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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May 13. 2018

47. 그리그와 함께 한 밤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베르겐 (Bergen)으로 향했다. 피오르드의 수도라 일컬어지는 곳. 한국으로 치자면 부산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노르웨이의 베르겐 태생인 그리그 (Edvard Grieg)의 집을 가 보고 싶어서 찾은 곳이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도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몇 날 며칠을 대 자연의 품에 안겨 드넓은 들판과 호수에 익숙해진 탓일까? 도시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묵을 만한 호스텔은 가는 곳마다 모두 만원이어서 조금은 의기소침해지기 까지 했다. 부두의 어시장에서 해산물을 사 가지고 조금 외곽으로 나가 숙소를 알아보기로 했다.  


어시장에서 20여 분 달려 도착한 그리그의 박물관. 고즈넉한 언덕배기에 호수를 벗 삼아 지어진 그의 작은 작업실을 기웃거리고, 그가 거닐던 산책 길을 어슬렁거리며 그의 자취에 빠져있다 보니, 여고시절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슬픈 러브스토리와 함께 합창으로 부르며 익힌 “솔베이지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만 같다.

방랑의 길을 떠난 주인공 페르귄트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솔베이지의 사랑을 노래한 곡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 늙고 지친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페르귄트는 그를 기다리며 백발이 된 솔베이지를 만나 그녀의 무릎에 기대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슬픈 사랑 이야기..  이 노래로 실기 평가를 본 기억이 있는데, “아.. 아 아아아 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 아~~”로 이어지던 마지막 부분의 초 고 난이도 음정과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떨며 애썼던 그 시간이 새삼 그립다.


어느새 오후 6시가 넘었다. 하지만 아직 잠 잘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에 안달을 내지 않아도 좋을 만큼 이 동네의 분위기는 마음을 한없이 차분하게 해 주었다. 그리그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그대로 아침을 맞아도 좋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아무 인적도 없던 그 언덕에 홀연히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두 마리 중 몸집이 조금 큰 것은 어미, 아장아장 뒤따라 걷던 것은 새끼로 보였는데, 어미 개가 이방인인 우리를 보고 갑자기 달려 들 기세로 짖기 시작했다.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능은 인간이나 모든 동물이 같은 것이다.


글렌 Glen은 미안해하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스웨덴 사람으로 노르웨이에 와서 산 지 20년 가까이 되었고, 바로 그 근처에 살고 있다고 했다. 엄마와 딸 2인조인 우리의 모험담을 매우 흥미로워하면서, 놀라움과 부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근처에 묵을 만한 곳이 없는지 물었는데, 뜻 밖에도 바로 아래에서 민박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무심히 던진 말에 돌아온 행운의 찬스! 직접 전화를 걸고 있는 그의 옆에서 나는 연신 가격 흥정까지 부추겼다. 불현듯, 어릴 적 콩나물 값을 깎던 엄마 모습이 참 싫었던 기억과 오늘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딸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딸도 나를 부끄러워할지 모르지만,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는 앞장서서 숙소까지 우리를 안내해서 친구에게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민박을 하는 리처드 Richard는 호탕한 성격의 남자였다. 안 채에서 약혼녀와 둘이 살고 있는데, 독립된 바깥 채를 우리에게 쓰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 날 우리는 그리그의 이웃 주민이 되었다. 거실에 작은 부엌과 따로 침실이 갖추어진, 동네만큼 포근한 기운이 감도는 집이다.  

베르겐 어시장에서 사 온 게와 생선 튀김 등으로 근사한 저녁상을 차리고, 배경 음악으로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와 “피아노 콘체르토 A minor”를 반복 재생하며 마음껏 들었다. 비록 불안정한 와이파이를 통해 울려 퍼지는 음악이었지만, 화려한 연주회장에서 듣는 생음악 이상의 감동이 일었다. 이 날의 연주회장은 그러니까, 그리그의 숨결이 감도는 바로 그가 살던 이웃집이고, 여기에 창 밖의 부슬비는 운치를 한껏 더한 데다, 아껴 두었던 소주에 딸과의 수다까지 곁들여졌으니 말이다.


노르웨이 베르겐 언덕 위에서 우연한 조우로 만들어진 이런 인연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그와 함께 한 멋진 밤이 아쉽게 저물어 갔다.




베르겐 항구
베르겐 어시장


피아노와 작은 창문이 있는 그리그의 작업실
그리그와 함께 걸은 산책 길
우리를 그리그의 옆집으로 안내해 준 고마운 바로 그 녀석


밤새 그리그의 음악이 울려 퍼지던 곳 - 이 날, 마침내 고이 아껴 둔 ‘쏘주’를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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