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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Jun 17. 2018

51. 맥주가 필요해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마음 같아서는 노르웨이의 북쪽 끝, 함메르페스트(Hammerfest)나 트롬쇠(Tromsø) 같은 극지방에 근접한 도시까지 쭉쭉 올라가 보고도 싶지만, 그건 거의 또 다른 나라로의 여행이나 진배없다. 이번 우리 노르웨이 여행의 최북단은 올레순 (Ålesund) 까지로 정했다. 하루에 달릴 수 있는 거리는 정해져 있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은 끝이 없으며, 여행에서 휴식과 수면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이상 욕심을 내면 노르웨이를 영영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올레순은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한 도시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05년 대형 화재로 도시가 거의 전소된 뒤, 그 당시 새로운 세계적 예술 사조인 아르누보 (Art Nouveau, 독일 식 표현으로 유겐스틸 Jugendstil) 양식으로 도시를 재건하여, 이른바 “아르누보 건축 양식의 보고(寶庫)”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 당시로서는 세기 전환기의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건축 양식에 반영한 도전적인 형태의 도시였겠지만, 초고층 콘크리트 건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도시와 비교해 볼 때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자유스러우면서도 정제된, 화려한 듯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러운, 아름답고도 우아한 여성적인 느낌의 이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 곳 사람이 들려주는 도시의 재건 이야기, 폐허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 도시의 역사는 도시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의 말속에서 느껴지는 자부심을 이해할 만하다.   


노르웨이의 비싼 물가를 고려해 독일에서부터 잔뜩 싣고 온 우리의 양식, 맥주가 동이 나 있었다.  

곡예 운전을 포함해 줄곧 달려온 나는 맥주 한 잔이 너무 절실했다. 운 좋게도 호스텔 캠핑 장에 딱 하나 남아있던 캐빈을 차지하고 짐을 풀자마자 나와 딸은 근처의 슈퍼로 달려갔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를 반겨준 것은 다양한 이국적 라벨의 맥주로 가득한 냉장고. 그런데, 신나게 골라 담아 의기양양하게 계산대 앞에 선 우리에게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점원의 한 마디는, “8시가 넘었기 때문에 술을 팔 수 없습니다.”

‘아니, 맥주를 못 판다고..?’ ‘아니, 8시라고? 지금.. 8시 10분인데..?’ 딸과 나는 참으로 분하고 억울한 심정이었지만, 칼 같은 한 마디로 우리를 외면하는 점원의 모습은 단호했다. 술통에 도로 술을 붓고 얌전히 돌아서는 수밖에...


근처의 맥주 바를 찾아 이 간절함을 풀고 싶기도 했지만, 알고 보니 이 나라는 음주 정책 지표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나라로, 일반 음식점에서 파는 술도 시간과 종류를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평일이었으니 8시이지, 주말이었으면 6시, 일요일이었다면 아예 술을 살 수 없는 곳. 우린 맥주를 깨끗이 포기하고 대신 올레순의 노을을 보기 위해 언덕을 올랐다.   

올레순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노을이 아름다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언덕을 오르면 여러 개의 섬들이 이어진 도시의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나는데, 황금빛 붉은 노을의 품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안기는 올레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맥주는 놓쳤지만, 이 노을을 놓치지 않은 건 참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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