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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Apr 19. 2024

제22대 총선 개표 이야기 (삼국지 ver)


작가주) 작가의 과거 경험 한 자락을 비단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최근에 꺼낸 뒤 그것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거는 끝나있었다. 아침 8시 15분. 밤새 시끄럽던 개표장은 텅 비어 있다. 투표지가 부딪혀 서걱대던 소리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모두 다 사라졌다. 폭풍우가 지나간 후 짧은 평화가 찾아온 듯하다. 안도감과 공허함 그 중간에 나는 서있었다. 나는 선관위 공무원이다.


아침 햇살이 창문 틈새로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개표는 늘 전쟁이다.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은 전장의 용사들이고, 그들이 임명한 참관인들은 전장의 장수들이다. 그들에게 한 표 한 표는 군량과 마초나 다름없다. 사람과 기계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투표지들을 그들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 헌걸찬 기개 덕분에 부정이 자리할 곳은 없다.


개표장에서 밤새 세어진 표만 10만 표다. 적벽赤壁에서 제갈량이 조조에게 공짜로 받아온, 비 오듯 날아오던 화살의 갯수가 딱 10만 개였다. 그 어마무시한 양을 개표사무원들은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세어나갔다. 새로 도입된 수검표가 부정선거의혹에 작은 틈도 내주지 않았다.


이번 비례대표 투표용지 길이는 51.7cm 였다. 투표함이 개함 테이블에 올려지고 한소리 포향과 함께 2자 가까이 되는 초록색 투표지가 쏟아져 나왔다. 그 투표지들은 개표사무원들과 만나 세 합을 채 견디지 못하고 가지런히 분류가 되었다. 에움을 뚫고 밖으로 나가보려 하지만 가당치 않다. 하나하나가 주권자 국민의 표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 3경(자정)쯤 돼서야 개표사무원들은 겨우 늦은 간식으로 허기를 채운다. 아직 개봉조차 안된 투표함은 들판을 덮고 내를 이룰 정도다. 최저 시급도 안되는 수당을 받으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 대부분은 국민의 봉사자인 공무원들이다. 그들이 국민들을 위해 개나 말의 수고를 아끼지 않기에 개표가 잘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표는 장기전이다. 제갈량은 위나라 정벌을 위해 기산에 여섯 차례나 나아갔다. 새벽 2시가 넘었지만 개표장 안은 빛 샐 틈 없이 환하다. 개표사무원들은 여전히 표를 세고 있고 개표참관인들은 그 상황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있다. 개표 종료까지 그 누구도 물러남이 없었다.


그동안 투표지는 순서대로 옮겨진다. 개함부에서 투표지분류기 운영부로, 거기서 다시 심사부로 간다. 인간이 나누고 기계가 분류하여 센 투표지를 인간이 다시 한번 세고 또 기계가 센다. 투표지가 닳고 시들어 죽은 뒤에야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주권자 국민의 표심은 크고 무겁다.


최종적으로 선관위 위원들이 개표 결과를 확인한다. 정당에서 추천받은 위원들이 포함되어 공정성이 담보된다. 그 결과를 위원장이 공표하면 기나긴 개표여정이 마무리가 된다. 모든 투표구의 개표 결과가 모이면 당선인이 결정된다. 하나의 선거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아침 8시 15분, 이제야 끝났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 텅 비어 있던 개표장이 다시금 활기를 찾는다. 당선인 결정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당선인의 가족, 친구, 지지자들이 웃으며 개표장에 입장한다. 그들 품에는 상산의 조자룡이 단기필마로 적을 뚫고 품고 돌아온 유비의 아들보다 더 귀한 승리의 꽃다발이 안겨있었다. 오랜 기간 준비한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들만의 찐 기쁨이 느껴진다.


당선인 결정식까지 마치면 이제 집에 돌아가 긴 잠을 잘 수 있다. 개표 과정은 지난하고 어렵다. “일을 꾀하는 건 사람이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謨事在人 成事在天)”라는 제갈량의 독백처럼 선관위 공무원은 항상 긴장하고 최선을 다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한다. 국민들의 뜻을 온전히 선거에 담아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제22대 총선을 위해 안과 밖에서 노력해 준 많은 분들의 노고에 감격하여 절하며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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