점 더 늘어났고, 그녀 마음 속 그의 권위는 직업 광대 보다 살짝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박졸렬은 자신이 가진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진 것도 없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그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 지 아직도 모르겠다. 쨋든 이 불똥은 홍차에게 튀게 되는 데...


"녹차씨, 이거, 나 학생들 대상으로 강연을 좀 하려고 하는데, 알아 좀 봐봐요"

"아, 소장님, 저 홍차..말씀하시는 거죠...? 무슨 강연이고, 어떤 학생들 대상인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강연 3부작이고,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아 뭘 그렇게 많이 물어봐. 알아보고 보고를 하라고요, 홍차씨, 어? 대학원 조교를 해봤으면, 강연, 강의 이런 것 좀 알 거 아니야."


박졸렬은 입 가장자리에 작은 게거품을 만들며 흐리멍텅한 눈으로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계획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손아랫사람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것이 본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실상 도전할 권위도 없는 데 말이다.


"우선 강연하실 장소를 알아봐야할 텐데, 혹시 예산을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신건가요?"


주위 사람들이 홍차를 절박하게 쳐다보며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 처럼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순간 홍차는 저절로 움직인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저 문장은 그녀의 혀 끝을 떠난 이후였다... 박졸렬은 '이런 건 좀 알아서 해라,' 그리고 '누굴 거지로 아냐'라며 예산에 대해 의문을 던진 그녀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박졸렬은 마치 그녀가 자신을 때리기라도 한 것 처럼 쏘아보며 씩씩거렸는데, 홍차는 차라리 정말 그의 얼굴을 한 방 갈겼다면 조금 덜 억울할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박졸렬의 수수께끼같은 계획에 영락 없이 합류하게 된 홍차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애어른 한 명과 혈기왕성한 중고등학생 100여명이 두 시간 남짓 함께 있을 만한 장소를 알아보게 되었다. 여행갈 때 숙소 예약도 하지 않는 홍차로선 팔자에도 없는 일을 하게 된 셈이었다.


".... 그래서 이 곳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소장님 댁이랑 가깝기도 하고, 수용 인원수도 가장 넉넉하고, 또 비용도 비교적 비싸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그녀의 보고를 듣는 박졸렬의 기름기 번지르르한 얼굴 한 켠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홍차씨, 홍차씨 돈이라도 이렇게 쓸꺼야? 이렇게 쓸거냐고."


제 돈이면 애초에 이런 걸 하지 않았겠죠...라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녀는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구두들이 생각났다. 아득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박졸렬은 책상에 손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우리 이럴거면 못하겠다, 응? 이거 우리 하지말자. 어. 그래, 하지말자. 홍차씨 들어가. 들어가라고요. 들어가서 할 일 하세요."


박졸렬은 손을 휘휘 저으며 강연 계획을 취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홍차는 분명 그가 아랫사람에겐 말할 수 없는 다른 민망한 취소 사유가 있는데 예산을 핑계로 계획을 번복한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화도 버럭버럭 잘 내지만 계획 번복은 더 잘 하는 사나이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컴퓨터 휴지통엔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단순한 변덕에 의해 잊혀진 박졸렬의 꿈(혹은 망상)들이 쌓여 있었다. 그 때 그녀는 그렇게도 순진했던 것이다.


그 이후 며칠이 지나 그의 계획이 서서히 빛을 바래가고 있던 중, 갑자기 박졸렬의 천둥같은 목소리가 홍차의 귀를 때렸다.


"내가 그 때 말했던 꿈나무 강연 어떻게 되가는 거야? 왜 아직까지 진행된게 하나도 없는거야! 녹차씨! 자네 담당 아니었어?"

"네, 그 때 진행하지 말라고 하셔서 진행 중단되었습니다."


오... 그녀는 그 때 정말로 그 말을 하면 안됐다. 박졸렬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빨게져서 곧 터질 것 같아 보였다. 온 몸에 열이 오르고 있는 나머지 그의 얼굴 기름이 지글거리는 것 같았다. 탈진실(post-truth)의 세상에서 박졸렬이 내뱉은 말의 의미보다 박졸렬이라는 100키로가 넘는 거구의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홍차는 그 날 처음으로 성장을 끝낸 성인이 아이처럼 악을 쓰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홍차는 그 날 퇴근 전까지 시말서를 작성해서 그에게 제출해야 했다... 우울한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시말서 예시'를 찾아보니 '잦은 무단 결근'이나 '음주 후 동료 폭행' 따위의 사유로 작성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녀처럼 상사의 말을 너무 잘 들어버려서 쓴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더 엿같았다. 그녀는 박졸렬을 욕하는 마음이 세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앙 다문채 진실을 포함하지 않고, 가장 진실되지 않은 사죄의 말들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태어나서 쓴 글 중 가장 쓰레기같은 글이었다. 그녀는 이런 일로 종이를 낭비하게 된 것을 깊이 반성하며 주술 불일치 문장으로 가득한 시말서를 인쇄했다.


홍차가 군말 없이 시말서를 써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날 대학 후배로부터 점심 식사를 거하게 대접 받은 후였기 때문에) 박졸렬은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는 시말서 종이를 펄럭이며 입을 쩝쩝거렸다.


"녹, 아니 홍차씨. 이거 정말 나니까 봐주는거야, 엉?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상사 계획을 중단시키는 직원이 어디에 있어. 앞으로 이러지마. 이건 정말 시말서가 아니에요. 내가 홍차씨 어떻게 하나 보려고 써보라고 한 거야. 앞으로 사회 생활할 때 조심하라고. 응? 그럼 들어가봐요."


정말 비겁한 건 이런 '어른'들은 꼭 자기가 기분이 상해서 화를 냈으면서도 마치 그 화가 상대방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처럼 군다는 거였다. 앞으로 이보다 더 부조리한 상황이 반드시 올 터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해와 같은 은혜로 단련시켰으므로 감사하라는 식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은 속이 좁으며 조그만 것에도 심기가 거슬린다고 말해준다면 홍차는 박졸렬이라는 인간을 존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자 그제서야 피로가 밀려오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박졸렬의 꿈나무 교실은 지원자 미달로 결국 진행되지 못했다. 홍차는 대한민국의 꿈나무들에겐 아직 희망 찬 미래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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