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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un 09. 2016

기적을 바라는 기도

디어 마이 패밀리

한두 살, 심지어 태아의 기억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한다. 평범한 기억력을 가졌다. 4살 정도의 어렴풋한 이미지가 내겐 최초다. 외가에 6개월 정도 머물렀을 때의 기억이다. 두 살 터울인 형은 그곳에서 유치원을 조금 다녔으니 얼추 시기가 맞는다.


뭔가 꼬였던 모양이다. 한동안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도 다시 일자릴 찾아 나서야 했고 갑자기 어려워진 형편 때문에 형과 난 시골 외삼촌댁에 맡겨졌다.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또래의 사촌들. 직계가족과 다름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숙모, 삼촌이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홀어머니 모시며 자식 셋을 키우고 있는데, 사업에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여동생의 아들 둘을 맡아준 분들. 시골인심인지, 뜨거운 형제애인지, 결론은 고마운 기억이다.


북적북적 식구가 많아 행복했다. ‘가난해졌다’는 의미를 몰랐기에 마냥 신났다. 고작 두 살 많은 형은 달랐다. 그때부터 어른이 됐다. 원래는 6개월이 아니라 좀 더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단칸방에서 두 어린 아들을 고생시킬까 걱정했던 어머니는, 잘 지내고 있는 아들을 확인하고 다시 삶의 전쟁터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외갓집 앞에서 6살짜리 큰 아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아이가 물었단다.


엄마. 우리 안 데려가? 국민학교는 서울에서 다닐 거라고 했잖아!


발걸음을 더 내딛지 못한 엄마는 돌아와 두 아들을 와락 안았고, 난 멀뚱멀뚱 웃고 있었던 기억이 다. 그리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1층 단독주택 세 개의 방 중 한 칸에 네 식구가 둥지를 텄다.


몇 가지 기억은 지나치게 선명하다. 단칸방 산다고 놀렸던 동네 아이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전했을 때 굳어진 엄마의 얼굴, 동네 아줌마들이 놀러와 있을 때 일부러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 고군분투하며 배변에 성공한 후, 깔끔한 뒤처리를 하고 나와 온몸으로 칭찬받았던 일. 기뻐하던 엄마의 얼굴. 그런 소소한 장면들.


80년대 건설붐과 함께 동반 성장한 우리 집은 옆골목의 전세로, 다시 그 집을 매입해서 대학 졸업 때까지 20년을 살았다. 무작정 상경한 젊은 통영 사나이, 아직까지도 정확한 학벌을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성실함. 늘 세련되고 현명했던 어머니. 지금은 어머니마저 일흔을 넘기셨다.

결혼도 늦었고, 8년 동안 6번의 유산과 건강한 젊음을 바꾼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일흔한 번째 생신을 조촐하게 보내고 나서 일주일쯤 지났다. 오랜만에 사촌 여동생의 연락을 받았다. 지금은 멋진 '돈豚사'를 운영하는 둘째 형만 시골집에서 삼촌과 숙모를 모시고 있다. 첫째 형과 막내 여동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아들 돌잔치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최초의 기억을 함께한 또 다른 형제들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는 언제나 유효하다.


친가, 외가를 통틀어 유일한 여동생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말 그대로 가슴이 철렁했다.


울 엄마 췌장암 말기래. 손을 쓰기 어렵데.


어떤 순간은 정적이 자연스럽다.


요즘 노희경 작가의 신작 ‘디어 마이 프렌즈’에 푹 빠져있다. 출퇴근길 핸드폰으로 다시 보기 하며 몇 번을 울컥했고 눈물을 감췄다. 극 중 대부분의 여배우들이 엄마와 또래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문학의 개연성과 핍진성 verisimilitude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있다.

70년을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몇 편의 드라마다. 죽음이 근거리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면서도 오늘을 살아낸다. 주변 지인의 고통은 눈물로 공감하지만 자신을 향한 손가락질에는 지나치게 침착하다. 옛 성현의 말씀을 거들먹거리는 잘난척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드라마 주인공들의 성찰은 아직 배우지 못했기에, 뛰는 가슴만큼 손도 떨렸다.


주말이 왔고 온 가족이 전주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남은 3개월. 숙모는 항암치료가 아닌 요양병원을 택했다. 막내딸은 자신의 세 딸을 모두 데리고 간병인을 자처했다. 내려가는 차 안에서, 도착하면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자는 무언의 다짐을 주고받았다.


사촌들을 만나 면회 공간으로 이동했다. 평생 단 한 번도 일을 놓지 않았던 건강했던 숙모와 겨우겨우 두 아들을 출산하고 항상 쇠약했던 엄마가 만났다. 왜소한 엄마가 이상하게 커 보였다.


소식을 접한 많은 지인들이 병문안을 왔고 오자마자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숙모가 위로하는 어색한 일이 반복됐다고 들었다. 옆 병실의 간병인이 그 모습을 보고 한 얘기를 숙모가 웃으며 전해줬다.


왜 그렇게들 다 운데요. 췌장암만 아니면 다 살아나가는디.
내가 그 췌장암이요... 괜찮으니 그리 미안해 마시오.


또다시 숙모는 간병인을 위로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태초의 모습이 그러했듯 아들 녀석이 신나서 뛰어다니는 통에, 평범한 명절에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차 안에서 했던 약속을 겨우 지킬 수 있었다. 오히려 더 웃었고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부여잡고 싶었다.


내가 남들보다 십 년은 더 열심히 살았응께.
십 년 더 빨리 간다고 생각 허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서 후회는 없는디.
어머님 살아생전에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거 하나 걸리오.


본인의 어머니를 본인보다 훨씬 더 오래 옆에서 모셨던, 최고의 며느리였던 숙모의 그 말에 울 엄마의 눈시울은 뜨거워졌고, 난 고개를 돌렸다.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이럴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깨달은 듯 초연한 숙모의 표정은 가슴을 울렸다.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그 통찰. ‘디어 마이 프렌즈’의 배우들이 보여준 연기는 바로 내 앞에 실재다.


기적을 바라는 이들이 한데 모인 그곳에서 가족은 다시 만났고, 함께하는 그 시간이 허무하지 않도록 잘 견뎠다. 다시 만나기를 염원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 기간 냉담해온 유물론자는 하릴없이 절대자를 찾아 기적을 내놓으라 기도하고 있다. 신께 바라는 요구는 간단하다. 최대한 고통 없이 남은 시간을 보내시는 것. 좀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주어져서 오직 희생으로 점철된 한 여인의 삶이 온전한 자기만의 것으로 거듭나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조만간 숙모를 다시 만났을 때, 기도가 기적을 만들어낸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럴 거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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